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경기단체 대의원총회는 1년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입니다. 굳이 비유하면 청와대 국무회의와 국회 본회의에 해당합니다. 전국 시도 연맹을 대표하는 대의원들이 모여 해당 경기단체의 새해 예산과 전년도 결산을 승인하는 것은 물론이고 때로는 쓴소리도 마다치 않는 자리입니다.
빙상연맹은 이날 대의원총회에 앞서 포상 수여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지난해 각 부문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사람들이 상을 받았습니다. 11살 ‘피겨 신동’ 유영을 키워낸 한성미 코치에게는 지도자상이 수여됐는데 제자인 유영 선수가 직접 꽃다발을 건네며 축하해줬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장면을 왜 연맹은 널리 알리지 않을까 하는 의아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포상 수여식이 끝나기 무섭게 빙상연맹은 방송 취재진에게 퇴장을 요구하며 대의원총회 공개를 거부했습니다. 저는 빙상연맹 고위관계자에게 “총회장에서 나갈 테니 대신 대의원총회에서 다룰 2015년 사업보고서와 수지결산서를 1부 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거부당했습니다. 빙상연맹은 관련 문서를 공개하지 않는 이유는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대한체육회는 물론 수많은 다른 경기단체에서는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대한체육회의 고위 관계자는 “상급기관인 체육회도 1년 예산과 결산을 모두 언론에 공개하는 데 체육회의 지원을 받는 일개 가맹단체가 특별한 이유 없이 이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제가 20년 넘게 스포츠 취재기자를 하면서 대의원총회를 위해 인쇄된 사업보고서를 공개하지 않는 경기 단체를 경험한 것은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처음이자 유일합니다.
더욱 이상한 것은 빙상연맹 일반 직원들도 2015년도 사업보고서와 수지결산서를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대의원총회에 고문 자격으로 참석한 빙상 원로들도 아무 자료 없이 빈손으로 대의원총회 진행 상황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관련 서류를 확보한 사람은 빙상연맹 수뇌부와 대의원 등 모두 20명 안팎이었습니다. 빙상연맹은 사업보고서와 수지결산서를 마치 남에게 절대 보여줘서는 안 될 국가 1급 기밀문서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빙상연맹은 도대체 그 안에 어떤 비밀이 들어 있기에 공개를 그토록 꺼리는 것일까요? 저는 국내 체육계의 한 인사를 통해 대한빙상경기연맹이 지난해 1월에 작성한 2015년도 사업계획서(안)와 수지예산서(안)를 확보했습니다. 확인 결과 연맹이 이번 대의원총회에서 대의원들에게만 제출한 사업보고서 내용과 총액에서 거의 똑같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SBS가 입수한 문서에 따르면 빙상연맹의 지난해 예산은 약 102억 원입니다. 이 가운데 대한체육회가 기금 명목으로 지원하는 금액은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42억6천9백82만1천 원입니다. 빙상연맹이 공익사업적립금 명목으로 역시 대한체육회로부터 받는 금액은 5억9천99만4천 원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합치면 약 48억6천만 원이 됩니다.
대한빙상연맹은 최근 ‘빙속 여제’ 이상화와 볼썽사나운 규정 논란을 벌였고, 자신들의 늑장 대응으로 장거리 스타 이승훈은 월드컵 1차 대회에서 기권해 충격적인 ‘0점’을 받았습니다. ( 1월26일 취재파일 ‘빙속 스타 이승훈, 연맹 잘못으로 0점’ 참조) 뼈를 깎는 반성을 해도 부족한 상황에서 대의원총회도 공개하지 않고 48억 원에 대한 지출 내역도 국민에게 내놓지 않고 있습니다.
대한민국과 우리 국민을 존중한다면 결코 할 수 없는 행태입니다. 최근 잇따라 터진 국가대표 선수 폭행과 미성년자 음주 파문, 그리고 미숙한 행정 등 수많은 잘못을 범했으면서도 스스로 무엇이 잘못됐는지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빙상연맹의 미래는 암담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