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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9대 '식물 국회', 진화인가? 퇴행인가?

'국회선진화법'의 역설

[취재파일] 19대 '식물 국회', 진화인가? 퇴행인가?
● '식물 국회' 이전 국회의 모습은?

19대 국회에 대해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36.8%로 역대 최저치인 법안 처리율과 여야간 지지부진한 협상이 근거입니다. 한마디로 '식물 국회'라는 겁니다. 그런데 '식물 국회' 이전의 국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직전 18대 국회(2008~2012년)의 상징처럼 돼버린 동영상 2편을 먼저 보시죠.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놓고 벌어진 '폭력 국회'의 단면입니다. 해머와 소화기, 최루탄이 등장했고, 여야 의원은 물론 보좌관과 당직자들까지 총동원돼 그야말로 사생결단의 혈투를 벌였습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뒤엉키다보니 부상자가 속출했고 119 구급차는 국회 주변에 상시 대기했습니다. 피아(彼我) 구분이 잘 안되는 상황이라 취재기자들은 출입증을 목에 꼭 걸고 다녔습니다. 여차하면 출입증으로 적군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법안이 최종 처리되는 본회의장 내 싸움은 더 어마어마했습니다. 2009년7월22일 미디어법 통과 당시 국회 본회의장 모습입니다. 
 

제가 직접 했던 리포트인데요, 보시는 것처럼 낮뜨거운 난투극이었습니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본회의장을 기습 점거했고 이를 뚫으려는 민주당과 육탄전이 벌어졌습니다.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도 3군데나 됐습니다. 질서유지권이 발동되면서 국회 본청사 입구에는 폴리스라인이 쳐졌습니다. 폴리스라인 다음 저지선은 본회의장 입구였습니다. 필사적으로 들어가려는 민주당측과 이를 막으려는 한나라당측 사이에 또 한바탕 유혈극이 벌어졌습니다. 의원들만 들어갈 수 있는 본회의장 안으로 길이 열리면 최종 '백병전(白兵戰)'은 여야 의원들의 몫이었습니다. 의결을 막으려는 야당 의원들은 의장석으로 몸을 날렸고 여성 의원들도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폭력 국회'는 18대 국회 만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17대 국회(2004~2008년) 초반, 사학법을 둘러싼 활극을 보시죠.
 

● '폭력 국회'의 도화선, 직권상정

보신 것처럼 정권이 바뀌고 여야가 바뀌었지만 '폭력 국회'의 면면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뭘까요? 바로 '직권상정' 때문이었습니다. 2012년 이전 국회법은 국회의장에게 직권상정(법 조문상으로는 '심사기일 지정'입니다) 권한을 사실상 '무한대'로 부여했었습니다. 상임위원회에서 심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법안도 국회의장이 여야 '협의'만 거치면(거친 것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본회의로 끌어와 처리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아래 표 참조)

이러다보니 다수당은 여야 합의가 안되는 쟁점 법안을 친정 식구인 국회의장을 설득해 직권상정으로 처리하려는 유혹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이에 소수당은 회의장 점거 등 실력 행사로 직권상정을 원천 봉쇄하려 했습니다. 힘 대 힘으로 맞붙으니 폭력이 뒤따르는 건 당연했습니다. 다수당은 질서유지권을 내세워 국회 경위와 경찰력을 동원했고, 화력이 달리는 소수당은 국회의원 보좌진에 당직자까지 국회 안으로 끌여들였습니다. 야당 의원들은 국회의장의 본회의 사회를 막고자 의장 공관을 꽁꽁 에워싸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의장에게서 사회권을 넘겨받은 국회부의장이 어느순간 본회의장에 나타나 방망이를 두들기는 웃지못할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연례 행사처럼 폭력이 되풀이되다보니 국회를 해산하라는 국민의 질타가 쏟아졌고 이를 견디다 못한 정치권은 18대 국회가 끝나는 2012년5월, 여야 합의로 국회법을 고칩니다.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의 시작이고, '폭력 국회'의 막이 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 '협의'에서 '합의'로…1글자의 위력

'국회선진화법'의 핵심은 국회의장 직권상정의 요건을 '협의'에서 '합의'로 1글자 바꾼 겁니다. 표를 보면 국회의장이 20석 이상을 가진 교섭단체의 대표들과 협의한 뒤 직권상정할 수 있다는 문구가 합의한 경우 등에만 할 수 있는 것으로 고쳐졌습니다.  
 
국회법 85조(2012.5.25 개정) 국회법 85조(2005.7.28 개정)
제85조(심사기간) ① 의장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위원회에 회부하는 안건 또는 회부된 안건에 대하여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제1호 또는 제2호에 해당하는 때에는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협의하여 해당 호와 관련된 안건에 대하여만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1. 천재지변의 경우
2.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의 경우
3. 의장이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합의하는 경우
제85조 (심사기간) ① 의장은 위원회에 회부하는 안건 또는 회부된 안건에 대하여 심사기간을 지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의장은 각 교섭단체대표의원과 협의하여야 한다.

합의로 1글자를 고친 결과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습니다. 야당은 굳이 실력 행사를 할 필요없이 상임위에서 법안처리에 반대하는 것으로 본회의 상정을 막을 수 있게 됐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올해 연말까지도 여야가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경제·노동 관련 법안 등 쟁점 법안 처리입니다. 여당이 발을 동동 굴러도, 대통령이 총선 심판론, 역사 심판론까지 언급하며 압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국회의장은 여야 합의가 없는 한 직권상정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고 해석했습니다. 18대 같으면 진작에 벌어졌을 본회의장의 난투극은 먼 과거의 추억이 됐습니다.

● '선진화법'의 역설…독이 든 성배(聖盃)

여야 합의로 만든 국회선진화법은 이렇게 국회에서 폭력과 법안 날치기를 밀어냈습니다. 상임위원회 회의장에서 고성과 욕설, 폭언은 간간이 들리지만 물리력 행사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습니다. 하지만 사라진게 또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상임위를 중심으로 여야 의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입니다. 여야가 이견이 있는 법안들은 꺼내지 않고 묵혀놓은 채 지도부의 합의만 기다리는 '식물 국회'의 싹이 곳곳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지난 9일 한중 FTA처리 당시 합의처리된 법안 가운데는 충분한 심의없이 본회의에 상정된 것들이 상당수였다고 합니다. 여야가 서로 주판알을 튕기며 주고받기에만 골몰하다보니 발생한 폐단입니다. 

법안을 막아서는 야당의 아킬레스건도 드러났습니다. 국회선진화법에 따라 새해 예산안이 12월1일이면 자동적으로 국회 본회의에 올라가게끔 돼 버렸습니다. 이는 소수당이 반대해도 다수당의 의결로 예산안이 정부안대로 통과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야당 의원으로서는 자칫 자신의 지역구 예산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게 된거죠. 그러다보니 기세등등하던 야당도 예산안 처리 즈음이면 여당에 속절없이 법안을 양보하며 약한 모습을 보일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된 겁니다. 법과 제도를 만드는 건 국회 본연의 일이지만, 바뀐 법과 제도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하는 것도 국회입니다. 국회선진화법의 역설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또다른 고민을 시작해야할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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