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목 받아 챌린지에 응하는 것이 하나의 자랑이자 유행처럼 됐었지요. 그 해 ‘아이스 버킷 챌린지’로 미국의 한 단체에 모인 기금이 우리 돈으로 1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으니, 성공적인 캠페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캠페인의 가장 핵심적인 목표였던 루게릭병에 대한 관심을 모으는 데 성공했습니다.
세상에 질병을 분류하는 기준은 여럿 있지만, 내가 걸린 병과 다른 이의 병, 이보다 더 절대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은 없을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의 중하고 경함을 떠나 내 병을 가장 심각하고 힘들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질병을 다른 병과 비교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무의미한 일인지 잘 압니다. 특히 치료 방법이 없는 희소난치성 질환을 앓는 환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은 병의 종류와 관계 없이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루게릭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루게릭병은 이름부터 남다릅니다. 본래 병명은 근위축성측삭경화증(ALS)이라는 어려운 이름이지만, 20세기 초 베이브 루스와 함께 뉴욕 양키스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야구 스타 루게릭의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야구선수로 전성기를 달리던 35살에 병을 진단받고 38살에 숨진 이 비운의 스타 덕분에 루게릭병은 다른 희소난치성질환보다 잘 알려져 있습니다.
루게릭 환자들은 근육이 쇠약해지고 위축돼 움직일 수 없고, 씹거나 삼키지 못하고 결국 숨도 쉬지 못하게 되지만 감각이나 인지 기능은 정상입니다. 이는 환자가 마지막까지 고통을 느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양한 기기의 도움을 받아서 의사표시를 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 같은 캠페인을 통해 격려 받기도 하고, 캠페인을 독려할 수도 있는 겁니다.
● '헌팅턴병' 들어보셨습니까?
헌팅턴병은 퇴행성 뇌 질환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루게릭병 환자들처럼 운동 능력을 상실하는데, 정서 장애를 겪다가 치매까지 앓게 됩니다. 보통 3,40대에 많이 발병하고, 발병 후 10~25년 정도 생존할 수 있습니다. 헌팅턴병 환자의 가족들은 루게릭병 환자 보호자보다 더한 고통을 더 오랜 기간 겪게 됩니다.
외국의 통계를 보면 인종과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유럽과 미국에서는 10만 명 당 5~10명 정도가 이 병을 앓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시아인의 헌팅턴병 유병률은 10만 명 당 0.4명~1명 정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인구가 5,156만 명이니, 헌팅턴병 환자는 대략 200~500명 정도 될 것이라는 추산이 가능합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를 보면, 헌팅턴병 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닌 기록이 있는 사람이 1년에 200명 남짓입니다. 정말 국내 헌팅턴병 환자는 200명에 불과할까요?
지난달 경기도 군포의 박 모씨 댁에 찾아갔습니다. 박씨는 40대 여성으로, 헌팅턴병에 걸린 40대 남편과 10대 아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모두 10여 년 전에 발병해, 현재 인지 기능을 상실한 상태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지원하는 장애인 활동보조인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낮에는 일주일에 이틀 정도 밤에는 매일 혼자 두 명의 환자를 돌봐야 합니다. 욕창이 생기지 않게 몸을 움직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기는 일은 물론 가래를 제거하는 일도 보호자의 몫입니다. 박씨는 몸이 힘든 것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크다고 토로합니다.
헌팅턴병 환자 가족들은 병원에 다니는 200명 외에 숨어있는 환자들이 더 많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는 치료법이 없어서 병원에 다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고, 유전성 질환이라 가족들이 모두 쉬쉬하기 때문에 등록된 환자가 적다는 것입니다.
루게릭병도 5~10% 정도는 유전에 의해 발병하지만 대부분은 유전과 관계 없습니다. 그러나 헌팅턴병은 우성 유전으로, 헌팅턴병 환자는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이 병을 앓았던 사람입니다.
자녀에게 치명적인 퇴행성 뇌질환을 물려줄 확률이 50%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그래서 이 병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증상이 심한 희소난치병임에도 불구하고, 루게릭병을 비롯한 근육병 환자들과 달리 병원비 90% 경감 혜택만 받고 있다는 것이 헌팅턴병 환자 가족들의 설명입니다.
“미국에는 환자가 많은데 지금 한국에는 등록된 환자 수가 많지 않고, 또 복지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이 병에 대해서 잘 파악을 못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른 병에 비해서 지원을 못 받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병은 걸렸어도 가족들이 공개하지 않고 숨기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환자 수가 있는지 파악하기 좀 어렵거든요. 환자 수가 적다 보니까 더 그런 것 같아요.”
환자 수가 많고 환자 단체가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질환일수록 더 사회적 관심을 받고, ‘상대적으로’ 많은 지원을 받는 것은 어느 정도는 불가피한 일입니다. 관심을 갖고 한참 들여다 봐야 그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으니까요.
헌팅턴병 환우회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회원 수는 110명에 불과합니다. 헌팅턴병처럼 드러내놓기 어려운 유전질환 때문에 말 못할 고통을 받고 있다면, 보건복지부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사회안전망을 책임지는 정부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입니다.
<다음 편에 이어서>
♦ 헌팅턴병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부득이 루게릭병을 거론하게 됐습니다. 루게릭병 환자분들 역시 부족한 지원에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이 글과 관련된 어떤 의견이나 지적, 문제 제기 모두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음편에서 헌팅턴병 환자들에게 어떤 지원이 필요한지 짚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