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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프리미엄 브랜드의 핵심은 '가치 소비'"…산업디자이너 톨스텐 벨루어 인터뷰

[취재파일] "프리미엄 브랜드의 핵심은 '가치 소비'"…산업디자이너 톨스텐 벨루어 인터뷰
바야흐로 ‘프리미엄 브랜드(Premium Brand)’ 전성시대입니다. 벤츠와 BMW, 재규어 등 세계적 자동차 회사들이 앞다퉈 최고급 사양의 차들을 선보인 데 이어, 현대차그룹도 ‘제네시스’를 출시하며 ‘프리미엄 브랜드’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처럼 자동차 시장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한 ‘프리미엄 브랜드’는 최근엔 ‘가전 제품’으로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세계 가전 시장 규모는 350조 원으로 평가되는데, 이 중 최고급 제품 즉 ‘프리미엄 브랜드’ 시장 규모는 17조 5천억 원으로 전체 시장의 5%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하지만, 최근 4년 새 일반 가전제품 성장률의 3배에 달하는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빠르게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지난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서도 각 기업은 다양한 종류의 ‘프리미엄 브랜드’ 제품들을 선보였습니다. 국내 기업인 LG전자도 세계적 산업디자이너 ‘톨루엔 벨루어(Torsten Valeur)’가 진두지휘한 프리미엄 브랜드 ‘시그니처(SIGNITURE)’를 출시하며 전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뱅앤올룹슨(오디오), 에이수스(컴퓨터), 엘리카(주방용품), 숄테스(수제명품 빌트인 가전제품) 등 세계적 기업에서 맹활약해온 그는 이번 작업을 통해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요?
- LG전자 ‘고문 디자이너’로 참여했습니다.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됐나요?
= 몇 년 전, LG전자 디자인 부서 경영진이 먼저 우리 회사를 방문했습니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듯, 그들은 굉장히 성실하고, 열정적이며 또 다재다능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저를 대해주었고 서로 많은 조언도 나눴습니다. 사업으로 만났지만, 우리는 곧 친한 친구들이 되었죠. 그 뒤로 지금까지 우리 매우 성공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이번에 LG전자가 선보인 ‘시그니처(SIGNITURE)'란 브랜드는 기존 제품과 달리 최고급 제품을 추구하는 ‘프리미엄 브랜드’입니다. ‘명품 가전’은 당신 경력에서도 색다른 도전이었을 텐데, 부담은 없었나요?
= 그런 부담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SIGNATURE’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됐을 때, 전 매우 흥분됐습니다. 창의적이지만 본질에 충실한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다. 그건 제가 평소 가진 디자인 철학이기도 했죠. 기본적인 제품 디자인은 LG디자인센터가 맡았지만, 최종 제품이 나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디자인은 물론 기술, 마케팅 등 여러 분야 전문가가 치열하게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제 역할은 각각의 의견을 평가하고, 그 의견들을 한 방향으로 모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며 서로가 더 많은 의견을 개진하였고, 저도 때론 불손하게 보일 정도로 솔직하고 적극적으로 생각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기술을 담당하는 엔지니어들과도 디자인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를 거쳤습니다. 엔지니어가 추구하는 방향과 디자이너들이 생각하는 방향이 늘 같을 순 없었기 때문이죠. 결국, ‘SIGNATURE’제품은 저 혼자 만든 게 아니라 여러 전문가의 철학과 기술, 상상력이 조합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의 기본은 제품의 ‘본질’을 잘 나타내는 것”
 
- 이번 작업에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어떤 것이었나요?
= 저는 모든 제품은 ‘본질’이 드러나게 디자인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자가 제품을 사용할 때, ‘아, 이 제품을 만든 사람들이 소비자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제품을 만들었구나.’라고 이해하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품질이 뛰어나야 하는 건 물론이고 오래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 그런 디자인을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 세탁기, 냉장고, 공기청정기 제작에 참여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디자인을 담으려고 노력했나요?

= 세탁기는 수납공간을 넓히는 데 초점을 맞췄습니다. 냉장고 안에 투명한 작은 칸을 만들어 소비자들이 보관 중인 물건을 쉽게 볼 수 있게 하고, 가볍게 두 번 두드리면 불이 켜지면서 내부를 쉽게 볼 수 있게 했습니다. 공기청정기도 먼지 농도를 수치로 표시하고 4가지 색상으로 소비자들이 공기청정 상태를 쉽게 알 수 있게 했습니다. 세탁기를 디자인할 때는 좀 더 구체적인 한 가지 목표를 추가했습니다. 더 깔끔하고 순수한 형태의 디자인으로, 제품을 고급스럽고 또 직관적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쉽게 작동할 수 있으면서도 견고하게 작동하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디스플레이 산업에 강점이 있는 LG의 특징을 살려 곡선 모형의 유리를 담았는데 현대적인 느낌을 잘 살린 거 같아 만족스럽습니다. 
- 지난달 CES에서 직접 LG SIGNATURE를 발표했는데요, 현지에서의 반응은 어땠나요?
= 어렵게 만든 결과물을 보여 드릴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관객들은 실제 소비자들보단 언론인이나 엔지니어들이 많았지만, 저희 제품을 보고 놀라고 감탄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비자들이 저희 제품을 사용했을 때 사랑에 빠지고 오랜 시간 사용한 후에도 계속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언젠간 저희가 그런 제품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프리미엄 브랜드의 핵심은 ‘가치를 소비하는 것’”
 
- 생활가전뿐 아니라 자동차와 휴대전화, 화장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반 제품과 차별화된 프리미엄 브랜드 개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프리미엄 브랜드의 핵심은 소비자들이 ‘기능’을 소비하는 것’을 넘어 ‘가치’를 소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겁니다. 프리미엄 제품은 여러 측면에서 ‘최고의 것들’만 뽑아서 합친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프리미엄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단순히 필요한 기능만을 제공하는 데 그쳐선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같은 제품은 계속 출시되고 있는데 똑같은 제품에 둘러싸여 있는 소비자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인가 뛰어난 가치를 소비하고 있다’ 이런 고차원적인 감동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뿐 아니라, 회사의 발전을 위해서도 프리미엄 브랜드 개발은 필요합니다. 더 뛰어난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한계를 뛰어 넘고, 회사 내부적으로도 더 넓고 깊은 노하우를 더 쌓을 수 있습니다.
  
