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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부모 잘 만나 30대에 임원?…검증 안 된 '금수저'냐, '책임경영' 적임자냐

금수저 논란 없앨 경영능력 검증 필요

[취재파일] 부모 잘 만나 30대에 임원?…검증 안 된 '금수저'냐, '책임경영' 적임자냐
올해 대표적인 흥행 영화인 '베테랑'이 관객들에게 더 카타르시스(?)를 안긴 이유는 뿌리 깊이 박혀있는 재벌가 자제들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 정서 때문이라는 영화평론가의 분석을 듣고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벌들의 과도한 특권의식과 이른바 '갑질'을 다룬 영화 줄거리가 완전한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개연성이 충분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함께 분노하고 또 결말에 더 큰 통쾌함을 느꼈다는 것이죠.

사실 모든 재벌가 자제들이 영화 속 재벌 3세와 같은 이른바 '망나니'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국민들 사이에는 여전히 재벌가 3~4세들은 별 하는 일 없이 그저 좋은 집안에 태어나 유독 운이 좋은 '금수저'일 뿐이라는 인식이 팽배한 것이 사실입니다.

1세대처럼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사업을 일궈 한국 경제 발전에 기여했거나, 2세대처럼 아버지가 창업한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한 단계 더 키워냈다거나 하는 눈에 보이는 실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반인들은 가까스로 취업할 나이에 벌써 임원급이 돼 경영 전면에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태생적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너무 이른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올해 연말 재계 인사의 화두 중 하나는 바로 재계 3-4세들이 대거 전면에 나선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김승연 한화 회장의 장남 김동관 상무(32)는 올 1월 상무로 승진한 후 12월에 전무로 다시 승진했습니다.

허창수 GS 그룹 장남인 허윤홍 GS건설 실장은 전무로 승진했고, 4촌인 허서홍(38) GS 에너지부장도 상무 명단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장남 정기선(33) 현대중공업 상무도 1년 만에 전무로 승진해 현대중공업 사상 최연소 전무가 됐고, 코오롱 이웅열 회장의 장남인 이규호 코오롱 인더스트리 부장은 30대 초반의 나이로 상무보로 승진했습니다.

두산 박용만 회장의 장남인 박서원 오리콤 부사장은 두산이 올해 운영권을 따낸 면세점 유통사업부문의 전무로 발령됐고, 허영인 SPC그룹 회장의 장남 허진수(38) SPC글로벌전략경영실장은 부사장으로 승진했습니다.

박문덕 하이트진로 회장의 장남 박태영(39) 경영전략본부장은 역시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올라섰습니다.

기업들은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인사 보도자료에서 이들이 착실히 경영수업을 받았고, 승진할만한 성과가 있었다고 나름대로 근거를 담고 있습니다.

기업분석업체인 CEO스코어가 대주주 일가가 있는 30대 그룹 총수 직계 3~4세의 임원 승진 기간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평균 28세에 입사해 3.5년만인 31.5세에 임원에 오르는 것으로 분석됐습니다.

대졸 신입사원들의 대리 승진 기간보다도 짧은 셈입니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전국 219개 기업을 대상으로 '2014년 승진·승급 관리 실태'를 조사한 결과 대기업 신입사원의 임원 승진율은 0.47%에 그쳤습니다.

1,000명이 입사하면 4.7명만 임원이 된다는 의미인데, 그래서 임원 승진까지 걸리는 기간은 평균 22년 1개월입니다.  첫 임원이 되는 나이가 평균 51세가 넘는 것을 감안하면 재벌가 자제들은 엄청난 초고속 승진으로 전형적인 승계 코스를 밟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경기도 좋지 않고, 일자리 사정은 갈수록 팍팍해지는 마당에 국민들에게는 자연히 상대적 박탈감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올해 유독 3·4세가 경영 전면에 대거 등장한 것에 대해 2세에서 3세로의 ‘세대교체’를 이유로 드는 분석이 많습니다. 지난해 한진그룹 3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 회항’ 사건으로 재벌가 자제들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높아지면서 3·4세의 승진을 다소 보류했었는데, 그 부분이 올해 한꺼번에 나온 측면도 있습니다.
 
