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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서울역 고가 공원화와 '치킨게임'

[취재파일] 서울역 고가 공원화와 '치킨게임'
두 상대방이 차를 몰고 서로를 향해 달리는 것을 치킨게임이라고 부릅니다. 겁을 먹고 먼저 운전대를 꺾는 사람이 치킨, 즉 패배자가 되는 게임입니다. 영화 속에서 가끔 이런 장면을 보는데,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치킨 게임에선 어떤 사람이 이기는 걸까?'라는 의문이었습니다.

담력이 뛰어난 사람? 상황 판단을 잘하는 사람? 아니면 이것저것 생각없이 막나가는 사람? 이런 궁금중에 대해 게임 이론가들은 절대로 운전대를 꺾지 않겠다는 의지를 상대방에게 얼마만큼 잘 각인시킬 수 있느냐가 게임의 승패를 가른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치킨 게임을 게임의 제왕, 백미라고도 한다지만, 영화 속이라면 몰라도, 실제 자동차를 맞대고 벌이는 경우는 아직 구경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냉혹한 승부의 세계인 현실에선 무형의 이런 치킨게임은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일임은 분명합니다.

서울역고가 공원화 사업이 출발선에 서기도 전에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의 핵심 공약 사업인데 말입니다. 박 시장의 구상인 7017 프로젝트는 서울역고가에 자동차를 막고 그걸 공원으로 만드는 것에 그치는 건 아닙니다. 서울역고가 정비를 통해 낙후된 서울역 일대의 발전을 모색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서울역 고가를 중심으로 17개 보행로를 연결해 사람들의 발길을 늘리고, 그로 인한 경제적 효과를 기대하겠다는 거죠.

서울역 주변이 외국의 중앙역 일대와 비교하면 민망할 정도라는 평가를 떠나서 서울역 일대는 뭔가 활로가 필요한 건 분명합니다. 지금처럼 자동차가 그냥 통과만 하고, 정작 사람들은 잘 모이지 않은 지역이라면 회생 가능성이 없는 건 자명한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7017 프로젝트의 취지는 공감할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아예 방치하는 게 오히려 시장으로서 자격을 의심받을 일일 겁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걸림돌이 있게 마련인데요, 서울역 고가 공원화 계획에 드러나 있는 걸림돌은 교통 혼잡일 테고, 드러나지 않은 걸림돌은 박 시장이 야권의 대선 주자라는 점일 겁니다.

서울시는 2017년까지 서울역 고가 공원화를 완성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려면 올해 안에 공사가 진행돼야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고가 공원화 추진 사업은 인근 상인들은 물론 정부 부처의 반대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래도 상인들의 반대는 처음 사업 발표 때에 비하면 많이 수그러진 듯 한데, 국토교통부, 경찰, 문화재청은 여전히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국토교통부는 서울역 고가에 차량을 통제한 뒤 사용하게 될 노선 허가를 계속 미뤘고, 경찰도 하루 4만6천 대의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고가를 없앤 뒤 교통 대책이 미비하다는 문제를 제기해왔습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도 서울역고가 공원이 서울역사의 조망권을 해친다고 반대했습니다. 이렇게 공원화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나름 이유와 논리가 있고, 모두 얼토당토 않은 애기도 아닌 듯 싶습니다.  

문제는 시간인데, 말 그대로 '쫄리는' 건 당연 서울시겠죠. 중앙부처의 계속되는 제동에 서울시는 급기야 정치적인 배경을 의심하기에 이릅니다. 정부 부처가 정치 권력의 눈치를 봐 일부러 미적거린다는 거죠. 청계천하면 이명박 시장이 떠오르듯, 서울역고가 공원이 박 시장의 업적으로 되는 걸 원치 않는다는 겁니다. 특히 3개 부처가 모두 먼저 나서는 걸 꺼려하며 서로 미룬다는 겁니다. 시 관계자는 권력층 특정 인사를 거론하면서 정치권이 정부 부처를 압박하고 있는 건 사실이라고 강변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해당 부처에선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서울시가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치킨 게임을 먼저 걸었다는 얘깁니다. 서울시는 서울역고가 차량 통제 시기를 못박았습니다. 11월 29일 자정으로 시한을 정한 겁니다. 서울시가 11월 29일을 공식 발표한 적은 없습니다만, 경찰과 협의 과정에서 흘러나온  내용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시가 내세운 명목은 서울역고가의 안전이 우려된다는 겁니다. 이미 45년이나 된 서울역 고가는 이미 10년 전부터 전체적으론 안전진단 D등급, 일부 구간은 E등급 상태였습니다. 최하위 등급인 겁니다. 그렇다고 철판 거더교인 서울역 고가가 당장 무너지는 건 아니지만, 지난 1월에 교각에서 시멘트 덩어리가 떨어져서 대형사고가 날 뻔 한 일도 있었을 정도로 안전 상태는 취약합니다.

