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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만성 휴식 부족이 낳은 ‘쾌속 릴랙스’ 신드롬(?)

[취재파일] 만성 휴식 부족이 낳은 ‘쾌속 릴랙스’ 신드롬(?)
요즘 트위터에선 소 한 마리가 그려진 캔 음료가 인기입니다. 스트레스를 줄여 주고 긴장을 완화해 준다는 이른바 ‘릴랙스 음료’입니다. 지난달 말부터 이걸 마시면 잠을 푹 잘 수 있다는 글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5월 초부턴 어디서 구할 수 있느냐는 질문들이 많이 보입니다. 그리고 중순이 되자 아예 어디서도 살 수 없다는 글뿐입니다. 트위터 사용자 특유의 해학이 묻어나는 ‘낚시글’도 많습니다. 드디어 이 음료를 구했는데 빛깔마저 영롱하다는 사진 설명을 보고 들어갔더니, 손으로 캔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빈손 사진뿐이더군요.
이 음료의 이름은 ‘슬로우카우’. 캐나다에서 2008년 처음 출시됐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2014년부터 수입되고 있죠. 눈 밝은 편의점 상품 기획자가 그해 10월 제품을 매장에 내놓으면서 국내 소비자들은 이 음료를 처음 접하게 됐습니다.

이 음료엔 독특한 스토리가 있습니다. 일단 전설적인 카페인 각성 음료 ‘레드불’을 대놓고 패러디했습니다. 일단 ‘성난(red) 수소(bull)’를 의미하는 이름과 정반대로, ‘느린(slow) 암소(cow)'라고 이름을 지은 것부터가 그렇습니다. 개발자가 직접 도안한 캔 겉면에는 아예 숙면 수준이 아니라 뻗은 채 누워있는 암소 한 마리가 그려져 있습니다. ‘성난 수소’엔 수소 두 마리가 정면으로 ‘뿔 치기’ 하는 모습과 정반대입니다.
이 제품을 처음 내놓은 곳은 GS25입니다. 사실 재작년 10월부터 올해 4월까지만 해도 ‘느린 암소’는 ‘성난 수소’와 매출 면에서 비교가 안 됐다고 합니다. 둘을 합친 매출을 100으로 가정할 때, 둘의 판매 비율은 3 : 97이었답니다. 그런데 5월 되자, 그것도 2주 만에 이 비율이 18 : 82로 껑충 뛰었습니다. 그러더니 국내에 들어와 있는 재고는 바닥난 상태가 됐습니다. 서울 논현로의 이 편의점 본점 직원은 “전화로 제품이 있는지 확인한 뒤에 이걸 사가는 손님도 여럿 있었다”고 말하더군요.

저 역시 지난 16일 해당 제품의 실물을 영상에 담기 위해 알아본 결과, GS25에는 정말 단 한 캔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 음료를 판매하는 롯데마트에도 역시 남부지방 일부 매장에만 몇 캔 남아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결국, 편의점 본사에 보관된 샘플을 빌려서 촬영을 해야했을 정도입니다.

● ‘릴랙스 음료’의 실체는 탄산 든 냉 허브차?

그럼 이걸 수입하는 업체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의 원인을 어디서 찾고 있을까요. 결론은 ‘SNS 효과’였습니다. 영업 담당자는 “실제 효능을 봤다는 소비자들이 블로그나 SNS에 글을 올린 게 확산되면서 인기로 이어진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SNS에 올라온 ‘효능’이란 뭘까요. 대개 이 음료 덕분에 ‘깊은 잠을 잤다’는 거였습니다. 효능이 어디서 오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제품이 아닌 원재료에 효능이 있는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슬로우카우’는 건강기능식품도 아니고 그저 탄산음료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 들어있는 원재료가 긴장을 완화하고,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성분이라는 거였죠.

그래서 성분을 자세히 봤습니다. 

