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9명의 새 생명을 살리는 이름 '장기 기증'

[취재파일] 9명의 새 생명을 살리는 이름 '장기 기증'
故 김 기 석 군. 

180cm가 넘는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 그리고 멋진 외모만큼 마음도 따뜻하고 깊었던 아이. 자신의 용돈도 스스로 벌겠다면서 어머니가 일하는 회사에서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틈틈이 하던 아이. 그리고 그 작은 용돈으로 할머니에게 간식을 사주던 아이. 기석이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농구를 좋아하고 평소 10km 단축 마라톤을 거뜬히 뛸 정도로 건강했던 아들이었는데 차가운 바람이 불던 2011년 12월. 기말고사를 며칠 앞두고 학원을 가는 길에 기석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빠 머리가 너무 아파요"
 
기석 군이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자 아버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상계동의 큰 병원 응급실로 가라고 했고 곧장 병원으로 따라갔습니다. 아버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까지만 해도 기석 군은 큰 이상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증상을 찬찬히 설명하던 기석 군이 김 씨의 눈 앞에서 갑자기 구토를 하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병명은 ‘뇌동류 파열에 의한 뇌출혈’이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위험한 순간이었지만 병원으로부터 수술을 할 수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다른 병원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밤 늦게 다른 병원 중환자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기석이의 몸 상태는 더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병실 앞에서 아버지는 수천번, 아니 수만번 간절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제발 깨어나다오. 깨어나다오. 의식만이라도 돌아와 다오...' 기석 군의 의식이 돌아오지 못하자 아버지는 초조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혹여 이번 일로 장애가 생기게 되더라도 부모도 있고 누나들도 있는데, 기석이 하나 건사하지 못할까. 어떻게든 돌보고 장가도 보내야지. 깨어만 난다면 뭐든지 다 해줘야지...’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까지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오전 10시가 넘어도 아무런 호출이 없어서 중환자실 벨을 눌렀더니 당직의사가 나왔습니다. 기석이의 상태를 물었더니 밤사이 2번이나 쇼크가 왔고 동공이 7mm 열렸다며 한번 정도 같은 상황이 오면 사망한다면서 CT를 다시 한번  찍어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석이의 상태가 사실상 뇌사상태라면서 소생 가능성이 없으니 기석이가 마지막 가는 길을  볼 사람들에게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기석이는 가족들이 사랑하는 너무나 착하고 마음이 따뜻한 아이였기에 그냥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이제 겨우 16살. 기석이를 위해 무엇을 해주어야 할까. 아버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착한 아이었으니 장기기증을 통해 여러 생명을 살리고 떠날 수 있게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석이도 하늘나라에서 좋아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2011년 12월 5일. 기석 군은 뇌사 장기기증으로 신장과 간, 췌장, 심장, 폐장 등을 기증해 6명의 생명을 살리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선 기석 군의 아름다운 사랑을 선물받은 6명의 생명이 힘차게 숨쉬고 있습니다. 기석군의 아버지는 기석이는 멀리 떠났지만 6명의 새로운 아들을 얻게 돼 너무 기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6명의 아들이 건강하게 크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위안이 된다고 했습니다.
 

지난 9월 9일은 장기기증의 날이었습니다. 뇌사자 한 사람이 장기를 기증하면 많게는 9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뜻에서 9월 9일은 장기 기증의 날로 지정됐습니다. 하지만 9월 9일이 장기기증의 날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구구데이라면서 닭 먹는 날로 더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장기기증을 하고 세상을 떠난 분들의 유가족과 또 이들로 부터 장기기증을 받아 소중한 삶을 얻은 분들은
이날 청계천 광장에서 조촐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장기기증의 의미를 되새기고 훌륭한 일을 하고 떠난 분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행사였습니다.
 
지난해 뇌사에 빠져 장기를 기증한 사람은 4백여 명. 장기를 기증받은 천4백 명이 새 생명을 얻거나 건강을 회복한 사람은 1천 4백여 명에 이릅니다.
 
국내 장기 기증이 해마다 조금씩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장기기증은 인구 100만 명당 8.4명 꼴로 미국(26명) 이나 스페인(35명)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입니다. 또 장기기증을 희망하는 사람의 수도 선진국은 인구의 40%에 달하지만 우리나라는 2% 정도에 그치고 있습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선 장기기증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강하고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의 시신을 훼손한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여전하기 때문인데요, 다른 사람들이 장기기증을 했다고 하면 대단한 일을 했다며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막상 내 가족의 기증은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한 게 사실입니다.

선진국처럼 어릴 때부터 장기 기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학교에서 기증의 숭고한 의미에 대해 교육하고 장기 기증자 유가족을 예우하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매년 9월 9일은 닭을 먹는 날이 아닌, 자신을 희생해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장기기증의 날'이라는 걸 기억하고 격려해 주는 것 만으로도 장기기증 유가족들에게는 든든한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1년 뒤 내년 9월 9일은
치킨 보다 장기기증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수 있는 날이 됐으면 합니다. 청계천 광장에서 열리는 '장기기증의 날' 행사에 꼭 참석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