톨스텐 벨루어는 덴마크를 대표하는 산업디자이너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David Lewis Designers’란 디자인 회사를 경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2011년 회사 창립자 데이비드 루이스로부터 회사를 넘겨받은 그는 세계적 오디오 브랜드 ’뱅앤올룹슨‘의 디자이너로 활약하며 명성을 얻었습니다. 이후 독특하고 창의적이면서도 제품의 기능을 극대화한 디자인으로 유명세를 탔고 에이수스(컴퓨터), 엘리카(주방용품), 숄테스(수제명품 빌트인 가전제품) 등 세계적 기업들의 러브콜을 받는 산업디자이너로 발돋움했습니다.
-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오디오 브랜드 뱅앤올룹슨(Bang & Olufsen)의 수석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회사와 함께 일하게 됐나요?
= 저의 상관이자, 우리 회사를 처음 세운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가 뱅앤올룹슨(Bang & Olufsen)의 디자이너였습니다. 그와 함께 일하며 자연스레 저도 뱅앤올룹슨의 제품을 맡을 수 있게 됐습니다. 제가 그 회사에서 처음 맡은 제품은 ‘무선전화’였습니다. 당시 전 마치 영화배우가 자신의 역할에 빠지는 것처럼, 소비자들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품의 ‘본질’만 남기고, 나머진 모두 다 없애려고 오랜 시간 노력했습니다. 기존에 없던 완벽히 새로운 형태를 만들되 그 안에 완벽한 논리가 있길 바랐죠. 오랜 고민 끝에 탄생한 게 ‘Beocom 2’란 제품이었습니다. 그 전화기가 처음 출시됐을 때 기분을 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때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왜 가깝게 소통하며 함께 일해야 하는지 배울 수도 있었습니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충분히 협력했을 때 불가능해 보일 거 같은 일도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산업디자이너로 진로를 바꾼 계기가 있나요?
= 네, 정확히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덴마크 왕립건축대학(Royal Danish Academy of Fine Arts)에서 건축디자인을 전공했습니다. 대학 땐 도시계획이나 건물 공간배치에 대해 공부했죠. 하지만, 입학 이후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새로운 사물들을 보고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미학적인 관점에서 아름다운 제품을 만들고 싶은 욕구가 강해졌습니다. 직관적으로 일할 수 있는 부분에 매력을 느껴 최종적으로는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 여행 얘기가 나와서 물어보는데, 학교에 다니실 때 아시아 여행을 하신 걸로 들었습니다. 언제, 어떤 나라를 여행했나요?
= 저는 사실 오랫동안 아시아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아시아 여행지는 지난 1988년 여름, 중국 상하이였습니다. 당시 전 고등학생이었는데, 그곳에서 2개월 동안 교환학생으로 공부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엔 외국인들이 많지 않아 폐쇄적이었지만, 전 중국어와 요리나 서예, 그리고 우슈와 같은 다양한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이 또래에 다 그렇듯이 당시 학교에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는데, 덴마크로 돌아간 뒤에도 그녀를 보러 중국에 다시 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와 저는 지금까지 25년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한국 문화를 접한 경험도 있으신가요?
= 물론입니다. 저희 부부는 코펜하겐 ‘시네마 페스티벌’에 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김기덕 감독과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처음 접했습니다. 두 감독의 예술 작품을 보며,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순수하면서 단순하고, 섬세하면서 단단한 물건들, 특히 목재로 만들어 자연과 상호작용하는 한국 제품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테이프를 쓰지 않고도 정사각형의 종이로 선물을 포장하는 방법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돌부터 그림, 서예까지 그 안에서 새로운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정제된 언어의 표현에서도 이와 비슷한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디자인할 때, 이렇게 보이지 않는 걸 보거나 단어와 단어 사이를 읽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 한국 문화는 제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 제가 차를 좋아하는데, 요즘은 제주도산 차(茶)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차는 제가 디자인할 때 뭔가 창의성 있는 일하기 좋은 기분을 만들어 주곤 합니다.
 
- 끝으로, 본인이 추구하는 디자인 철학은 무엇인가요?
= 복잡한 기능을 많이 적용하기보다는 핵심 기능만 간결하게 추려 구현한 것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소재는 정직해야 합니다. 애써 꾸미려 하기보다 소재 본연의 내재적인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입니다. 가령, 소재가 나무라면 페인트 등을 칠해서 인위적으로 색을 입히기보다 나무 특유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게 정직한 디자인입니다. 이는 최근 한국에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북유럽 특유의 디자인 철학이기도 합니다.
 
- 한국 시청자들에게 인사 말씀 한마디 부탁합니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은 정말 아름다운 분들이라는 걸 꼭 잊지 말아 주세요. 
우리는 ‘지금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에 가장 민감한 세계적 디자이너가 반복해서 말한 건 역설적으로 ‘본질’, ‘본연의 모습’, ‘정직’ 이런 단어들이었습니다. 진정한 변화를 위해선 결코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강조하는 뜻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결국, 변화도 ‘본질을 지켜내기 위한 과정’일뿐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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