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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강남역 여성 피살, 집단의 슬픔은 왜 터져나온 걸까?

사진=게티이미지/이매진스
대학생 때였다. 전공과목 이수 학점은 거의 채우고 나서 타전공 수업을 죽 훑고 있는데, 아주 재미있는 강의명이 눈에 띄었다. '범죄와 범죄자의 심리', 심리학과 전공 강의였다. 범죄자가 범죄를 저지르며 하는 행동에 어떤 심리가 작동한다면, 그 메커니즘은 무엇일지 궁금해 수강 신청했다.

기대했던 것처럼 수업은 흥미진진했다. 범행 후 습관처럼 담배를 태웠던 연쇄살인범이 결국 담배꽁초에 남은 DNA로 검거된 사건, 살인 후 시체를 토막 내는 사람의 심리, 어렸을 때 가정폭력에 노출된 피해자가 가해자로 이어지는 악순환 같은, 학부생이었던 당시의 나로선 '쇼킹'한 내용이었다. 내내 흥분됐고, 즐거웠다.

어느 날은 일부러 손을 들어 발표를 맡아 잔인한 사건의 내용을 공부해 소개했다. '나는 이런 것들에 전혀 겁먹지 않아요'를 뽐내기라도 하듯, 괜히 담담한 척 했다. 치기어린 행동인데, 그땐 그게 멋있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특별 수업의 일환으로 현직 경찰이자 프로파일러가 외부 강사로 나왔다. 그 날 그가 강의에 소개한 사례들은 책으로, 기사로 만났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죄다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모자이크했거나, 익명 처리했지만, 훨씬 더 생생하고 그야말로 '진짜' 범죄 현장에 다녀온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후일담이었다.

귀에 익게 들었던 유명한 사건들도 언급됐다. 난 가장 앞줄에 앉아 '여느 영화나 책보다도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집중했다.

"이번 사건은 범행의 수법이 치밀하진 않지만, 범인도 쉽게 잡혔고. 다만 피해자가 젊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굉장히 안타까웠던 기억이 나네요."

피해자는 아파트에서 혼자 자취하는 독신 여성이었다.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걸로 봐선 잠자리에 들기 직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은 평소 굉장히 깔끔한 성격이었다. 음식물쓰레기 봉투가 가득 찬 것도 아니었지만, 밖에 버리고 와야겠다고 결심했다.

잠시 주차장 옆 쓰레기장에 버리고 오면 된다는 생각에, 여성은 현관문을 잠그지 않은 채 집을 비웠다. 그리고, 그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아파트 복도에 숨어있었던, 여성과 일면식도 없는 피의자가 불 꺼진 집에 들어갔다. 그리곤, 돌아온 여성이 문을 잠그고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성폭행을 시도했다. 여성은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피의자는 흉기를 휘둘러 여성을 살해한 뒤 도망했다. 시체는 한참 후 침대 밑에서 발견됐다.

그 순간, 내내 흥미롭게, 그야말로 태평히 강의를 '관람'하고 있던 내가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전에 더욱 잔인하고 무시무시한 범죄 이야기도 잠자코 들었던 내가, 이 사건엔 완벽하게 압도됐고 무너졌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어 강의실 뒷문까지 달려 나갈 자신이 없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필사적으로 버티며 끄억끄억, 소리 나지 않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나 역시 피해 여성처럼 원룸에서 자취하고 있었다. 건물 1층에 살았는데, 키우는 고양이가 쓰레기통 뒤지는 장난을 좋아했던 터라 자기 전 반드시 건물 밖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와야 했다. 1층이라 빨리 달려 나갔다 돌아오면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잠옷 위에 간단한 겉옷을 걸치고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고 오길 1년 가까이 반복했다. 그 때마다 열쇠로 문을 잠그고 다녀온 적은 기억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단 한 번도, '내가 집을 비운 그 잠깐 사이 누가 들어와 숨어 있으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을 한 적 없었다.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TV를 켜둔 채 양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오늘 있었던 일이나 내일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쓰레기 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반복적으로 기계적으로 해오던 일이었고, 때문에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어쩌면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 '하마터면 나도 죽을 뻔 했어'

