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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연평도 포격 5년…전투는 사라지고 도발만 남아

[취재파일] 연평도 포격 5년…전투는 사라지고 도발만 남아
지난 2010년 11월 23일 서해 연평도에서 벌어진 남북 간의 포 사격 공방. 군이 올해 5주기를 맞아 이 사건을 ‘연평도 포격전’으로 명명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가 며칠 전에 최종 철회했습니다. 이전처럼 ‘연평도 포격 도발’이라고 부르겠다는 겁니다.

군은 여러 가지 고민을 했습니다. 도발이라고 정의해두면 북한의 불법 행위를 부각시킬 수도 있고, 북한에게 사과를 요구할 수단도 하나 챙길 수 있습니다. 북한은 아직까지 사과 한마디 없습니다. 그 날의 사건을 포격전으로 정의해달라는 해병대에 요청에 국방부는 여론도 살폈습니다. 결론은 연평도 포격전이 아니라 연평도 포격 도발로 내려졌습니다.
철모 외피에 불 붙은 것도 모르고 싸운 임준영 해병대원
해병대 연평부대의 당시 대응이 빼어나 포격전 명명 방침을 굳혔던 국방부가 생각을 바꾼 것은 옳은 결정일까요? 산화한 두 해병대원을 전투 중에 숨진 전사자라고 부르고 대통령도 연평부대원을 우리 국민의 영웅이라고 칭하는데 당시 사건을 그저 북한의 도발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맞을까요? 목숨 걸고 싸웠지만 싸웠다는 평가를 못 받는 연평부대원들은 억울합니다.
북한의 포격을 뚫고 반격하는 7중대의 자주포
● “2010년 11월 23일은 전투였다”

연평부대 포 7중대는 북한의 집중 포격을 받으면서도 피폭된 K-9 자주포의 불을 끄고 또 고치며 13분 만에 반격했습니다. 군 교범을 충실히 따랐다면 포 7중대원은 한시 바삐 피신하고 반격은 다른 포대에 맡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연평부대엔 북한을 타격할 수 있는 화력이라곤 포 7중대의 K-9 자주포 6문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포 7중대는 맞으면서 싸우는, 교범에도 없는 전투를 펼쳤습니다.

1차 사격 때는 대포병 레이더를 운영했던 타군으로부터 도발 원점의 좌표를 받지 못했고 2차 사격 때는 표고(標高)가 안 나온 엉터리 좌표를 받았지만 북한군에게 사망 10 여명, 부상 20 여명이라는 타격을 입혔습니다. 누가 봐도 전투이고 이긴 싸움입니다. 포병 예비역들이라면 연평부대 포 7중대가 어떤 싸움을 했는지 잘 알 것입니다. 당시 포 7중대장이었던 김정수 소령은 “선제 공격 명령을 받으면 북한의 개머리 진지와 무도를 지도에서 지워버릴 수 있을 정도로 항상 준비가 돼있었다”며 포 7중대의 대비태세를 설명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어제 포격 5주기 행사에 보낸 영상 메시지를 통해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우리 영토와 국민의 생명을 지켜낸 연평부대 장병 모두가 우리 국민의 영웅”이라고 말했습니다. 포격전이 맞습니다.
피폭 총격에 소나무에 박힌 고 서정우 하사의 정모 앵카
● “연평부대는 이겼지만 군 지휘부는 당했다”

일각에서는 포격전으로 명명하면 북한의 불법 도발의 성격이 흐려진다고 주장합니다. 괜한 걱정입니다. 포격전에는 북한의 불법 도발에 맞서 싸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NLL 인근 수역을 국제 분쟁 지역화하려는 북한의 전략에 말려들어갈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포격 도발이라고 말한들 NLL은 국제 평화 지역이 될 수 없습니다.

2010년 11월 23일 연평부대는 혼자였습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연평도와 연평부대는 버려졌습니다. 군 지휘부는 확전을 우려했는지 전투기를 띄웠지만 미사일을 탑재 안했고 연평도와 개머리 진지 사이 서해 해상에 있던 함정들을 대피시켰습니다. 연평부대에 사격 명령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연평부대는 군 지휘부 없이도 의연하게 싸웠고 이겼습니다.

군 지휘부는 북한의 기습 공격에 당황했고 당했습니다. 그래서 2010년 11월 23일은 군 지휘부에게는 연평도 포격 도발인가 봅니다. 연평부대원에게 훈장 하나 내리지 않는 이유도 이런 데 있는 듯합니다. 해병대 연평부대에게 2010년 11월 23일 사건은 북한의 기습 도발에 용감히 맞서 싸운 명백한 포격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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