이제 겨울철이 시작되다보니 기온 변화에 따른 위험 지수도 높아질 수 밖에 없는 실정이고요. 시민의 안전을 위해 차량 통제를 막겠다는 데 누가 뭐랄 수 있겠습니까? 정부를 압박할 이만한 카드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치킨게임의 묘미는 승부에 참가하는 모든 당사자의 심장이 쫄깃해진다는 점이겠죠. 내가 선공을 했다고 해서 결코 유리한 건 아니라는 얘깁니다. 11월 29일 자정이라는 시한을 걸어 놓은 쪽은 서울시였지만, 상대가 반응하지 않으면 더 애가 탈 수 밖에 없는 쪽도 역시 서울시입니다.

가뜩이나 공원화 사업 반대 여론도 많은데 정부 부처 심의도 거치지 않고 사업을 강행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사 강행하더라도 공원화 추진 과정에서의 각종 불편과 민원에 따른 부담도 몽땅 떠안아야 할 상황이 될 게 뻔합니다. 그래도 내가 먼저 운전대를 꺾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려는 걸까요? 서울시 공무원들은 29일 자정까지 정부 부처와의 협의가 잘 풀릴 것이란 말만 되풀이 했습니다.

국토교통부쪽 소식이 먼저 들렸습니다. 고가도로 차량을 통제한 뒤 노선을 변경할 때 다른 도로와 연결에 문제가 없는지, 변경 전 기존 도로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지 등을 국토연구원에 연구 용역을 맡겼는데, 문제가 없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는 소식입니다.

서울시로선 매우 고무적인 소식이지만, 정작 국토교통부는 최종 노선변경 승인을 서울시에 통보해주지 않았습니다. 국토교통부도 운전대를 움켜잡고 버틴 겁니다. 연구 용역 결과는 들리는데, 노선변경 승인을 해주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자 일부러 미루고 있다는 서울시 측이 품은 의심은 더욱 강해지는 듯 했습니다. 그만큼 서울시 측이 애가 더 탄다는 방증이겠지요.

서울시는 24일, 화요일 오후로 예정된 문화재청 심의에 기대가 컸습니다. 이미 실무협의 차원에서 얘기가 잘 진행됐다며 결과를 낙관해도 좋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문화재청 심의가 통과되면 그걸 출발점으로 국토교통부, 경찰과의 협의도 술술 풀릴 거란 기대감도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또 다시 심의 보류 결정이 났습니다. 서울역 고가 교통통제 예고 시한이 이제 겨우 나흘 남았는데, 어떤 걸림돌도 해결되지 않았던 겁니다.
서울역 고가
정말 마주오던 자동차가 충돌할 시간이 얼마 안 남은 듯 보였지만, 그래도 서울시는 버텼습니다. 이 때 내부적으로는 29일 데드라인을 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나중에 밝히긴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부처 협의가 안 돼도 교통통제를 그대로 강행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다음날 25일, D-day 사흘을 남기고 결국 국토교통부로부터 노선변경 승인 결정이 날아들어왔습니다. 서울시 입장에선 막힌 혈이 풀린 기분이었을 테죠. 기다렸다는 듯이 서울시도 운전대를 꺾었습니다. 이제원 부시장 주재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역고가 교통 통제 시기를 2주일 뒤, 12월 13일로 연기한다는 겁니다. 왜 갑자기 통제 시간을 번복하느냐는 기자들의 계속된 질책은 괘념치 않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한번 혈이 풀렸으니 여세를 몰아보자는 분위기일가요? 서울시는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 심의가 보류된 것도 내용상의 다툼은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심의 위원 중에 현장을 다시 살피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어서 보류된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지금 문화재위원회 심의가 3번째인데 아직까지 현장을 못 가봤다는 위원은 도대체 뭔가요?) 

오는 30일로 예정된 경찰과의 협의도 잘 풀릴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경찰과 협의 과정에서 논의해야 할 교통대책, 즉 만리재에서 염천교 교차로를 지나 퇴계쪽으로 우회전하는 신호를 만들고, 숙대입구 교차로에서 한강 쪽으로 좌회전을 허용하는 안도 공개하면서 말입니다. 이 정도까지 교통대책을 준비했다는 걸  보여준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과의 협의가 서울시 예상대로 진행될 지는 미지수입니다. 문화재청 심의도 정말 내용상 문제가 전혀 없는걸까요? 지금까지도 그래왔듯 30일 이후 상황은 낙관하기는 이른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여전히 서울시와 정부 부처의 치킨 게임은 끝난 것 같지 않아 보입니다. 하지만 서울시에도 정부에게도 바라건데, 그 치킨 게임을 너무 오래 지속하지 말아 주십시오. 국민의 안전과 통행권을 놓고 벌이는 게임의 판돈이 너무 크고 무거워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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