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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왜 미국은 고집스럽게 '미터법'을 거부할까?

[월드리포트] 왜 미국은 고집스럽게 '미터법'을 거부할까?
 미얀마, 라이베리아, 그리고 미국, 이 세 나라의 공통점은 뭘까요? 전 세계에서 미터법을 쓰지 않고 있는 나라들입니다. 미국에 살다 보면, 거리나 무게, 부피나 면적을 재는 척도가 익숙하지 않아 골치 아픈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 현재 휘발유 값은 갤런 당 4달러가량 합니다. 1갤런은 3.78리터가량으로 리터당 얼마인지 알려면 4달러 X 1190원 / 3.78리터로 계산해야 합니다. 제 차가 갤런당 평균 15마일 (1마일은 1.6킬로미터) 정도 달리니까 우리 식으로 리터당 몇 킬로미터 가는지 연비를 알아보려면 15 X 1.6 / 3.78을 계산해야 합니다. 참 복잡하죠? 
기본적으로 미터법은 10진법으로 돼 있습니다. 1킬로미터는 1000미터이고 1미터는 100센티미터며, 1센티미터는 10밀리미터입니다. 반면, 미국의 도량형은 기준이 다 제 각각입니다. 무게의 단위인 파운드는 16온스고, 거리 단위인 1피트는 12인치이며 1야드는 3피트입니다. 온도 조차도 화씨를 씁니다. 그래서 물은 0도 (섭씨)가 아닌 32도 (화씨)에 얼고, 100도(섭씨)가 아닌 212도 (화씨)에 끓습니다.
 ▲ 마르시아노의 Metric Maven 블로그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렇게 간단한 십진법 측정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복잡한 자기네 도량형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 CNN은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습니다. 사실 미국도 여러 차례 십진법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존 베멜만스 마르시아노는 자신이 쓴 ‘메트릭 매이븐’ (Metric Maven)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3대 대통령이었던 토마스 제퍼슨이 미터법을 처음 도입하려 했던 인물이라로 적고 있습니다. 그가 미국의 동전의 단위를 십진법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실제 달러는 1, 5, 10, 50, 100달러 지폐로 돼 있고 동전은 1, 5, 10, 25센트로 구성돼 있습니다. 당시 의회는 토마스 제퍼슨의 이 법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이로써 미국은 전 세계에서 십진법 통화를 가장 먼저 쓴 나라가 됐다고 그는 말합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미 프랑스 혁명 당시부터 10진법을 화폐단위로 썼다며 반론을 펴고 있습니다.)

 ▲ 지금은 미국에서 거의 쓰지 않는 2달러 지폐에 그려진 인물이 토마스 제퍼슨
 
하지만,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 때 화폐 단위에 십진법을 쓴 것 말고는 여전히 다른 모든 도량형은 전통적인 방식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십진법이 여러모로 계산하기 편리하지만 오히려 기존 관습에 익숙해 있는 상황에서는 더 불편했던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쇠고기를 ‘근’에서 그램으로 측량 단위를 바꾸고, 금반지 맞출 때 ‘돈’을 쓰던 것을 ‘그램’으로 바꾸기 까지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직도 아파트 분양 광고에는 102제곱미터 옆에 (31형)이라고 적는 변칙(?)이 행해지는 실정이지요.
 
마르시아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본래 10으로 나누는 것에 대해 전혀 익숙하지 않았고 그 보다는 절반, 1/3, 이런 식으로 나누는 데 익숙해 있다. 예를 들어 에이커 (땅의 넓이단위)는 한 농부가 하루 종일 쟁기질 해서 갈 수 있는 땅의 크기로 정해졌는데 우리 만의 이런 도량형에 오래 길들여져 있다 보니 10진법을 도입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마르시아노는 특히, 사람들은 십진법이 과학과 관련돼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보다는 ‘자본주의’와 연관돼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마디로 십진법이 뭔가 사고 파는데 편리한 단위라는 겁니다. 과거 독일이 작은 도시국가들을 통합해서 하나의 왕국을 만든 뒤 서로 교역을 쉽게 하기 위해선 통일된 단위가 필요했는데 그래서 채용한 것이 국제적으로 쓰이고 있는 10진법이었다는 겁니다.
▲  Treaty of the Meter
 