눈에 띄는 건 캐모마일 추출물이나 시계꽃 추출물처럼, 허브차 성분이 많다는 거였습니다. 제가 모르는 성분을 문의하기 위해 가정의학과 전문의인 심경원 이대목동병원 교수를 찾아갔습니다. 심 교수는 ‘테아닌’이란 성분을 주성분으로 지목했습니다. 테아닌(Theanine). 이 성분은 스트레스 완화와 안정감을 주는 물질입니다. 이름은 이국적이지만, 사실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성분이었습니다. 바로 녹차와 홍차의 주 성분이기 때문이죠. 결국 ‘느린 암소’ 역시 차에 구연산, 감귤향을 섞고 탄산을 첨가한 겁니다. 한 인터넷 개인방송 진행자는 ‘페퍼민트’ 맛이나 ‘메론 향’이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결국 탄산이 든, 찬 케모마일 허브차였던 겁니다.

그럼 이걸 마시면 졸리긴 한 걸까요? 심 교수는 의학적으로도 이런 효과가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일종의 자기 확신 현상, 즉 플라시보 효과도 한몫할 거라고 합니다. 실제 최근 이 음료를 동낸 소비자들은 이 음료수를 ‘잠 오는 약물’로 인식하고 마신 걸로 보입니다. 이런 심리적인 기대 속에 찬 허브차를 마신다면, 허브차 특유의 안정감이 찾아오게 되죠. 결국, 긴장이 풀리는 효과를 거뒀으니 잠이 오는 건 당연하죠.

그런데, 이런 ‘릴랙스 음료’ 원조는 우리 주변에 이미 널려 있습니다. 녹차나 허브차가 대표적입니다. 그럼 이런 차 류의 매출도 함께 늘었을까요? 지난해 1월부터 4월까지 매출과 올해 같은 시기 매출을 비교해 봤습니다. 온라인쇼핑몰 옥션에선 허브나 루이보스차 종류 매출은 7% 감소했습니다. 국화차와 꽃잎차는 30% 줄었다고 합니다. 대형마트 이마트에선 녹차는 판매량이 6.5% 줄었고, 캐모마일 허브차 같은 침출차 역시 10.5% 정도 사가는 사람이 감소했습니다.
이런 차는 천천히 뜨거운 물로 우려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만드는 과정부터가 휴식의 한 과정입니다. 테아닌이나 케모마일 추출물처럼 ‘슬로우카우’와 성분도 거의 같기 때문에 스트레스 완화 효과는 더 높다고 할 수 있겠죠. 제대로 느린 차는 찾는 사람이 줄어든 반면에, 캔에 든 ‘릴랙스 음료’만 갑자기 인기인 건 무슨 까닭인 걸까요.

‘신속한 릴랙스’ 라는 형용모순

“아무 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 몇 년 전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널리 퍼진 적이 있습니다. 한 카드회사 광고 카피로 쓰였죠. 그런데 이런 얘기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는 건, 모두가 무위의 삶을 즐기자는 선언은 아닐 겁니다. 오히려 휴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웃음이 절로 나오는 농담에 가깝죠. 절대 휴식 시간이 늘 부족하기에, ‘주어진 휴식 시간’에 격렬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미는 아닐까요.

그래서 이번 품귀 현상은, 우리 사회가 앓아온 한 가지 병증을 드러낸 거라고 봅니다. 슬로우카우를 마셔봤다는 트위터 사용자들은 잠을 ‘푹’ 잘 수 있었다는 자랑을 늘어놨습니다. 한정된 수면 시간의 질이, 캔 하나로 높아졌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잠깐을 쉬어도 푹 쉬어야 한다는 강박증을 많은 사람이 겪고 있다는 얘기겠죠. ‘신속한 휴식’, 자발적인 혹은 비자발적인 노동 중독이 만든 씁쓸한 형용모순입니다.

취재 과정에 알게 된 ‘꿀잠’ 자는 법, 소개합니다. 바로 잠을 방해하는 요소부터 줄이는 겁니다. 알코올과 카페인 두 주적부터 좀 줄여보는 게, 꿀잠 그리고 질 높은 휴식의 시작이랍니다. 아 참, ‘느린 암소’ 캔 음료는 7월 초, 발주한 물량이 국내에 도착하면 시중에 다시 풀린다고 합니다.
▶ '마시면 잠 푹 잔다' 입소문…봤더니 '그냥 허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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