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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구마모토 지진 취재기 ② : 재해 속 드러나는 일본인의 특징

[월드리포트] 구마모토 지진 취재기 ② : 재해 속 드러나는 일본인의 특징
15-18일까지의 1편에 이어 지진 취재기 2편입니다. 2편에선 취재 이야기와 함께, 제가 느낀 일본인들의 특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1편에 이어 19일부터 시작합니다.

<19일>

취재 5일째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래도 지진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특히 새벽 지진을 겪고 나면 다시 잠을 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고 일어나 아침에 가장 먼저 할 일은 숙소를 잡는 겁니다. 구마모토에서 80km 떨어진 사가시 호텔에서 묵었는데, 왕복 7시간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구마모토 시내 호텔을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빈 방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일본 취재진들과 재해 복구 인력들이 대거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유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호텔 내 식사나 세탁, 청소 등을 제대로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호텔 측이 스스로 손님을 줄이고 있던 겁니다. "이런 서비스를 손님들에게 제공할 수 없다"라고도 볼 수 있지만, 손님들의 악평을 굉장히 두려워하는 일본의 기업문화도 반영돼 있습니다. 욕을 얻어먹을 수 있으니 아예 손님을 받지 않는 것이죠.

호텔 지배인과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청소는 전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수건만 갈아달라." "정말 그래도 되냐?" 이렇게 해서 구마모토 시 외곽의 저가 호텔을 겨우 잡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포함해 하루 숙박비는 5,200엔입니다.

숙소 문제를 해결한 뒤 가고시마현 센다이 원전으로 향했습니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운영되고 있는 원전입니다. 지진 단층대 끝자락에 붙어 있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구마모토에서 4시간을 달려 도착했습니다. 원전 주변과 지역 주민들을 취재하고 난 뒤 다시 급하게 구마모토로 차를 몰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8시 뉴스 리포트를 맞추려면 오후 6시쯤에는 기사와 취재영상을 서울로 보내야 합니다. 결국 구마모토까지 도착하지 못 하고, 인근 야쓰시로시 외곽 주차장에서 기사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기사와 취재영상 등 무선인터넷 송출
작업하는 도중 바로 야쓰시로시를 진원지로 하는 진도 5의 강진이 강타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주변 사람들의 스마트폰이 일제히 "삐삐삐" 경보를 울리면서 긴급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차장 바닥이 흔들리고, 차량도 좌우도 흔들립니다.

긴급 메시지는 일본 정부가 위험 지역 사람들에게만 보내는 것 같았습니다. 도쿄나 홋가이도 주민들까지 경보를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강진이 온 직후 메시지가 도착하는데, 여진을 대비하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저는 스마트폰 기본 언어를 한글으로 설정해 한글로 도착) 
스마트폰에 날아온 긴급문자
 지진이 일어난 지 30분쯤 지나자 해가 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차량들이 쏟아져 들어오더니 주차장을 가득 채웁니다. 피난소를 가지 않고, 자신의 차량에서 지내는 이른바 '차량 난민'들입니다. 차안을 살펴보니 각 차량마다 가족 단위로 모포를 가득 싣고 있었습니다. 
차량 난민들이 모인 주차장
 개인생활을 중시하는 많은 일본인들은 집단적인 피난 생활을 굉장히 부담스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물이나 식량을 배급해주는 시간에는 피난소에 가고, 평소에는 그냥 가족들과 차에서 지내는 겁니다. 일부 피난소에서 아래와 같은 종이 박스 칸막이가 등장한 이유도 사생활에 대한 배려가 깔려 있습니다. 옆 사람과 눈을 마주칠 필요가 없죠.
지진 피난소에 등장한 박스 칸막이
이런 피난소 칸막이는 지난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당시에도 등장을 했습니다.(아래 사진 참고) 일본인들에게 사생활은 최악의 재해 환경 속에서도 지키고 싶은 가치인 겁니다. 많은 일본인들이 친구들을 자신의 집이나 방으로 초대하지 않은 것도 자신의 집을 사생활 보호 공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친구들의 집 초대도 부담스러워 합니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피난소
차량 난민이 생기는 이유는 물론 사생활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추가 강진이 올 수 있다는 불안감도 큽니다. 더 큰 강진이 발생하면 차량으로 신속히 지역을 탈출하겠다는 겁니다. "아예, 다른 도시로 이사하면 되지 않나?" 그건 쉽지 않습니다. 도쿄 등 대도시는 다르지만, 지방의 경우 아직도 지역사회의 공동체 의식이 강합니다. 낯선 도시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받을 심리적 압박도 피하고 싶어합니다. 전체 피난민 6만 명 가운데 약 1만 명 정도가 차량 난민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20일>

이 날은 교민 분들의 피해 상황을 취재하고 다녔습니다. 구마모토현 내 교민들은 1300-1500명 정도로 추정이 됩니다. 집이나 가게가 지진으로 무너진 분들도 적지 않다고 하더군요. 안타까운 사연들을 취재했지만, 주로 구마모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날에 비해 체력적으론 여유가 생겼습니다.

