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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한구의 '해당 행위', 그리고 '세종시 수정안'

때에 따라 철학과 원칙이 바뀌는 정치인 골라내야

[취재파일] 이한구의 '해당 행위', 그리고 '세종시 수정안'
# 장면1.

2010년 6월, 여당의 전 대표 A는 정부와 청와대가 추진하던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했습니다. 세종시 수정안은 세종시를 행정중심 복합도시로 건설하려던 계획을, 교육과 과학 중심의 경제도시로 바꾼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정치인 A는 국회 본회의 반대토론에서 “신뢰가 깨지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뒤집기와 분열이 반복될 것이므로 이로 인한 국력 낭비와 비효일이 매우 크다. 수정안 찬성론자들이 우려하는 행정 비효율은 그에 비하면 훨씬 작다”고 말했습니다. 야당도 정치인 A와 함께 했습니다. 결국, 세종시 수정안은 재석 275명에 찬성 105명, 반대 164명, 기권 6명으로 국회 본회의에서 부결됐습니다.

# 장면2.

2015년 5월, 여당 원내대표 B는 정부와 청와대가 반대하던 국회법 개정안을 추진했습니다. 국회법 개정안은 정부가 만든 시행령이 본래 법률의 취지에 맞지 않으면, 국회가 수정과 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정치인 B는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나는 (정부와 청와대가) 어떤 부분이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건지 좀 이해할 수가 없다. 분명히 국회가 정한 법률의 취지와 내용에 어긋나는 경우만 국회가 수정과 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야당도 정치인 B와 함께 했습니다. 결국, 국회법 개정안은 재석 244명에 찬성 211명, 반대 11명, 기권 22명으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다음달,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흘러가는 모양새는 다르지 않습니다. 두 사안에서 모두 여당 실력자는 정부 청와대와 맞섰고, 야당과 함께 법안을 부결 혹은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A와 B의 결말은 달랐습니다. A는 이 파동을 계기로 여당의 미래 권력임을 재확인했고,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습니다. B는 쓴 맛을 봤습니다. 배신의 정치인으로 낙인찍혀 원내대표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A는 박근혜 대통령이고, B는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입니다.

# 장면3.

2016년 3월, 친박계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은 유승민 의원의 공천 여부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후보자 등록을 시작하기 전날까지도 공천을 하니 마니 줄다리기가 이어졌습니다. 이한구 위원장은 “스스로 결단하라”며 압박했습니다. 하지만 후보자 등록일 시작 한 시간 전 유승민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무소속 출마를 선언합니다. 사실상 공천에서 배제됐습니다.
다음 날, 이한구 위원장은 유 의원을 이렇게 작심 비판합니다. “국가 위기 해결을 방해하던 야당에는 박수를 받고, 집권 여당 의원은 침묵 시키는 행동을 하면서 어떻게 당의 정체성 위반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나. 정부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막아서는 법을 정부가 그토록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통과시켜 기어코 대통령 비토권을 발동하게 만든 것은 당의 정체성 위반이다.”

이한구 위원장이 말한 해당 행위의 개념을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정부의 뜻에 어긋나는 법을 추진하려는 행위, 그 법을 야당에게 박수 받으며 기어코 본회의에서 통과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이한구 위원장이 정말 그런 신념과 철학이 있었다면, 해당 행위의 방정식은 세종시 수정안에도 적용돼야 했습니다. 좀 더 강단이 있었다면, 당시 박근혜 전 대표가 해당 행위를 했다며 비난했어야 옳습니다. 하지만 이한구 위원장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야당과 함께 세종시 수정안에 반대표를 던진 164명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이한구 위원장이 단순히 자신의 철학과의 의리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난하고 싶진 않습니다. 철학은 바뀔 수 있습니다. 정치인은 이를 커밍아웃하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으면 됩니다. 문제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자신의 철학을 분재했던 모습입니다.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을 집행한 나치 친위대 중령 아이히만, 그는 재판정에서 명령대로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습니다. 그는 뿔 달린 악마가 아닌 왜소한 체격의 평범한 남자였습니다. 그가 그 지경이 된 건 사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악(惡)은 이렇게 평범했습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 독재에 협력한 고문 기술자들, 역사에 숱하게 등장하는 수많은 악역들은 실제로 사이코패스가 아니었습니다. 철학이 없었던 그들은 센 권력이 ‘옳다’고 규정한 명령을 의심 없이 행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인격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정치적 상황에 끼워 맞췄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홀로코스트, 매국, 독재…. 우리 시대 흑역사는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배반하며, 힘에 맞춰 정의를 가공했던 정치인들에게서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습니다. 정치가 철학과 신념을 장식품 취급했던 결과는 이렇게 참혹했습니다. 물론, 작금의 시대에 이런 극단적 상황이 재연될 거라 생각지는 않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믿습니다. 다만, 긴장의 끈을 놔선 안 됩니다. 끊임없이 견제하고 감시해야 하는 건 유권자의 의무입니다. 제가 국회를 출입하며 봐온 정치인들은 너무나 나약해서, 정치적 상황이 조금만 바뀌어도 중심을 잃고 자신의 철학을 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정치인도 사람이니 어쩔 수 없다며 동정해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동정을 기대했다면, 그들은 권력을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 선거는 정치인이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제대로 지켜냈는지 심판받는 자리입니다. 이번 선거, 꼼꼼히 살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자신 혹은 계파의 이익을 위해 원칙을 져버렸는지, 은근슬쩍 자신의 철학을 바꾸고 이를 합리화하며 센 권력에 기생해 온 건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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