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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규범과 일탈의 공존…日, 요란한 '성인의 날'

[월드리포트] 규범과 일탈의 공존…日, 요란한 '성인의 날'
일본의 '성인의 날' 행사는 같은 지역의 동갑내기 청년들이 함께 모여 '어른'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자립니다. 일본은 1월 둘째 주 월요일을 아예 국가 공휴일인 '성인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날'에는 해마다 다소 요란하다 싶을 정도의 대형 행사와 소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으로, 일본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행사 중의 하나가 성인식이라고 생각됩니다.

올해는 121만 명이 이른바 '新성인'이 됐습니다. 각 지역에서 이색적인 행사가 이어졌는데, 오사카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높은 60층 건물 '아베노하루카스'를 걸어서 오르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60층, 1637개 계단을 지역 사회의 남녀 '新성인' 108명이 함께 도전했습니다. 각 방송사가 이 과정을 취재해 일본 전역에 전했는데,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에서 "어른이 되는 길은 역시 힘드네요"라며 인터뷰하는 젊은이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코하마에서는 무려 2만5천 명의 20살 남녀가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올해 일본 각지에서 열린 성인식 행사 중에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대개 20살 청년들은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를 싫어하기 마련이죠. 억지로 불러 모으기란 불가능할 겁니다. 청년들 스스로 '20살 어른이 되는 날'을 기념하고 싶은 자발성이 있다는 증거겠죠. 그 묘한 자발성에 대한 의문이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사카 60층 계단 오르기 성인식(왼쪽) 2만5천 명이 모인 요코하마 성인식(오른쪽)
일본에서는 '성인식을 치르다가 기둥뿌리 뽑힌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비용도 만만치 않습니다. 여성들이 입는 후리소데라는 전통의상은 몇만 엔에서 몇백만 엔까지 가격이 천차만별입니다.

대여하더라도 5~6만엔 우리돈으로 50만 원 정도는 듭니다. 여기에다 머리해야죠, 화장해야죠. 성년이 되는 자녀를 위해 부모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 '성인식 준비'인 셈이라, 아낌없이 쓰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따로 적금을 드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남성의 경우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뿐 꽤 많은 비용이 듭니다. 하카마라는 전통 의상을 구입하든 대여하든 몇 만엔은 기본입니다. 특히 평생의 한번 뿐인 성인식에 최대한 튀고 싶다는 마음이 발동하면, 돈도 돈이지만 시간과 정성이 무한정 필요합니다.

일본 방송에 소개된 특이한 청년들을 보노라면, 개성있는 헤어스타일을 연출하기 위해 정성을 쏟는 건 오히려 남성 쪽이 더한 듯합니다. 그렇다고 아래 사진에 나오는 겉모습들만 보고 이 청년들을 판단하면 곤란합니다. 평상시에는 그야말로 멀쩡한(?) 청년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본 청년들에게 성인식은 일종의 축제인 셈입니다.
튀고 싶은 일본 청년들…기괴한 헤어스타일로 성인식에 참석한 일본의 新성인들
이러다니보니 흥분이 지나쳤는지, 크고작은 소동이 말 그대로 연례행사처럼 반복됩니다. 앞서 일본 최대 규모 성인식 행사인 요코하마의 경우, 몇몇 '新성인'들이 단상 위로 뛰어올라와 행사 진행이 중단되기도 했습니다. 행사 관리 요원들과 뒤엉켜 밀고 당기는 보기흉한 모습이 일본 방송에 소개됐습니다.

요코하마의 소동은 사실 애들 장난입니다. 성인식 소동으로 악명높은 곳은 큐슈와 오키나와입니다. 무리를 지어 난동을 부리거나, 차량을 개조해 도로를 폭주하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하는 일이 잦은데 올해도 두 명의 '新성인'이 수갑이 채워진 채 경찰에 끌려갔습니다.

일장기를 들고 행사장 무대에 뛰어 올라오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왠지 '극우 감성(?)'이 묻어나는 모습이죠. 매년 벌어지는 모습이라서 그런지 일본 언론들도 크게 나무라기보다 그냥 이런 일이 있었다는 식입니다.
규범과 일탈의 공존…큐슈의 다소 살벌한 성인식(왼쪽)과 경찰과 충돌한 오키나와 성인식 (오른쪽)
사실 '성인의 날'은 관혼상제(冠婚喪祭)의 관(冠)에 해당하는 것으로 유교문화권이 공유하는 의식이죠. 일본만 특이할 게 없는 행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만 유독 거창한 '성인의 날'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0살 전후에 군대를 가야하는 의무가 없다면, 우리 나라에서도 이만큼 요란한 성인식 전통이 이어졌을까요?)

물론 과거에도 성인의 날 의식이 있었지만, 일본에서 지금과 같은 국가적 규모의 성인의 날 행사가 정착된 것은 1946년 사이타마현의 '청년제' 때문입니다. 패전 일본의 당대 최고 과제는 '미래'를 만드는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무기력과 허탈감에 빠진 청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축제'가 필요했겠죠. '성인에 걸맞는 책임감을 가지고, 자기 삶에 충실하라'는 패전 일본의 국가적 의지가 표현된 셈입니다.

사이타마에서 시작된 '청년제'는 일본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습니다. 결국 일본은 1948년 성인의 날을 국가 지정 휴일로 제정했고, 2000년부터 1월 둘째 주 월요일로 고쳐서 대대적인 국가 행사로 치르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의 성인의 날 행사에는, 분명 '절도와 일체감'이라는 일본의 긍정적인 면이 담겨 있습니다. 와(和)를 중시하고, '이치닌마에(一人前)'라고 해서 제몫을 다하는 것을 중시하는 일본의 전통과 성실함을 강화하는 행사입니다.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까지도, 지역사회에서 열리는 성인의 날 행사에 참가하는 것을 일종의 의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돕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특히 1946년 패전 이후 성인의 날 유래를 살펴보다보면, 일본 특유의 국가동원체제를 상징한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습니다. 개인이 감히 'NO'라고 할 수 없는 '집단 의식(意識)을 강화하는 집단의식(儀式)'이라는 생각입니다. 각 개인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이전에, 구석구석 강제돼 있는 '일본의 규율과 규범'을 상징하는 현상 중의 하나라고 할까요.

규범과 절도가 느껴지는 '新성인'들의 모습과, 뚜렷한 목적의식을 찾아보기 어려운 기괴한 '일탈과 소동-어쩌면 저항일지도-'이 공존하는 이유도 그 때문은 아닐지…

<P.S.>
6년전 연수시절, 둘째를 일본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입학식날 학생들 책상 위에 놓인 똑같은 준비물, 똑같은 가방(란도세르)을 메고 등교하는 아이들. 외국인 자녀들은 굳이 란도세르를 메지 않아도 됐지만, 한 달만에 둘째가 란도세르를 사달라고 하더군요. 혼자 따로 노는 이질감이 불편했던 듯...

저항할 수 없는 규범의 내재화, 강요아닌 강요. 벗어나면 큰일 날 것 같은 불안감과 막연한 저항감. 일본의 '성인의 날' 행사를 지켜보면서 6년 전 그 때의 묘한 감정이 불현듯 다시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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