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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스포일러' 타령으로 현혹하지 말 것!"…'무개념'의 변명

[취재파일] "'스포일러' 타령으로 현혹하지 말 것!"…'무개념'의 변명
영화 ‘곡성’의 흥행 질주가 무섭습니다. 개봉 후 열흘이 조금 넘었는데, “미끼를 덥썩 물어 버린” 이들이 이미 5백만 명을 향해 갑니다. 개봉 직후 뜨거웠던 ‘스포일러 논란’을 감안하면, 역시 영화는 스토리가 궁금해서 보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기회에 영화계의 오랜 논란인 ‘스포일러’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까 합니다. 영화계 주변에서 일하는 이들에게 ‘스포일러’는 호환(虎患)이나 마마 못지 않게 무서운 대상입니다. 스포일러가 돌면 흥행에 지장이 생길 거라는 우려가 ‘상식’으로 여겨지는 탓입니다.
 
그러다 보니 기자나 평론가들 입장에서도 어려운 점이 적지 않습니다. 기사를 쓰려고 해도, 개봉 전엔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주최측에서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개봉 후엔 내용을 알아도 기사에 담을 수 없으니 더 답답합니다. 내용을 좀 담았다간 ‘무개념’으로 찍혀 손가락질 받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곡성’의 흥행은 스포일러에 관한 영화계의 기존 ‘상식’에 물음표를 던집니다. 알려진 대로 곡성은 미스터리와 스릴러, 오컬트가 뒤섞인 영화입니다. ‘귀신’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니 ‘호러’를 추가해도 될 듯 합니다.
 
개봉 직후부터 SNS엔 주인공들의 관계와 미스터리를 푸는 스포일러들이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쏟아졌습니다. ‘상식’대로라면, 곡성 같은 장르의 영화에선 더더구나 스포일러는 ‘치명타’입니다. 그런데도 멈출 줄 모르는 곡성의 흥행 질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 ‘곡성’ 흥행 주도한 ‘입소문'

영화계에서 자주 쓰는 용어 가운데 ‘입소문’이라는 게 있습니다. 영미권에서 말하는 바이럴(viral)입니다. 말 그대로 바이러스처럼 급속히 퍼지면서 화제를 일으키는 걸 뜻합니다.
 
‘곡성’ 흥행의 출발점은 언론 시사 이후 쏟아져 나온 기자와 평론가들의 호평이었습니다. 특히 영화팬들 사이에 꽤 알려진 어느 평론가가 만점을 줬다는 ‘입소문’이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개봉 전부터 나홍진 감독의 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대감이 이 소문을 기점으로 일반 관객들에게까지 확산한 겁니다.
 
재미있는 건 ‘입소문’을 대표하는 후기와 평점의 변화입니다. 개봉 후 첫 주말까지 5일은 말 그대로 호평 일색이었습니다. ‘최고’ ‘역대급’이라는 찬사도 심심찮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둘째 주 접어들면서부터는 슬슬 다른 평가들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쪽에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열광하는 가운데 다른 한 쪽에선 고개를 갸우뚱 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겁니다. “내 취향엔 안 맞더라”부터 “소문 믿고 갔는데 기대만 못하더라”는 평가, 심지어 “언론과 평점에 속았다”는 얘기들까지 나왔습니다.
 
● 엇갈린 평가, 왜?

영화계에선 초기 평점을 주도한 이들을 크게 두 그룹으로 분석합니다. 한 그룹은 영화인, 평론가, 기자 등 영화계 주변에서 영화를 ‘업’으로 다루는 전문가 그룹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5백만 관객을 동원했던 ‘추격자’나 후속작인 ‘황해’를 보고 나홍진 감독에게 매료된 열성팬들입니다.
 
어느 평론가의 말을 빌면 나홍진 감독은 “기존의 한국 영화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감독입니다. 한국 영화계를 점령하고 있는 흔한 ‘성공 공식’에서 비껴 서 있는 감독입니다. 중반까지는 ‘유머 코드’를 툭툭 던져주면서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감동’으로 눈물을 끌어내는 공식 말입니다. ‘곡성’은 그런 나홍진 감독의 뚝심과 개성이 전작들보다 한층 강해진 작품입니다.
 
