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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완벽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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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중 북한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총살 당하는 남자. 그의 이름은 손양원 목사. 한센병 환자들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왜 총살을 당한 걸까요?

“한일합병은 일본의 강탈이며, 자체적으로 총귈기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손종일 지사

손양원 목사는 독립운동가이자 기독교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아버지 손종일 지사는 그 당시 경남 칠원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 일로 손종일 지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학생이었던 손 목사는 생계가 어려워지자 우유와 신문 배달을 하며 학업과 신앙 활동에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6년 뒤 전도사가 되고서 처음으로 부임한 곳은 한센병자 교회였습니다.

이때 한센인들과 처음 인연을 맺었습니다. 한센병은 나병 혹은 문둥병으로 불립니다. 살이 문드러져 그 모습이 흉측하다며 냉대 받았고, 쉽게 감염된다고 알려져 격리 대상이었습니다. 1939년 애양원 교회로 자리를 옮긴 손 목사는 한센인들과 평생을 함께 했습니다. 식사도 함께 하고 잠도 같이 잤습니다. 껴안고 위로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한센인들은 가족들에게도 철저하게 외면 받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감싸고 인간답게 대해준 사람은 손 목사 밖에 없었습니다.

“내 소원은 나도 병이 들어 애양원에서 한센인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손 목사의 집은 병원 밖에 있었지만, 늘 병원에서 환자들과 함께 지내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한센인들에게 든든한 아버지였던 손 목사. 그런 그는 1940년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1945년 광복을 맞아 출소한 그는 한센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5년 뒤 발발한 한국전쟁... 겨우 안정을 찾은 애양원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만일 내가 피신한다면 1천 명이나 되는 양떼들은 어떻게 합니까?”
교회는 문을 닫고 북한군을 피해 피난을 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손 목사는 떠날 수 없는 환자들과 함께 교회에 남았습니다. 손 목사는 결국 북한군에 붙잡혔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여수에서 총살당해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나이 48세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책으로 발행됐고, 영화로도 제작됐습니다. 지난 20일 그를 추모하는 기념관도 개관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는 소외 당한 한센인을 끝까지 놓지 않는 따뜻한 인간애를 보여줬습니다. 그가 떠난 지 65년. 아버지 같았던 그의 사랑과 헌신은 지금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SBS 스브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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