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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미납 할부금 가물가물" 전자소송 악용 16억 원 챙겨

"20년전 미납 할부금 가물가물" 전자소송 악용 16억 원 챙겨
"법원 집행관입니다. 오후 4시 비행기 타고 집 압류하러 갑니다."

제주도에 사는 주부 김 모(45)씨는 2014년 12월 법원이라며 걸려온 전화를 받고 깜짝 놀랐습니다.

남편이 과거에 갚지 않은 할부금이 있어 법원에서 지급명령이 떨어졌는데 이행이 안 돼 집을 경매에 넘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별거 중인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볼 수 없었던 김 씨는 지급명령을 신청한 채권추심업체가 알려준 계좌로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에 각각 60만 원과 40만 원을 송금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1992년에 10월 14일 할부로 28만 원 상당의 건강식품을 산 것은 맞는데 잔금은 8만 원이 전부였습니다.

부산의 한 채권추심업체 3곳은 수십 년 전에 건강식품, 도서, 생활용품 등을 할부로 구매하고 나머지 할부금을 갚지 못한 사람들을 노렸습니다.

할부금은 대부분이 5만 원에서 50만 원 정도의 소액이었습니다.

제품 판매 업체가 지속적으로 채권 추심을 하지 않으면 3년 이후에는 무효가 됩니다.

채권추심업체 대표 최 모(36)씨 등은 이처럼 소멸시효가 지난 11만 명 분의 채권을 브로커나 인터넷을 통해 원금의 2∼6% 가격에 사들였습니다.

이들의 가장 큰 '무기'는 대법원 전자소송시스템이었습니다.

법무사도 간접적으로 가담했습니다.

전자소송시스템은 소송 수행에 필요한 모든 절차를 법원 방문 없이 인터넷으로 진행하는 재판방식입니다.

민원인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만 채권추심 진행 과정에서 원금 액수 등의 진위를 정확히 확인하지 않습니다.

채무자가 소송관련 서류를 받은 후 2주 이내에 이의신청 등 항변을 하지 않으면 지급명령이 확정됩니다.

최 씨 등은 이 같은 전자소송시스템의 허점을 노려 채권 액수를 부풀려 전자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업체 직원들은 법원 집행관 행세를 하며 피해자들에게 겁을 줬고 다른 직원은 합의를 종용했습니다.

게다가 현직 법무사를 끌어들여 매월 자문료 명목으로 100만∼130만 원을 지급하고 법무사 명의로 소송을 진행하는 것으로 꾸몄습니다.

이들은 정상적인 채권추심을 하는 것처럼 신용정보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4만 명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신용조회를 실시, 비교적 신용상태가 양호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중심으로 지급명령을 신청했습니다.

법원 소송을 근거로 피해자들의 주거래 은행 계좌를 압류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채무자를 압박하는 방법, 채무자를 다루는 기술, 집행관을 사칭하는 방법, 압류전화 응대수칙 등을 담은 매뉴얼을 만들어 직원들을 교육했고 '1인 월 900만 원 달성'이라는 할당량을 두고 성과급을 주기도 했습니다.

일부 피해자들은 전화로 문의하거나 사무실에 찾아가려해도 연락이 닿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들이 인터넷 전화를 사용한 것은 물론 발신번호를 조작했고 사무실을 수시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이의신청이 들어오면 소송을 바로 취하했지만 명의를 바꿔 다시 지급명령을 신청했고 이미 숨진 사람에 대해서도 전자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미 수십 년이 지난 시점에 당시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 피해자들 대부분은 속수무책으로 당했습니다.

최 씨 등은 2012년 3월부터 2015년 1월까지 모두 2만6천851명을 상대로 303억6천만 원 상당의 지급명령을 신청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챙긴 부당이득이 현재까지 확인된 금액만 최소 16억 원입니다.

부산 연제경찰서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 혐의로 최 씨 등 3개 업체 대표와 직원 등 9명을 구속하고 법무사 서 모(43)씨 등 22명을 불구속 입건했습니다.

경찰은 전국의 채권추심업체 20곳이 비슷한 수법으로 영업하는 정황을 포착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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