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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문체부-대한체육회 엉터리 번역 "나 몰라라"

[취재파일] 문체부-대한체육회 엉터리 번역 "나 몰라라"
엉터리 영문 번역으로 물의를 일으킨 통합체육회의 정관이 틀린 것을 또 베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한국 스포츠를 이끌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와 대한체육회는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한심한 행태까지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습니다.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가 하나로 합쳐지는 통합체육회는 국내 법률에 따라 오는 27일까지 공식 출범해야 합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문체부는 번역 기관에 의뢰해 통합체육회 정관을 영문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대한체육회에 보내 빨리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발송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대한체육회 관계자에 따르면 영문 번역에 오류가 너무 많아 수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문체부의 성화가 워낙 강해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지난 2월18일 IOC에 보냈다고 합니다. 발송한 지 하루 뒤인 IOC는 "정관의 영어 번역본을 다시 신중히 체크해서 가능한 빨리 공식 최종본을 보내주기 바란다"는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럼 영어 번역이 도대체 어떠했기에 IOC는 제대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퇴짜를 놓았을까요? 그래서 제가 동시통역이 가능한 영어 전문가에게 무엇이 잘못됐는지 검토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며칠 만에 연락이 왔습니다.  “전문을 다 볼 것도 없이 처음 몇 페이지만 봤는데 한마디로 엉터리다”는 것이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통합체육회 정관 <제3조 목적 및 지위 4항>은 “체육회는 국민체육진흥법 제33조 제8항에 따라 국민체육진흥법에서 규정한 것 외에는 민법 중 사단법인에 관한 규정을 준용한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영문 번역본에는 “The KSOC shall comply with the civil laws and regulations on an incorporated body in accordance with Article 33(8) of the National Sports Promotion Act.”라고 돼 있습니다. 국문 정관의 ‘국민체육진흥법에서 규정한 것 외에는’ 부분이 영문 번역을 보면 ‘국민체육진흥법 규정에 따라’로 돼 있습니다. 완전히 틀린 번역인 것입니다. 
<제5조 4항>은 더욱 가관입니다. ‘체육인의 권익 증진 및 복지를 위한 사업’이 ‘Improving the privileges and well-being of athletes’로 번역돼 있습니다. ‘privileges’는 특권이란 뜻이지 권익이 아닙니다. 통합체육회 주요 사업 중의 하나가 ‘체육인의 특권 증진’이라고 돼 있으니 IOC가 보면 황당하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대한체육회 2009년 정관의 영문 번역본에도 똑같이 ‘Improving the privileges and well-being of athletes’로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7년 전에 잘못 번역한 것을 모르고 이번에 또 그대로 갖다 쓴 것입니다. 쉽게 말해 틀린 것을 베껴서 또 틀리게 된 것입니다.

<제5조 5항>은 ‘국가대표 은퇴 지원 사업’을 ‘Supporting retired national athletes retired’로 번역했습니다. 은퇴(retired)한 사람의 은퇴를 돕는다는 뜻인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문장입니다. 

통합체육회 정관은 일종의 법입니다. 격조 있고 명료한 문장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법에 맞는 영어로 번역을 해야 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27 페이지짜리 영문 번역본은 틀려도 너무 많이 틀렸습니다. 또  국문 정관에는 엄연히 있는 부분이 영문 번역본에는 아예 통째로 빠진 것도 허다합니다.

통합체육회 정관의 영문 번역 책임은 당연히 문체부와 대한체육회에 있습니다. 저는 통합체육회 정관의 영문 번역이 오류투성이어서 이를 주도한 문체부 실무자에게 “영문 번역이 제대로 됐는지 직접 확인해 보았느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영문 번역을 문체부 혼자서 한 게 아니다. 대한체육회와 다 상의해서 한 것이다. 전문 번역 기관에 의뢰했고 유명 국제변호사의 감수까지 받았다. 더 이상 뭘 어쩌란 말인가? 이 문제를 왜 실무자인 나에게 따지느냐?”며 거세게 항변했습니다.

통합체육회 출범을 놓고 문체부와 사사건건 갈등을 빚어온 대한체육회도 ‘무책임’이란 부분에서 문체부와 다를 게 없습니다. 어찌됐든 통합체육회 정관의 영문 번역본을 IOC에 발송한 것은 대한체육회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체육회의 관계자는 “번역에 문제가 많다는 것은 알았지만 문체부의 재촉이 워낙 무서워 어쩔 수 없이 IOC에 그냥 보냈다”고 말했습니다.

IOC는 대한민국 통합체육회 정관의 영어 번역본을 보고 승인 여부를 결정하지, 한글로 된 국문 정관을 보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번역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엉터리 번역으로 국가 망신을 당했는데도 문체부와 대한체육회의 누구 하나도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문체부는 이번 사태가 2월 23일 SBS 취재파일을 통해 드러났는데도 “번역에는 잘못이 없고, IOC가 번역을 다시 하라고 한 적도 없다”며 강변하기까지 했습니다.

IOC로부터 “번역을 다시 하라”는 요구를 받은 대한체육회는 부랴부랴 수정 작업에 나서 새로 고친 영문 번역본을 지난 2월 26일 IOC에 다시 발송했습니다. 며칠 만에 급히 수정한 영어 번역본이 얼마나 제대로 고쳐졌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저는 수정 번역본을 확인하기 위해 대한체육회에 번역문 공개를 요청했지만 “통합준비위원회 소관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체육단체 통합의 세 주체인 김종 문체부 2차관, 김정행 대한체육회장, 강영중 국민생활체육회장은 내일(3일) IOC 본부가 있는 스위스 로잔으로 출국합니다. 이들은 현지에서 IOC 관계자와 만나 법정 시한 내 통합체육회 출범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계획입니다. 국내 문제를 말끔하게 처리하지 못해 결국 외부의 간섭을 부른 것입니다.

이번 엉터리 영어 번역을 비롯해 체육 단체 통합의 여러 과정에서 문체부와 대한체육회, 양대 기관은 상호 갈등도 모자라 무능과 무책임까지 노출했습니다. 대한민국 스포츠를 이끌고 있는 두 기관이 거듭 태어나지 않는다면 통합체육회가 출범한다 해도 큰 의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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