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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여친 시멘트 암매장 살인사건' 피해자 아버지의 외침

"내 딸이 이런 사건의 마지막 피해자가 됐으면 한다."

[취재파일] '여친 시멘트 암매장 살인사건' 피해자 아버지의 외침
지난 9월 3일 오후, 서울중앙지법 502호 법정 앞. 피해자의 어머니는 영정 사진이 되어버린 딸의 대학 졸업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딸의 사진이었지만, 어머니는 사진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런 부인의 모습을 한참 말없이 지켜보던 아버지는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앞선 재판이 끝나고 가족들은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방청석 20석 남짓의 작은 법정. 가족들은 제일 앞줄에 나란히 앉았다. 아버지 왼쪽에는 딸의 사진을 든 피해자의 어머니, 오른쪽에는 군복 차림의 피해자 동생이 자리했다. 강원도에서 군 복무 중인 동생은 누나 재판이 있을 때 마다 하루 휴가를 내고 서울로 왔다고 한다. 이번이 3번째였다. 가족들 뒤로는 피해자의 이모 등 친지들이 자리했다.

재판이 시작되고 황토색 수의를 입은 피고인이 입장했다. '여자친구 시멘트 암매장 살인사건'의 피의자 이 모씨였다. 이 씨는 지난 5월 헤어지지자는 여자친구를 목 졸라 살해한 뒤, 충북의 한 야산에 시멘트와 함께 시신을 암매장 한 혐의로 6월 12일 재판에 넘겨졌다. 피해자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은 고개를 숙인 채 자신들 앞을 지나가는 이 씨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딸의 사진을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있던 어머니는 조용히 흐느꼈다.

● "핑계만 대고 있는 피의자를 용서할 수 없다"

피해자 친구의 증인 진술이 끝나고, 군복을 입은 동생이 증인석에 섰다. 피해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재판장이 요청한 증인 진술이었다. 동생은 천천히 숨진 누나와의 추억을 되새겼다. 동생은 울음을 참고 있었지만, 방청석을 채운 피해자 가족들을 연신 눈물을 훔쳤다.

올해 1월 쯤, 동생은 피고인과 누나가 면회를 와서 외박을 했다고 한다. 셋이서 함께 식사도 하고, 술도 마셨다고 한다. 적지 않은 술을 마셨지만, 흐트러짐이 없었던 피고인을 동생을 똑똑히 기억했다. 법정 안이 가족들의 흐느낌으로 가득할 즈음, 검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냐고 물었다. 동생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피고인은 아직도 죄를 뉘우치지 않고 술기운에 그랬다는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피고인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법정 최고형을 받길 원합니다.“

동생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  "우리 딸이 이런 사건의 마지막 피해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 증인은 피해자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딸의 사진만 닦고 있는 부인을 잠시 쳐다본 뒤 천천히 증인석으로 향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담담히 딸의 성장 과정을 이야기했다. 누구보다 가족을 생각하던 맏딸, 미국 대학을 조기졸업하고 돈 많이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겠다던 아이. 그런데 왜 그 아이가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 시멘트와 함께 묻혀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하는지, 사람 보는 눈을 키워주지 못 한 채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만 이야기했던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난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죽기 전에도 피고인에게 폭행에 시달렸다는 걸 몰랐다는 게 너무 부끄럽고 했다. 평소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 아버지에게는 가감 없이 말하던 딸이었다. 하지만, 이 씨를 만나고 있다는 건 한 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었다. 혹시라도 딸이 피고인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다는 걸 자신에게 말했다면, 그래서 딸과 피고인을 떼어 놓았더라면 딸이 지금도 곁에 있지 않을까하는 회한에 잠긴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 진술을 이어갔다.

“저희 아이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걸 잘 압니다. 저희 아이를 생각해서 피고인을 엄하게 처벌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우리 피고인 이○○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왔다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 딸과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올 거라는 겁니다. 저는 우리 딸이 이런 사건의 마지막 피해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피해자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을 살해한 뒤 시멘트와 함께 암매장하고, 이후 마치 딸인 마냥 아버지의 SNS 메시지에 답장까지 보냈던 피고인을 ‘우리’라는 수식어를 붙여 지칭했다.

● “제 딸 얼굴 한번만 봐주세요.”

검찰은 피고인에게 전자발찌 착용을 요청했다. 그 결과를 검찰 구형에 반영하기 위해 재판 일정은 한 차례 추가됐다. 다음 재판은 9월 22일이다.

재판이 끝나 피고인이 떠나고, 재판 내내 눈물만 흘리고 있었던 피해자의 어머니가 공판 검사에게 소리쳤다. 아니 울부짖었다.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있던 딸의 사진을 한번 만 봐달라고 했다. 딸 이름으로 보험 하나 못 들 정도로 어렵게 키웠던 아이가 마지막으로 본지 8개월 만에 시신으로 돌아왔다. 이미 부식되어 가고 있던 딸의 시신, 딸의 부검 장면을 어머니는 지켜봤다고 한다. 딸의 얼굴을 한 번만 봐달라고, 피고인을 엄히 처벌해 달라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검사는 서서 묵묵히 경청했다.

