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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했다" 끌려간 여고생…피투성이가 되어 지킨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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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고생이 기차 안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 경찰이 나타나 이 학생을 잡아갑니다. 학생이 잡혀간 이유는 단 하나. 조선말을 했다는 겁니다. 이 여학생을 캐묻다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을 길러 준 국어학자가 드러났고, 그 이유로 많은 국어학자들이 줄줄이 잡혀갔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입니다. 이때 많은 국어학자들이 일제에 온갖 야만적인 고문을 당하고 내란죄로 기소되어 처벌받았습니다.

이들이 목숨을 바치며 지키고자 했던 것은 바로 우리말 사전이었습니다. 1910년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이후 강압적인 식민 정책을 펼칩니다. 탄압의 대상 중에는 우리말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1911년부터 학교에서 강제로 일본어를 가르쳤고 급기야 1938년에는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그리고 1943년에는 조선어 과목을 없애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비인간적인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우리말을 지킨 사람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한징. 그는 조선어대사전 편찬으로 우리의 얼을 지켰습니다. 그는 1931년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고 이후 ‘조선어대사전’ 편찬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는 사전 편찬뿐만 아니라 표준어 사정에도 헌신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15살에 사서삼경을 정통한 수재로 불리고, 신문사 활동과 우리말 연구를 하던 그였지만, 사전 편찬 작업은 쉽지 않았습니다. 일제의 철저하고 비열한 감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회 사무실에는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매일 같이 들락거리며 감시했습니다. 게다가 몇 푼 안 되는 월급 탓에 밤에는 인쇄소 교정일 등을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우리말과 조선의 혼이 영원히 말살되고 마는 운명에 이를지도 모를 일이니 끝까지 고생을 참고 일할 수밖에 없다.” - 이극로 조선어학회 대표

오로지 우리말과 글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징. 하지만 그의 꿈은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지면서 그만 물거품이 돼버립니다.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 정태진을 체포한 뒤,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해버립니다. 그리고 학회의 회원들을 잡아갔습니다. 일제의 고문은 인정사정이 없었습니다. 물고문은 물론 공중에 매달고 매질하는 등의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고문과 굶주림 그리고 추위 속. 온갖 고초를 겪던 한징은 끝내 감옥 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의 나이는 59세였습니다.

그가 목숨으로 지키고자 했던 우리말 사전. 이 사전은 그가 죽은 지 3년 만인 광복 후 1947년이 돼서야 ‘조선말 큰사전’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나옵니다. ‘조선말 큰사전’은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꿔 1957년까지 총 6권 164,125개의 어휘를 담아 완간됩니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우리말을 지키려 했던 국어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한징,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정인승, 정태진...

10월 9일 한글날. 국어학자들 몇 분의 성함들을 적어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도 소개해드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한징을 비롯한 몇 분들 외에는 이들을 조명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후손들이 우리 말을 지킨 분들에게 보답해야 할 일이 많다는 뜻일 겁니다. 


(SBS 스브스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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