똑같은 행동을 했지만 피해 여성은 숨졌고 난 살았다. 그 여성은 어쩌다 한 일이었다는데, 난 매일같이 그러길 반복하며 살았다. 이상한 주장이라는 걸 알지만, 살인자가 집에 들어와 숨어 있을 확률은 내 쪽이 높았다. 나와 살해된 그녀, 두 사람만 놓고 수학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설명을 시도한다면, (응당) 그 일은 나에게 일어나야 했다.

살인자에게 그런 형평성을 요구하는 건 웃기지만, 그렇다 해도 피해 여성 입장에선 너무나 억울할 일이다.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는 데엔 어떤 규칙도 없었다. 난 숨진 여성에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녀가 날 대신해 죽은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거짓말처럼 어느 날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남역 인근에서 20대 여성이 피살됐다. 추모 열기는 전례 없이 뜨겁다.

"왜?"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대부분의 여성이 이번 사건의 피해 여성에게 가질 수밖에 없는 부채의식을 설명하고 싶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내가 될 수도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드는 미안함, (일종의) 가책 같은 것 말이다. 이런 무자비한 세상에서 그 동안 무신경하게 겁 없이 살아온 것에 대한 후회도, 운이 없으면 재수가 없으면 그 다음 순번이 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무력감도 작용했을 거다.

주목해야 하는 건 사건 직후 상당한 여럿의 울음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는 점이다. 추모 열기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급속히, 그야말로 불붙듯 일어났다. 각각의 개인이 자신의 어떤 역사를 대입해 이번 일을 크게 받아들였는지 슬퍼하는지를 모두 추적할 순 없다. 다만 모두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안전하지 않다'고 전제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생명에 위협을 느꼈고, 그 공포가 '살다 보면 저런 일을 겪을 수 있구나, 나는 조심해서 그런 위험으로부터 격리돼야지' 이렇게 타자화해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벌써부터 관계 부처와 언론에서 하나의 주제나 키워드로 거칠게 인과관계를 구성해 이번 사건을 규정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 건너뛰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가 '이번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같은, 질문하기 그 자체다.

논의를 '피의자의 범행동기가 여성혐오인가 아닌가?'로 끌고 가면, 사건 이후 발생한 현상도 '맞거나 틀린' 것으로 결론지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동기가 여성혐오 때문이 아니었다면, 지금 같은 집단의 슬픔이 번지수를 잘못 찾은 괜한 투정이 되는 건가? 애도의 명분이 사라지나?

그보단, 여태 외면하고 있던 혹은 내재돼 있던 우리 사회 어떤 슬픔이 비로소 표면에 드러나기 시작한 것인지 그 정체를 들여다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 일만큼은 좀 덜 신속해도 좋을 것 같다. 제대로 할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터져 나온 이야기들을 최대한 많이 듣고, 감정이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향신문이 추모의 메시지를 모두 기록했다. 다음은 그 중 일부다.
- 새벽 1시에 밖에 있던 것도, 혼자 화장실을 간 것도 여자로 태어난 것도 어느 것도 고인의 잘못은 없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나도 오늘 우연히 살아남은 한 여성이다.
-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일반화 하려는 게 아닙니다. 여자들이 잠재적 피해자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에요. 여자가 남성(Gender)의 보호가 없이도 안전한 사회를 바랍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그 화장실은 나도 가본 적 있는 화장실입니다. 나는 정말 우연히 살아남았습니다. 나는 살아남은 자로서 책임을 지겠습니다. 더 이상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하는 사회를 묵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출처: [강남역 10번 출구 포스트잇] 경향신문이 1003건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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