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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배트맨 대 슈퍼맨', 알고 보니 '페미니즘' 정치 영화?

10년쯤은 족히 지난 얘깁니다. 친구와 부산국제영화제에 갔습니다. 일본 영화를 본 뒤 마침 제작진과 관객이 만나는 행사가 열리길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영화는 눈 덮인 겨울 북해도를 배경으로 한 일종의 로드무비였습니다. 한 관객이 감독에게 물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의 차 색깔이 빨간 색인데, 빨간 색은 주인공의 이러저러한 심정을 상징하기 위한 설정이 아닙니까?”
 
그때 감독의 대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 차가… 빨간 색이었나요? 그랬군요. 몰랐네요.”

● 주제? "관객에게 물어 봐!"
 
문학이든 영화든 비평에도 흐름이 있습니다. 과거엔 작가의 ‘창작 의도’를 중시하는 경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현대로 올수록 독자나 관객의 ‘해석’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큽니다.
 
제작자에서 수용자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면 작품에 대한 해석은 훨씬 풍성해집니다. 더 이상 하나뿐인 정답은 없습니다. 같은 텍스트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수백, 수천 개의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예를 들면, 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하는 바로 그 시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국어시간마다 선생님들이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셨습니다. “이 시는 연애시가 아니라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시다.” 시험에 자주 나오는 문제 가운데 하나여서 정말 열심히 외웠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저 시가 굳이 연애시가 못될 것도 없어 보입니다. 내 앞에 선 존재에 대해 하고 많은 이름 가운데 하필이면 ‘꽃’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관계란 얼마나 로맨틱한가 말입니다. ‘화분’, ‘병 뚜껑’, ‘대걸레’, ‘휴대전화 요금 고지서’같은 다른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중에서 굳이 ‘꽃’이라니요!
 
● 영화 '배트맨 대 슈퍼맨',  '상남자'들의 맞대결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
취재차 한 전문가를 만나 ‘배트맨 대 슈퍼맨 : 저스티스의 시작’이라는 영화 얘기를 나눴습니다. 다양한 주제로 얘기를 나누던 중 이 분이 제시한 여러 해석 가운데 하나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소개할까 합니다.
 
영화는 슈퍼 히어로 계에서도 전설급인 배트맨과 슈퍼맨의 1대1 맞대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비 내리는 음산한 거리에서 펼쳐지는 두 영웅의 결투 장면은 압권입니다. 스크린 밖으로까지 뿜어져 나오는 이들의 ‘포스’는 말 그대로 ‘상남자’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는 이 영화의 전개와 두 영웅의 관계에 작용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두 영웅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슈퍼맨과 배트맨을 얘기할 때 가족에 주목하는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가족과 ‘뿌리’야말로 이들이 ‘슈퍼 히어로’라는 정체성을 얻게 한 매우 중요한 요소인 탓입니다.
 
슈퍼맨은 지구인들에겐 상상할 수도 없는 막강한 능력을 가졌습니다. 그 뒤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아들을 지구로 보낸 외계의 부모가 있었습니다. 배트맨이 악을 응징히가 위해 나선 건 어린 시절 경험 때문입니다. 배트맨은 어린 시절 자신의 눈앞에서 부모님이 범죄에 희생되는 걸 직접 목격했습니니다.
 
●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맨'에서 '우먼'으로
 
그 동안의 관객과 비평가들은 부모 가운데서도 주로 이들의 ‘아버지’에 주목 해 왔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틀이 워낙 강력한 탓입니다.
 
전문가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그 동안의 남자 주인공들의 세계는, 사랑하지만 사랑해서는 안 되는 어머니를 부정하고 아버지의 세계로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두 영웅의 관계를 규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로 아버지 대신 어머니를 내세웁니다.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만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영화를 본 이들마다 한 목소리로 지적하는 이 영화의 매력 가운데 하나가 원더우먼의 막강한 존재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더우먼이 처음 등장해 슈퍼맨, 배트맨과 삼각형을 이룬 샷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한 컷이었습니다. 긴장감 넘치는 음악에 맞춰 심장이 쿵쿵 함께 뛰면서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습니다. 
주목할 것은, 이 장면에서 세 영웅이 만든 삼각형의 꼭지점이 원더우먼이라는 사실입니다. 슈퍼맨과 배트맨은 적어도 이 샷에선 ‘배경’입니다. 구도뿐 아닙니다. 왼손엔 방패 오른 손엔 칼을 들고 예리한 눈으로 적을 노려보는 원더우먼의 ‘포스’는 배트맨과 슈퍼맨을 압도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전문가는 미국 관객 입장에선 매우 정치적인 해석까지도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지적했습니다. 영화가 개봉된 지금 미국에서는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선 후보 경선이 한창 진행중인 탓입니다. 슈퍼맨과 배트맨을 '배경'으로 만드는 여성의 힘과 매력을 보여주는 게 특정 후보에 대한 측면지원으로 해석될 수도 있을 거라는 얘기입니다.
 
DC의 ‘배트맨 대 슈퍼맨’에 이어 다음달 개봉할 마블의 ‘캡틴 아메리카 : 시빌 워’도 슈퍼 히어로들이 맞대결하는 내용입니다. 마블과 DC는 슈퍼 히어로 영화 계의 양대 산맥입니다. 두 라이벌이 동시에 슈퍼 히어로간 맞대결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들고 나온 건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닙니다. 그 배경에 미국 대선이라는 시기적인 특수성이 있다는 건 많은 전문가들의 동의하는 해석입니다.
 
물론, 아버지보다 어머니, 배트맨과 슈퍼맨보다 원더우먼에 주목하는 해석은 어디까지나 다양한 해석들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 정답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꽤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겠죠.
 
하지만, 어찌 보면 ‘가장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가장 전형적인 오락 영화’들조차 이렇게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참 재미있습니다. 문학이든 영화든, 텍스트를 읽는 또 다른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공감되는 해석이 있으면 재미있게 즐기면 되고, 아니면 그냥 “쳇, 꿈보다 해몽이네!” 하면 됩니다. 시험에 나오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 기사에서 소개한 해석은 노철환 박사(한국영화감독조합 책임연구원, 성균관대 겸임교수, 영화학 박사)의 해석입니다. 재미있게 들은 내용이라 공유하고 싶어서 요약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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