그동안 8시 뉴스 리포트, 다음날 아침 뉴스 리포트, 낮 취재에, 낮 프로그램 전화 연결까지 했습니다. 체력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편의점과 마트도 문을 열기 시작해서 새 양말과 내의도 샀습니다. 호텔에 돌아와 처음으로 목욕을 했습니다. 15분만에 끝냈습니다. 또, 지진이 날까 두려워서요, 알몸으로 대피하기는 싫었습니다.

피난소와 지진피해 가옥 등에서 빈집털이범들이 기승을 부린다는 소식도 이즈음에 전해졌습니다. "질서와 규범을 중시하는 일본에서?" 하지만, 사실이었습니다. 요즘 일본 범죄뉴스를 보면 그 수준과 종류가 한국이나 중국 등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진 피해지역에서 빈집털이 기승
일본 넷우익들은 "재해 지역에서 빈집털이? 이런 건 한국인들이 저지른 것이다!"라는 억측도 쏟아냈죠. 위 금고를 턴 범인은 아직 잡히지 않았지만, 23일 다른 범인은 한 명 체포됐습니다. 50대 일본인 회사원인데, 첫 강진 다음 날인 15일 자신의 집에서 140km 떨어진 마시키마치의 지진피해자 집에 들어가 영화 DVD, 테블릿PC, 식기 등 8,000엔 상당의 물건을 훔쳤다고 합니다.

<21일>

아침부터 폭우가 내렸습니다. 구마모토 외곽 호텔에서 차를 달려 마시키마치 마을로 갔습니다. 14일 첫 강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곳입니다. 제가 15일 구마모토에 와서 처음으로 방문했었죠. 마시키마치는 16일 2차 강진까지 맞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폭우입니다. 너무나 잔인한 상황입니다. 우비를 입고, 마이크는 가급적 비에 젖지 않도록 옷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마을을 돌았습니다.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프면서 슬퍼지더군요. 이곳 주민들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자체에서 가설주택을 지어준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제 생활이 가능할까요? 15일 당시 만났던 주민 분들도 찾아봤습니다. 그렇게 이날 리포트를 만들었습니다. [클릭] 

온몸이 젖으면서 손가락 지문이 쭈글쭈글해진 탓인지, 스마트폰의 지문 인식에서 계속 오류가 나더군요. 운동화를 신고 고인 구정물에도 많이 들어간 만큼 숙소에 돌아와서 운동화를 수돗물에 씻었습니다.
폭우 취재 도중 살펴본 손가락
폭우 취재로 젖은 신발과 양말
<22일>

한국 방송 기사들 사이에 "언제 철수할 것인가?" 서로 문의를 하기 시작합니다. 추가 강진도 크게 줄었습니다. 신메이신 고속도로 공사다리 붕괴사고에 미쓰비시 자동차의 연비 조작 사건까지 터지면서 일본 방송들도 지진 뉴스 비중을 다소 줄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서 출장취재팀까지 온 상태이기 때문에 우선 이 출장팀들을 서울로 철수시키고, 이어서 도쿄특파원들도 도쿄로 돌아가야 합니다. SBS는 결국 이날 서울팀과 도쿄팀 모두 같이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지막 취재는 토사붕괴 위험지로 주민 피난권고가 내려진 곳입니다. 고지대 주택가인데, 지진에 폭우가 이어지면서 지반이 내려앉을 우려가 높아진 겁니다. 찾아보니 꽤 괜찮은 단독주택 단지였습니다. 일본 직장인들의 경우 20,30대엔 월세 내면서 좁은 집에 살다가 40대쯤 주택대출을 받아 자신만의 단독 주택을 사는 것이 꿈입니다.
구마모토 시내 피난권고 주택가
아래 사진처럼 전망도 좋지만, 이 지역을 검색해보니 방 3개짜리가 우리돈 1억원 쯤으로 그리 비싸지는 않더군요. 지방도시 구마모토이고, 고지대라서 교통편이 불편한 것이 단점으로 작용한 듯합니다. 그래도 대부분 집들은 10년 내에 지어진 것으로 내진 설계 덕분인지 지진 피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집집마다 '피난권고' 용지가 붙어있습니다. 이제 주민들은 이사를 고민해야 합니다.
피난권고지 주택 전망
붕괴위험지 주택에 붙은 피난권고장

이 지역 취재를 마지막으로 밤 9시 도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정말 지진은 무섭습니다. 도쿄 사람들은 1년에 3, 4번 지진을 느낀다고 합니다. 저는 평생 느낄 지진을 이번에 다 경험한 것 같습니다. 남은 이재민들은 평생 지진의 공포 속에 살아야 합니다.

제가 떠나던 날 우리 정부가 지원한 10만 달러 규모의 물자가 구마모토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10만 달러라...한국의 관련 기사에는 "아베 총리 하는 짓을 보면 돈을 줄 필요도 없다"는 등의 비난 댓글이 많더군요.

물론 우리 국민 대부분은 재해 현장에서 고통받는 우리 이웃나라 국민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안타까워 할 정도로 성숙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들의 수준을 생각할 때도 '굶주리는 사람에게 껌 하나 주는 정도'의 지원을 결정한 우리 정부의 판단에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3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 [월드리포트] 구마모토 지진 취재기 ① : 8일간 사진 일기로 보는 재해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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