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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새누리당은 정말로 정신 차렸나…또 무시되는 절차적 정의

[취재파일] 새누리당은 정말로 정신 차렸나…또 무시되는 절차적 정의
“새누리당이 민주적인 규범과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로서 이를 얼마나 내면화하고 실천했을까. 결과적으로 민주적 규범을 경시한 면이 있다. 새누리당은 공천과정에서 당헌 당규를 정책 편의를 위해 공공연하게 무시했다. 여당 내 기본 규칙은 무시되고 지켜지지 않았다. ……

유권자들은 여야 갈등, 보수와 진보 갈등 등 민주와 반민주의 대결이 아니라 민주적 컨센서스에 의해 정의돼야 한다는 걸 명령했다. 이번 선거는 민주적 규범은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는 걸 일깨워준 선거였다.” 

국내 대표적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진단입니다. 지난 25일 새누리당 쇄신 의원들 모임인 새누리당 혁신 모임 자리였습니다. 최장집 교수는 새누리당 총선 참패의 원인을 절차적 정의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난리 법석을 떨었던 공천 문제, 그 저변을 꼼꼼히 살펴보면 새누리당 자신이 만든 규정조차 간과했던 둔감함이 핵심이라는 겁니다.

기자들끼리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새누리당은 철학이 없다고 말합니다. 철학이 아니라 사람과 인맥이 중심인 당, 이는 박근혜 대통령과 친한 계파란 뜻의 ‘친박계’와 친박계가 아니란 뜻의 ‘비박계’란 네이밍만 봐도 그렇습니다.

한 국회 보좌관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더불어민주당 친노 세력의 근간은 철학이다. 같은 철학적 공감대가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급되며 명맥을 유지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지 7년이 다 돼 가는데도 여전히 강한 응집력이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다르다. 철학이 아니라 사람이 근간이다. 그것도 힘 센 사람. 선거에 참패해서 중심 인물의 힘이 빠져버리면 계파 자체가 흔들려버린다.”

철학 없는 당, 사람으로 헤쳐모이는 당, 철학이 아닌 힘 센 자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되고, 힘 센 자의 힘이 빠져버리면 세력 자체가 존폐 위기에 내몰리는 당. 결국, 철학의 부재는 옳고 그름에 대한 감수성을 둔감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새누리당은 절차 정의를 힘 센 자의 뜻에 끼어다 맞추는 데 능숙했고, 자신들이 만든 당헌 당규조차 그렇게 이용했습니다. 최장집 교수는 이런 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겁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총선 다음날조차 자신들의 규정을 철저히 무시해 버립니다. 새누리당 당헌 당규 제113조 3, 4, 5항입니다.

③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장은 전국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대표최고위원 또는 대표최고위원 권한대행이 임명한다.
④ 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은 비상대책위원장이 상임전국위원회의 의결을 거쳐 임명한다.
⑤ 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되면 최고위원회의는 즉시 해산되며, 비상대책위원회는 최고위원회의의 기능을 수행하고, 비상대책위원장은 대표최고위원의 지위와 권한을 가진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지기 위해서는 기존의 최고위원회가 있어야 합니다. 그 전에는 최고위를 없애면 안 됩니다. 그게 새누리당 당헌 당규입니다.

그런데, 정치적 책임을 진다며 최고위원들은 선거 바로 다음 날 최고위를 해산해 해버렸습니다. 한 최고 위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이렇게 말하더군요. “당헌 당규 가지고 옥신각신해서 뭐하나. 총선에서 패했는데. 십자가 질 사람들이 십자가 지는 게 맞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스스로의 당헌 당규를 무시한 새누리당은 다시 한 번 내홍을 겪습니다. 원유철 원내대표는 홀로 남아 비대위원장을 맡기로 했지만, 총선 패배에 책임 있는 사람이 또 다시 지도부를 맡느냐는 반발이 시작됐습니다. 언론의 초점은 ‘원유철의 욕심’에 맞춰졌습니다. 결국, 원유철 원내대표는 차기 원내대표 선출과 동시에 자리에서 물러나겠다고 한 발 물러섰습니다. 

사단이 난 근본적 이유를 ‘원유철의 욕심’으로 진단하고 싶지 않습니다. 원유철 원내대표가 욕심이 있었는가는 사실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욕심이 있었던 아니던, 새누리당이 스스로 만든 당헌 당규만 제대로 지켰으면 이런 소모전을 펼칠 이유가 없었습니다. “민주주의를 잘 운영하면 이상적으로 되긴 어렵더라도, 그 결과는 상당히 좋은 방향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생각한다”는 최장집 교수의 주장처럼 말입니다.

한 당직자도 조심스레 이런 말을 하더군요. “총선 패배 이후에도 비대위를 구성해야 할 최고위가 선거 다음날 정치적으로 해산해버렸다. 지금 이순간도 새누리당 지도부는 당헌 당규를 위반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당헌 당규를 엄격하게 적용하면 ‘김무성 전 대표’가 아니라 ‘김무성 대표’가 맞다. 이렇게 당헌 당규가 무너져 버리니 당 기획조정국에서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국회를 출입하면서, 정확히는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을 출입하면서 ‘절차적 정의’라는 말을 강박적으로 사용하게 됐습니다. 스스로 중심을 잡기 위한 자기 최면으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년 5개월의 짧은 정치부 생활, 절차적 정의는 실제 정치 현상 앞에서 고지식한 소신임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지난해 국회법 개정안 파동,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사퇴, 그리고 최근의 공천 내홍까지, 지근거리에서 봐 온 새누리당의 모습은 절차 정의가 아닌 힘 센 자의 심기가 우선이었습니다. 그 흔한 의원 총회에서도, 안건을 표결에 부치는 건 ‘당을 분열시키는 짓’이라며 극도의 알레르기를 보여 왔습니다. 대의제로 뽑힌 의원들이 대의제를 거부하는 역설적인 현상이 민주주의 사회, 그것도 공당 안에서 문화로 정착됐습니다.

새누리당은 어찌됐든 대한민국 보수세력의 대푯값으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진부한 말이지만, 건강한 보수가 있어야 건강한 진보가 있습니다. 당의 생존보다 중요한 건 역사적 사명입니다. 완전히 동의하는 건 아닙니다만, 최장집 교수의 발언으로 갈음합니다.

“진보 세력이 변화를 추동한다면 저항이 클 수밖에 없을 거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가 진보 보다 강하다. 우리에게 익숙한 운동들이 다시 동원되고 격렬한 투쟁과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럼에도 그 효과는 대단히 미미할 수도 있다. 결국, 한국 사회가 실제로 변하려면 보수가 먼저 변해야 한다. 그게 효과적이고 비용이 적게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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