어제도 울다 잠에 들었다는 피해자의 어머니는 가족들의 부축을 받고 법정 밖으로 나갔다. 그 와중에도 옷소매로 딸의 사진을 훔치고, 또 훔쳤다.

피고인 이 모씨는 지난 5월 2일 헤어지자는 여자친구를 목 졸라 살해했다. 이 씨는 평소에도 여자친구를 폭행했고, 손가락이 부러지기도 했다고 피해자의 지인들은 증언한다. 피해가 헤어져달라고 애원하기도 했지만, 외견상 연인관계는 이어졌다고 한다. 살해 다음날 시신을 여행용 가방에 담은 이씨는 5월 7일 충북 제천의 한 야산에 암매장했다.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였는지 시멘트까지 부었다. 암매장 후에는 술을 뿌려줬다고 한다.

범행 이후 이 씨는 어버이날은 꼭 챙기던 딸에게 연락이 없어 메시지를 보내온 피해자의 아버지에게는 마치 여자친구인 것처럼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5월 18일, 경찰에 자수했다. 자수 이전에는 손목을 그어 자해를 시도했다고 한다. 그런데 119에 전화를 한 사람도, 왜 빨리 구급차가 오지 않느냐고 재차 전화를 한 사람도 이 씨로 알려졌다.

원래 국선 변호인의 조력을 받던 피고인은 재판 시작을 앞두고 한 법무법인 소속 8명의 변호사를 선임했다. 이 씨는 재판에 넘겨진 이후 36통의 반성문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부모님은 아직 아무것도 받지 못 했다. 가족들의 시간은 피해자의 시신을 확인한 날부터 멈춰있다.

● 3년 간 313명, 올해 7월 말 현재 64명

자신의 딸이 이런 사건의 마지막 희생자가 되었으면 한다는 피해자 아버지의 바람은 실현될 수 있을까?

지난 5일, 내연녀를 살해하고 시신을 시화호 주변에 암매장한 남성이 경찰에 검거됐다. 그는 검거 이후 “"서로 정말 사랑했다. 정말 사랑해서 모든 걸 다 줘서 후회가 없었다.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말했다. 그가 말한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을까? 자기 방식의 사랑을 강요했던 건 아닐까? 상대는 사랑을 하고 있었을까?

연인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이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313명이다. 올해도 7월까지 집계된 것만 64명. 지난해 연인 사이에서 발생한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행 등 강력범죄 발생 건수만 9천 건이 넘는다. 경찰에 붙잡힌 것만, 경찰에 신고된 것만 이 정도 수준이다. 하지만, 신고 되지 않은, 그리고 신고가 반려된 경우를 더하면 만 건이 훌쩍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취재 중 만난 한 데이트 폭행의 피해자는 진단서까지 경찰에 남자친구를 고소하러 갔더니, “왜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려고 하느냐”, “나중에 정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그 때 다시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돌아왔다고 한다. 시멘트 암매장 살인 사건의 피해자가 숨지기 전 폭행에 시달리고 있다고 경찰서를 찾았어도 제대로 구제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전문가들은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데이트 폭력을 예방하고 처벌하기 위해서는 사법 기관의 이런 문화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지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법기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 경쟁적으로 발의됐지만, 아직도 잠자고 있는 스토킹 관련 법안

현재는 폭력을 휘두르는, 그러나 놓아주지 않는 상대가 자신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요청에도 받아들여지기가 쉽지 않다. 가족 관계라면 접근 금지 명령 조치가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지만, 연인관계라면 관계를 증명하는 것부터가 만만찮은 게 현실이다.

영국은 지난해부터 데이트 상대방의 전과를 조회할 수 있는 일명 ‘클레어법’을 시행하고 있다. 영국에서도 과잉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부 지역에서 시행한 해당법이 효과가 있다고 판단된 전역으로 확대됐다. 미국은 연인 관계의 폭력을 가정폭력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있다. 독일, 호주 등 다른 국가들도 연인 관계의 폭력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연인간의 폭력이 살인 등 강력사건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관련 법안 마련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연인 간 큰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스토킹 방지 법안들이 경쟁적으로 발의됐다. 하지만, 어느 법안도 국회를 통과하지 못 했다. 연인 간의 범죄를 막기엔, 연인 간 범죄를 처벌하기엔 국회의 문턱이 너무 높다.

※취재 과정에서 손석한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이화영 한국 여성의 전화 성폭력상담소 소장, 이재용 변호사, 새정치민주연합 박남춘 의원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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