전 세계가 이런 식으로 10진법에 따른 도량형을 하나 둘 채용해 가자, 1866년 미국 의회도 10진법을 쓰는 법안을 추진했고 거의 10년 뒤에 ‘미터 조약’ (the Treaty of the Meter)에 17번째로 서명한 나라가 됐습니다. (이 조약은 더 발전해서 1960년, ‘국제 단위 시스템’ (the International System of Units)가 됐습니다.) 이 미터법은 인도네시아, 인도, 케냐 등 신흥 독립국에서는 빨리 정착된 반면, 식민지 기간이 길었던 나라일수록 늦게 정착됐습니다. (우리나라도 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미국은 조약에는 가입했지만 오래지 않아 과거 자신들만의 도량형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전세계가 미터법을 채용하면서 1960년대 미국 내에서 미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전세계의 ‘미터법 쓰나미’를 거부하다가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이 재연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작용했습니다.
 
1975년, 미국 의회는 미터법을 우선적으로(preferred) 쓰도록 하는 ‘미터법 전환령’ (Metric Conversion Act)을 통과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실무 작업을 담당할 ‘전미 미터법 위원회’ (U.S. Metric Board)도 발족했습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미국은 시험적으로 도로의 거리 표시를 마일에서 킬로미터로 바꾸는 작업을 했습니다. (애리조나 투산에서 멕시코까지 연결하는 19번 고속도로는 미국에서 지금까지 킬로미터로 거리를 표시하는 유일한 고속도로로 남아 있습니다.)  1970년대 후반까지 자동차 제조사들은 차량 속도계에 마일과 킬로미터를 함께 표기했습니다. 고속도로의 제한속도를 55(마일)라고 쓰는 것보다는 88(킬로미터)로 쓰는 게 훨씬 더 달리는 느낌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한 속내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고속도로에 킬로미터를 도입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가열되기 시작했습니다. 미터법 찬성론자들은 도로의 거리 표지판을 미터나 킬로미터를 바꾸는 것이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 미터법을 체득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주장했고 반대로 미터법 반대론자들은 굳이 익숙한 ‘마일’을 놔두고 왜 이런 쓸데 없는 짓을 하느냐며 반발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당시 아이오와 주의 하원의원이자 현재 상원의원인 찰스 그래슬리는 미국 연방이 각 주에게 킬로미터 표기법을 강제화하는 것은 위헌이라며 법을 폐지하는데 앞장 섰습니다. 미국 내에는 그래슬리 의원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볼프는 뉴욕 타임즈의 기고한 칼럼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미터법이 프랑스 파리 외곽의 어디엔가에서 비롯된 것이다. 작위적인 이 도량형을 따르는 것은 아마도 프랑스에 대한 맹목적 동경이 작용한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나는 피트(Feet/ 발 사이즈를 활용해서 만들어진 거리 도량형으로 1foot는 30.48센티미터입니다)가 좋다. 인체와 관련된 측량법을 쓴다는 게 얼마나 좋은 아이디어인가?” 이 기사를 본 한 프랑스인 변호사는 다음과 같인 반박했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참 쓸데 없는데다가 에너지를 쏟아 붇고 있다. 하기야, 그게 핵 폭탄을 팔아먹고 다니는 것보다는 나은 일이지만…”
 
▲ 골드바 단위도 '온스 트로이' (31.1그램)로 쓰는 미국
 
2015년,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제 다시 미터법 사용을 고려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더 가까이 연결되는 국제화 시대에 미터법을 더 이상 거부하는 것은 고립을 자초할 것이라는 겁니다. 미국 대선 출마를 선언한 민주당의 링컨 샤피는 자신의 출마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좀 대담해져 봅시다. 전 세계가 쓰고 있는 미터법의 체계에 동참합시다. 그 같은 동참은 상징적으로 우리 미국이 세계와 함께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효과도 있을 것입니다.”
 
미터법 도입을 반대하는 미국인들은 미터법 도입론자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고 있고, 미터법 도입론자들은 반대론자들을 미국을 세계에서 뒤쳐지게 하려는 멍청이들이라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미국 역사에서 반복되어온 미터법 도입 논쟁이 또다시 재연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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