안전한 성공의 길을 일부러 외면한 새로움과 도전, 파격만으로도 전문가 그룹에서 쏟아진 호평의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만 합니다. 칸 영화제에서 상영 직후 14분 동안 기립박수가 이어졌다는 걸 봐도 그렇습니다. 나 감독의 개성이 좋아서 개봉 날만 손꼽아 기다렸던 팬들이 열광하는 건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곡성’의 개봉 첫 주 관객 수는 231만 명입니다. 개봉 전부터 뜨거웠던 예매 열기를 고려하면, 첫 주 관객의 상당수는 나 감독의 열성팬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연히, 첫 주 후기를 주도한 이들 역시 이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둘째 주부터는 다릅니다. 둘째 주였던 지난 주 중반, 한 영화관을 찾았습니다. 관객들에게  ‘곡성’을 보러 온 이유를 물었습니다. 중고등학생부터 노년층, 혼자 영화관을 찾은 중년 여성 등 다양한 관객들이 있었습니다. 상당수가 “소문 듣고 왔다”고 답했습니다. 전문가나 감독의 열성팬이 아닌 ‘일반 관객’들이 섞이기 시작한 겁니다.
 
개성이 강한 장르물인 만큼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겐 이상하고 어색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잘 모르겠다”,  “내 취향은 아니더라”는 후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한 이유가 엿보입니다.
 
● ‘스포일러’와 ‘입소문’ 사이

놀라운 건, ‘입소문’이 엇갈리기 시작한 둘째 주 들어서도 곡성의 관객 수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곡성은 둘째 주에도 223만 명을 모았습니다. 첫 주의 231만 명과 큰 차이가 없는 숫자입니다.
 
영화계에선 통상 둘째 주 관객 수가 개봉 첫 주보다 15~20% 이상 줄어드는 것을 ‘평균’으로 봅니다. 둘째 주에도 첫 주와 비슷한 관객을 동원했다는 건 곡성의 인기가 평균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뜻입니다. 엇갈리는 ‘입소문’ 속에서도 곡성에 대한 관심 자체는 계속 이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영화계에선 그 이유로 영화가 가진 ‘힘’을 꼽습니다. ‘스포일러’를 통해 이미 알만한 스토리는 다 알면서도 누구나 좋아할 영화는 아니라는 얘기도 들었는데도 여전히 많은 관객들이 곡성을 찾고 있습니다. 어떤 영화길래 이렇게 시끄러운지 궁금해서라도 본다는 뜻입니다. 
 
만화 같은 로맨스로 30%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의 재방송이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합니다. 수십 년  전에 개봉한 영화가 재개봉, 재재개봉을 하면서도 10만 가까운 관객을 모으기도 합니다. 표까지 사서 보러 온 관객들 가운데는 이미 그 영화를 봤다는 이들이 상당수입니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가 단순히 ‘스토리’가 궁금해서만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최근에 영화 홍보 관계자들을 만나면 일하기 어렵다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홍보해도 개봉 후 며칠 사이 SNS에 ‘핵노잼’ 후기 몇 건만 올라오면 끝”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관객들의 눈이 예리하다는 뜻입니다.
 
‘스포일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질주하는 ‘곡성’의 힘을 보면서 ‘입소문’과 ‘스포일러’의 경계를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됩니다. 오로지 반전 하나를 위해 진행된 영화의 반전을 공개하는 ‘악성 스포일러’마저 옹호하려는 건 아닙니다. 만듦새가 좋다면 ‘스포일러’ 마저도 ‘짱잼’ 못지않은 ‘미끼’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능하면 스포일러는 피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일 하다 보면 어쩌다 가끔씩은 피치 못해 스포일러도 섞게 되는 ‘무개념’ 1인의 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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