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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내 빚 3000만 원이 30만 원에 팔렸다.'

채권자 중심 사회 vs 채무자 중심 사회

[취재파일] '내 빚 3000만 원이 30만 원에 팔렸다.'
"얼마나 돈을 안 갚았으면 은행에서 채권을 땡처리했겠냐?"
"능력도 안 되면서 돈은 왜 빌렸냐?"

불법 채권 추심의 실태가 어떤지, 그리고 무담보 부실 채권이 어떻게 거래되고 있는지를 다룬 리포트에 달린 댓글 중 추천수가 많았던 것들입니다. ‘기자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돈 빌리고 떼어 먹어도 된다는 거냐’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은 아니지만, 예상보다 더 격렬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능력에 맞춰 돈을 빌리고,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하는 건 당연합니다. 그런데 질문을 조금 바꾸면 당연히 생각해 왔던 우리 사회의 또 다른 모습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질문들과 그 답은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Q. 얼마나 돈을 안 갚았으면 은행에서 채권을 팔았겠나?

금융사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3개월 이상 이자나 원리금 상환이 연체될 경우 부실채권으로 분류됩니다. 생각보다 '얼마나'의 시간이 길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분류된 부실 채권은 손실로 처리되거나 대부업체 등에 판매됩니다. 전세자금대출 등으로 금융권에서 돈을 빌렸다가, 여차저차 한 이유로 3,4개월 상환이 미뤄질 경우 해당 채권이 대부업체 등에 넘어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놀랄 일입니다. 불과 몇 개월 연체됐다고 금융사가 돈을 돌려받기를 포기한다는 건 의아한 일입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금융당국의 제재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한 금융에 있어서 부실의 징조는 언제든 부실의 현실화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전 예방이 중요하죠. 금융사들이 불과 몇 개월 연체된 채권을 부실로 처리해 빨리 털어버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몇 개월 연체됐다고 돈 받기를 포기하는 모습은 우리네 경험과 조응하지는 않습니다. 어떻게든 돈을 받아내겠다고 압류도 하고 추심도 하는 게 우리 경험과 더 가깝죠. 그런데 경험을 다시 끄집어 되살펴 보면, 끈질기게 추심하는 곳 중 은행이나 카드사 등 우리가 주로 접하는 금융사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 ‘○○신용정보’, ‘○○자산’같은 대부업체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이 연체된 채권을 매입했기 때문이죠. 바꾸어 말하면 빚의 주인이 바뀐 겁니다.

Q. 대부업체들은 왜 땡처리 되는 질 나쁜 물건을 살까?

빚을 산 사람들. 이들이 연체되고 있는 질이 나쁜 빚을 산 것은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이 되는 이유는 무엇보다 물건 값이 싸기 때문입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대부업체 등이 사들이는 채권 가격은 채무 원금(이자를 포함하지 않은 채무원금입니다)의 5~10%수준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1~3% 수준에서 거래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원금 1천500만 원에 이자 1천500만 원, 즉 3천만 원짜리 채권이 단돈 15만 원에서 45만 원 정도에 거래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들여도 3천만 원까지 받아낼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이후에 발생하는 이자까지 합법적으로 받아낼 수 있죠. 이런 매력이 있으니 상환 가능성이 떨어지는 질 나쁜 제품인 것을 알고도 대부업체들이 부실 채권을 사들이는 겁니다.

물론 이런 매력은 돈을 잘 받아냈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부실 채권은 어디까지나 부실 채권이기 때문이죠. 채권을 사들인 대부업자들도 이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래서 돈을 다 받을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이자는 면제해 줄 테니 원금만 갚으라거나 원금도 절반만 갚으라고 채무자들을 회유하는 건 어떻게든 회수율을 높이기 위해서죠. 이렇게 빚 바겐세일을 해서 원금, 아니 그 절반만 받아내더라도 10% 이하로 채권을 산 대부업자 입장에서는 꽤나 괜찮은 장사가 되겠죠.
Q. 능력도 안 되는데 왜 돈을 빌려줬을까?

능력도 안 되는데 돈을 빌린 사람, 분명 문제 있습니다. 그런데 왜 대부업체나 금융사들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을 빌려주겠다고 그렇게 광고를 하는 걸까요? 직업이 없는 사람들, 그리고 문자나 전화 한 통만 받아 돈을 제대로 갚을 지 검증할 수 없는, 그래서 돈이 떼일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게 왜 돈을 못 빌려줘서 안달이 난 걸까요?

“대부업체들의 주된 타깃은 사회 초년생, 주부다. 이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취약해서 조금만 독촉해도 돈을 잘 갚는다. 다른 곳에서 빚을 내서라도 빚을 갚는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다.”

한 대부업체 관계자의 이야기입니다. 요즘 대부업체 광고의 주인공이 사회 초년생이나 주부인 것과 같은 맥락이죠. 그런데 이래도 되냐는 생각이 함께 듭니다. 상환 능력과 관계없이 이들에게 돈을 빌려주면 어떻게 든 이자까지 받아낼 수 있다는 생각. 결국, 능력 이상의 대출이 권하는 게 옳은 것이냐는 생각이 드는 거죠.

이렇게 상환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대출을 ‘약탈적 대출’이라고 부릅니다. 빌려준다는 의미의 ‘대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지만, 본질은 빼앗는 ‘약탈’이라는 겁니다. 형용모순적인 표현이죠. 금융사에서 대출을 해 주면서 무엇을 빼앗느냐? 담보가 있으면 담보 물건을 빼앗고, 담보가 없으면 채무자의 삶을 빼앗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이야기합니다.

이런 약탈적 대출을 미국은 법으로 금하고 있습니다. 연방법인 ‘주택 소유권 및 자산 보호법’은 금융 기관이 대출 상품 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고, 과도한 이자율을 부과하지 못 하게 함으로서 금융 소비자들을 약탈적 대출로부터 보호하고 있습니다. 20개가 넘는 주(State)들도 비슷한 내용의 주법을 가지고 있죠. 돈을 빌리는 사람 못지않게, 아니 그것보다 더한 책임을 돈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부과하고 있는 겁니다. 많은 경우 이런 약탈적 대출의 대상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회 소수자들인데, 그들보다 금융사들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한다는 거죠.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빌려준다는 대부업체의 광고가 모든 미디어를 점령하고 있습니다. 전화 한 통, 아니 문자 한 통으로 돈을 빌려주는 게 엄청난 금융 발전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죠. 그런데 이런 유혹 속에서도 ‘능력도 없이 왜 돈을 빌렸냐’며 채권자만 나무라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은 아닐까요?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한다’는 도그마 속에서 ‘돈을 제대로 빌려줬느냐?’는 질문은 질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최근 몇 년 새 재테크 상품으로 부실 채권이 각광을 받았습니다. 대부업체들이 그러하듯 돈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앞서의 ‘괜찮은 장사’와 같이 재테크 상품으로서의 부실 채권은 채권자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발 디디고 있는 생각들이죠.

이게 잘못됐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너무 채권자 중심의 사회가 돼서 채무자들의 목소리를 소외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그래서 선한 얼굴을 하고 그들을 약탈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을 방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는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이 없다면, 자칫하면 누구나 추심에 시달릴 수 있는 가계부채 1천조 원 시대에서 나의 고통이 누군가에게는 ‘괜찮은 장사’와 ‘재테크 기회’가 되더라도 남을 원망할 수는 없게 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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