물론 재벌을 중심으로 오너의 강한 리더십 하에 산업을 단기간에 육성시켜온 한국 경제의 특성을 무시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 지배구조는 오너 일가가 회사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동시에 갖는 것으로 나타나죠. 자녀들이 지분과 경영권을 같이 물려받아 오너십을 행사하고, 전문경영인은 독립적인 CEO라기보다는 오너에게 고용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오너십에 근간한 '책임경영' '과감한 투자' '일관된 리더십' 은 과거 우리나라 재벌의 전형적인 '돌격 앞으로!'식 경쟁력으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기업들도 이번 3-4세의 대거 승진에 대해서 바로 지금이 이런 재벌의 경쟁력을 극대화해야 할 어려운 시기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대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 저성장과 중국 경제 둔화 등 기업을 둘러싼 경영 환경은 최근 몇 년간 계속 악화해왔습니다. 올해 제조업 실적이 부진해 수출이 우리나라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정도로 마이너스로 돌아섰습니다. 우리 경제를 이끌어왔던 것이 수출인데, 올해는 수출이 오히려 경제성장률을 깎아 먹었다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감한 투자와 미래 먹거리 창출을 위해서는 긴 안목을 가진 오너십과 책임 경영이 필수적이라는 주장입니다.

전문경영인들은 단기적인 성과를 평가받고 다시 계약되는 형태이기 때문에 몇십 년 후의 앞날을 내다본 투자 결정을 쉽게 할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LG와 한화, 두산 등 대기업들이 이번에 3-4세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들에게 주로 기업들의 미래 먹거리 부문을 맡긴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우려되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우리 경제에 미친 재벌의 공은 공대로 인정하되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가 가져온 부작용도 묵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오너경영은 견제 장치가 미흡하게 될 우려가 큽니다. 한자릿수의 적은 지분으로 재벌들이 기업 전체를 순환해 지배하는 구조를 가진 경우가 상당히 많은 상황에서 주주나 사외이사들이 적절한 견제역할을 할 수 있어야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은 이와 거리가 멉니다.

주주총회는 형식에 불과하고, 오너가 임명한 사외이사는 '거수기' 신세로 전락한 지 오랩니다. 견제가 제대로 되지 않고, 직언이 통하지 않는 오너 경영은 잘못된 경영상의 결정이 ‘오너의 말씀’이라는 이유로 반대 의견 없이 속전속결로 추진되는, 세습의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날 개연성이 높습니다.

결국,기업에 활력 있는 '오너십'을 불어넣느냐 아니면 골치 아픈 '오너리스크'가 되느냐는 아주 작은 차이로 갈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오너 3-4세의 전면적인 세습 경영 시작에 대해 우려하는 의견이 많은 편인데, 재벌 주도로 성장해온 우리 경제의 특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한국 재벌사 연구'를 펴낸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한민국 경제를 지탱하는 재벌에서 능력은 없는데 보유 주식이나 후계자라는 이유로 사내 중요 직책을 맡고 권한을 행사한다면 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런 검증절차 없이 국가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세습경영인에 맡겨도 되는가?"라고 말했습니다.

반면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부모를 선택하고 태어난 사람은 없다. 동일 선상에서의 출발은 없으며, 현실의 문제로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재벌 3, 4세들도 결국 철저한 시장 경제 아래 경영을 하고 냉정한 평가를 받기 때문에 시장에 맡겨두면 된다.

이들이 경영하는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법에 따라 제재도 받는다. 금수저도 결국 잘해야 오래 살아남는다”고 말해 시장에서의 평가가 재벌가 자제들에게 견제역할을 할 것이라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결국은 이번에 대거 승진한 재벌 3·4세가 앞으로 어떤 실적을 보여줄지에 달린 것 같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되는 일반 국민들의 박탈감을 키울 스캔들이 아닌, 기업의 미래 먹거리를 발굴하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면 그동안 비상시를 대비해 사내에 쌓아뒀다는 유보금을 과감히 투자하고, 일자리를 만드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실적으로 말해야 금수저 논란은 잦아들 것입니다. 동시에 전후 빈곤에서 대한민국을 일으킨 재벌 1,2세대 시대가 이제 막을 내린 만큼 사회적으로도 기업 지배구조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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