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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내숭' 벗은 동양화…그 '치명적인 유혹'

[취재파일] '내숭' 벗은 동양화…그 '치명적인 유혹'
'치명적인 유혹'. 케이블 방송 유료채널에서 금요일 밤에 본듯한 영화 제목 같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동양화' 작품의 제목이랍니다. 주인공을 듣고 나면 더 뜻밖입니다. 고조선부터 대한민국까지 반만 년 역사를 통틀어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꼽히시는 신사임당 여사! 굳이 그림을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쯤 되면, 이건, 도발입니다. 아래 작품 얘기입니다.
▲ 치명적인 유혹

근엄하시고 지적이시고 고매하신 신사임당 여사가 '유사 이래 첫 여성 화폐 모델'이라는 영광도 뿌리치고 거금 5만원 권 밖으로 뛰쳐나오셨습니다. 두 손에 책을 들고 여전히 품위 유지에 안간힘을 쓰고 계시지만 (자세히 보면 이 책 역시 썩 어려운 책은 아닌듯도 합니다만....), 자꾸 돌아가는 눈길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치명적인 매력으로 여사를 유혹한 건 바로 방바닥에 흩어져 있는 금괴 무더기입니다.

작품은 20대 후반의 젊은 동양화가 김현정 작가의 작품입니다. '내숭'시리즈로 꽤 알려진 작가입니다. 우아한 한복 곱게 차려 입고 한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한 행동을 하는 젊은 여성을 그린 그림들입니다.
▲ 준비 완료
  ▲ 나를 움직이는 당신

● '내숭'을 벗다…쉬워진 동양화

김 작가에게 "동양화 전공하신 분 그림이 동양화 같지 않다"고 했더니, "동양이 뭔지 생각해 봤는데, 꼭 전통이 동양은 아니잖아요?" 당찬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왜 '전통'적이지 않은 동양화를 그리냐고 다시 물었더니 "쉽고 편하고 재미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림이 정말 좋아서 평생 그림을 그릴 생각인데, 사람들이 그림을 너무 어렵게만 여겨서 잘 보지 않는 게 안타까웠다는 겁니다.

김 작가의 쉬운 동양화에 대한 반응은 가히 폭발적입니다. 여기저기 방송에서 출연 요청이 줄을 잇고, SNS 팔로워만 10만 명에 육박합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동양화계의 아이돌'입니다.

쉽고 대중적이라고 하면 작품성이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김 작가는 현재 한국 화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신진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본관에서 진행 중인 '멈추고 보다'展입니다.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국화 대표작들을 소개하는 전시입니다. 박노수, 천경자 같은 거장들의 작품들이 즐비합니다. 그 옆에 김 작가의 '내숭'시리즈 석 점이 나란히 걸렸습니다.

같은 전시엔 또 다른 젊은 작가의 작품이 한 점 걸려 있습니다. 파격적이기로 따지면 이 작품도 만만치 않습니다. 역시 동양화를 전공한 손동현 작가의 작품입니다.
▲ 왕의 초상
 
● 먼로 대신 마이클 잭슨, 통조림 대신 생수…동양화의 '팝아트'

손 작가의 마이클 잭슨 초상은 40점짜리 연작입니다. 죽 늘어놓고 보면 뽀글머리 소년에서 팝의 황제가 되기까지 마이클 잭슨의 변천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 왕의 초상
 
손동현 작가의 작품들 앞엔 '동양화의 팝아트'라는 수식어가 자주 붙습니다. 팝아트는 유명인이나 일상 속에서 흔히 쓰는 상품들처럼 대중적인 소재들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말합니다. 앤디 워홀의 마를린 먼로, 캠벨 수프 깡통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죠.

손 작가가 인물 중심의 동양화 팝아트를 그린다면, 상품 중심의 동양화 팝아트를 그리는 작가들도 있습니다. 김신혜 작가가 대표적입니다. 김 작가의 소재는 주로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마시는 음료수 병들입니다.
▲ 관홍매도
▲ (좌) 독도, (우) 울릉도

'젊은 감각', '대중성', '파격' 같은 단어들 말고도 세 작가에겐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서울대'. '동양화'. 듣기만 해도 뭔가 보수적인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그래서 저 두 단어는 세 작가의 '파격'이 더더욱 파격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과 선후배인 세 작가 사이엔 10년여 정도 간격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세 작가를 통해 확인되는 십년 여 사이의 변화입니다. 가장 연장자인 김신혜 작가는 "학교 다닐 때는 먹만 쓰는 수묵화, 전통 산수화가 아니면 꺼려지는 분위기였다"고 기억합니다. 반면 막내인 김현정 작가는 "인물화를 작업하시는 분에게 배웠고 솔직하게 작업하시는 분이 지도교수님이셨기 때문에" 자신도 솔직한 자화상들을 그리게 됐다고 말합니다.

결국 세 작가가 보여주는 '튀는' 동양화들은 그저 몇몇 작가들의 파격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 속엔 시간을 두고 조금씩 조금씩 진행돼 온 우리 화단의 흐름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전통 수묵화나 산수화, 사군자가 더 이상 의미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전통은 언제나 변치 않는 가치와 의미가 있지만, 세상이 변하고 사회가 달라지면 그 변화를 담아내는 '현대적인 동양화'도 또 다른 의미를 함께 지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예술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과 다양성, 창조성, 한마디로 '매력'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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