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취재 5일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래도 지진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특히 새벽 지진을 겪고 나면 다시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아침에 가장 먼저 할 일은 숙소를 잡는 겁니다. 구마모토에서 80km 떨어진 사가시 호텔에서 묵었는데, 왕복 7시간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구마모토 시내 호텔을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빈 방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본 취재진들과 재해 복구 인력들이 대거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호텔 내 식사나 세탁, 청소 등을 제대로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호텔 측이 스스로 손님을 줄이고 있던 겁니다. "이런 서비스를 손님들에게 제공할 수 없다"라고도 볼 수 있지만, 손님들의 악평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일본의 기업문화도 반영돼 있습니다. 욕을 얻어먹을 수 있으니 아예 손님을 받지 않는 것이죠.
호텔 지배인과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청소는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수건만 갈아달라." "정말 그래도 되냐?" 이렇게 해서 구마모토 시 외곽의 저가 호텔을 겨우 잡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포함해 하루 숙박비는 5,200엔입니다.
숙소 문제를 해결한 뒤 가고시마현 센다이 원전으로 향했습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운영되고 있는 원전입니다. 지진 단층대 끝자락에 붙어 있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마모토에서 4시간을 달려 도착했습니다. 원전 주변과 지역 주민들을 취재하고 난 뒤 다시 급하게 구마모토로 차를 몰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8시 뉴스 리포트를 맞추려면 오후 6시쯤에는 기사와 취재영상을 서울로 보내야 합니다. 결국 구마모토까지 도착하지 못 하고, 인근 야쓰시로시 외곽 주차장에서 기사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긴급 메시지는 일본 정부가 위험 지역 사람들에게만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도쿄나 홋가이도 주민들까지 경보를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강진이 온 직후 메시지가 도착하는데, 여진을 대비하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저는 스마트폰 기본 언어를 한글으로 설정해 한글로 도착)
<20일>
이 날은 교민 분들의 피해 상황을 취재하고 다녔습니다. 구마모토현 내 교민들은 1300-1500명 정도로 추정이 됩니다. 집이나 가게가 지진으로 무너진 분들도 적지 않다고 하더군요. 안타까운 사연들을 취재했지만, 주로 구마모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날에 비해 체력적으론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8시 뉴스 리포트, 다음날 아침 뉴스 리포트, 낮 취재에, 낮 프로그램 전화 연결까지 했습니다. 체력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편의점과 마트도 문을 열기 시작해서 새 양말과 내의도 샀습니다. 호텔에 돌아와 처음으로 목욕을 했습니다. 15분만에 끝냈습니다. 또, 지진이 날까 두려워서요, 알몸으로 대피하기는 싫었습니다.
피난소와 지진피해 가옥 등에서 빈집털이범들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도 이즈음에 전해졌습니다. "질서와 규범을 중시하는 일본에서?" 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요즘 일본 범죄뉴스를 보면 그 수준과 종류가 한국이나 중국 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21일>
아침부터 폭우가 내렸습니다. 구마모토 외곽 호텔에서 차를 달려 마시키마치 마을로 갔습니다. 14일 첫 강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곳입니다. 제가 15일 구마모토에 와서 처음으로 방문했었죠. 마시키마치는 16일 2차 강진까지 맞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폭우입니다. 너무나 잔인한 상황입니다. 우비를 입고, 마이크는 가급적 비에 젖지 않도록 옷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마을을 돌았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프면서 슬퍼지더군요. 이곳 주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자체에서 가설주택을 지어준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제 생활이 가능할까요? 15일 당시 만났던 주민 분들도 찾아봤습니다. 그렇게 이날 리포트를 만들었습니다. [클릭]
온몸이 젖으면서 손가락 지문이 쭈글쭈글해진 탓인지, 스마트폰의 지문 인식에서 계속 오류가 나더군요. 운동화를 신고 고인 구정물에도 많이 들어간 만큼 숙소에 돌아와서 운동화를 수돗물에 씻었습니다.
한국 방송 기사들 사이에 "언제 철수할 것인가?" 서로 문의를 하기 시작합니다. 추가 강진도 크게 줄었습니다. 신메이신 고속도로 공사다리 붕괴사고에 미쓰비시 자동차의 연비 조작 사건까지 터지면서 일본 방송들도 지진 뉴스 비중을 다소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출장취재팀까지 온 상태이기 때문에 우선 이 출장팀들을 서울로 철수시키고, 이어서 도쿄특파원들도 도쿄로 돌아가야 합니다. SBS는 결국 이날 서울팀과 도쿄팀 모두 같이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지막 취재는 토사붕괴 위험지로 주민 피난권고가 내려진 곳입니다. 고지대 주택가인데, 지진에 폭우가 이어지면서 지반이 내려앉을 우려가 높아진 겁니다. 찾아보니 꽤 괜찮은 단독주택 단지였습니다. 일본 직장인들의 경우 20,30대엔 월세 내면서 좁은 집에 살다가 40대쯤 주택대출을 받아 자신만의 단독 주택을 사는 것이 꿈입니다.
이 지역 취재를 마지막으로 밤 9시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정말 지진은 무섭습니다. 도쿄 사람들은 1년에 3, 4번 지진을 느낀다고 합니다. 저는 평생 느낄 지진을 이번에 다 경험한 것 같습니다. 남은 이재민들은 평생 지진의 공포 속에 살아야 합니다.
제가 떠나던 날 우리 정부가 지원한 10만 달러 규모의 물자가 구마모토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10만 달러라...한국의 관련 기사에는 "아베 총리 하는 짓을 보면 돈을 줄 필요도 없다"는 등의 비난 댓글이 많더군요.
물론 우리 국민 대부분은 재해 현장에서 고통받는 우리 이웃나라 국민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안타까워 할 정도로 성숙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수준을 생각할 때도 '굶주리는 사람에게 껌 하나 주는 정도'의 지원을 결정한 우리 정부의 판단에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3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 [월드리포트] 구마모토 지진 취재기 ① : 8일간 사진 일기로 보는 재해 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