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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법원 판결문이 위안이 되는 시대

[칼럼] 법원 판결문이 위안이 되는 시대
법원 판결문을 읽으면서 위안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상식적인 판단을 정치한 법리로 포장한 판결문을 볼 때면 아직은 우리사회가 믿을 구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2차 민중 총궐기 집회 허가와 관련된 어제 서울 행정법원 행정 6부(재판장 김정숙)의 판단을 보면서도 저는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행정법원 결정문은 다섯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우리 사회의 격렬한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로운 판결처럼 보였습니다.

이미 보도가 되었지만 결정문 내용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법원은 1차 집회 주최자들이 2차 집회 신청을 한 사람들과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민주노총이 이 사건 집회의 주된 세력이라고 해도 그런 사정만으로 2차 집회가 집단적인 폭행, 협박, 손괴, 방화가 명백한 집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라면 앞으로 민주노총이 주최하거나 참석하는 모든 집회는 허가할 수 없게 된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습니다. 재판부는 신청인이 5일 집회를 평화적으로 진행하겠다고 수 차례에 걸쳐 밝혔고 1차 민중 총궐기 집회 이후에 있었던 지난달 28일 집회가 평화롭게 진행된 점을 감안하면 5일 2차 집회가 공공의 안녕 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법리라는 것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입니다. 재판부는 집회를 허가하겠다는 판단을 먼저 한 뒤에 그에 맞는 법리를 구성했을 겁니다. 만약 판사들이 집회를 허가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면 허가할 수 없는 논리를 찾아냈을 겁니다. 집회를 불허 할 수 있는 논리를 찾자면 백 가지라도 찾을 수 있었을 테니까요.

재판부가 현명한 것은 집회를 허가하되 그에 대한 책임을 민주노총을 비롯한 집회 주도자들에게 넘긴 점입니다.

"수 차례에 걸쳐 평화 집회를 공언했으니 믿어보겠다, 그러나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당신들이 책임져라."

행정법원 결정문을 한 줄로 줄이자면 이런 것입니다.

법원의 결정으로 5일 집회는 가능해졌고, 이제 공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집회 주최자에게 넘어갔습니다. 누누이 다짐하고 약속하고 공언한 것처럼 2차 민중총궐기 집회는 평화로운 집회, 목소리 큰 한 두 사람, 한 두 단체가 아닌 광장에 모인 모든 단체, 모든 사람들이 고루 자기들의 의견을 밝힐 수 있는 자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마이크를 독차지하고 절대 다수는 구경꾼의 자리에 머무르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지난 1차 집회에서 가장 비난 받아야 할 부분은 일부 시위대의 행동 때문에 10만명이 넘었다는 절대다수 사람들이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완전히 묻혔다는 점이었습니다.

'사법부가 정부의 무리한 강경 공안몰이에 제동을 걸었다'는 해석은 제가 보기엔 단견입니다. '법원이 우리 손을 들어줬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판이란 이야깁니다. 사법부는 집회 주도자들의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니라 어깨에 무거운 짐을 안겼다고 봐야합니다.

여기에서 경찰의 자세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법원 결정 나온 뒤에 경찰은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유감이랄지 아쉽다랄지 하는 토를 달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원천봉쇄에 따른 여론의 비난과 집회 당일 충돌 가능성 때문에 부담이 적지 않았던 경찰도 내심으로는 법원의 결정이 반가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을 시위대에 넘긴 홀가분함도 느껴집니다.

그런데 왜 경찰은 법원과 같은 생각을 먼저 하지 못했을까요? 그리 어려운 아이디어도 아닌데 말이지요. 경찰이 그런 생각을 못했다기 보다는 그런 생각을 실천으로 옮길 용기, 아니 힘이라고 표현하는게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것이 부족했기 때문 아닐까요? 경찰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도 지는 조직이라고 믿기는 어려운 게 현실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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