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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드뉴스] "일본의 간호사는 안 하겠다" 박차고 나온 한 여인



일본이 대한제국을 집어삼킨 지 1년 뒤인 1911년 초. 총독부는 대한제국 황실에서 일하던 궁녀 등 326명을 해고했습니다. 그중에는 어린 시절 아기나인으로 궁에 들어와 일하고 있던 궁녀 박자혜도 있었습니다.

박자혜는 숙명여학교에 들어갔다가, 사립 조산부양성소에 입학했습니다. 당시에는 조산부(산파)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직업 중 괜찮은 편에 속했습니다. 조산부 자격증을 딴 뒤에는 총독부의원 산부인과에 취업했습니다. 나름대로 안락한 삶이 보장된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일자리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박자혜의 삶을 바꿨습니다. 박자혜는 3.1운동에 앞서 간호사들의 독립운동단체인 '간우회'를 조직했고, 3월 10일에 만세운동에 동참하기로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계획이 발각되어 박자혜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총독부의원장이 신원을 보장해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지만, 이때 박자혜는 결심했습니다.

"더 이상 일본인을 위한 병원에서 근무할 수 없어!"

박자혜는 총독부의원을 그만두고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박자혜는 독립운동가 신채호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1921년 첫 아들 수범이 태어났습니다.

1923년 박자혜는 남편 신채호와 떨어져 국내로 들어왔습니다. 국내에서 산파로 일하며 신채호의 독립운동을 경제적으로 도왔습니다. 신채호의 의열단 동지인 나석주 의사가 국내에 잠입했을 때 나석주 의사를 돌보고 안내하는 것도 박자혜의 몫이었습니다.

박자혜 자신은 홀로 아들을 키우면서 극심한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습니다. 참외장사까지 해봤지만 벌이는 신통치 않았습니다. 1936년 신채호가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국 여순 관동형무소에서 신채호의 시신을 인수해 귀국한 것도 박자혜였습니다.

이후 아들들은 곁을 떠났고 박자혜는 혼자 살았습니다. 1943년 박자혜는 셋방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1990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자혜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습니다.

안락한 삶을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박자혜, 그리고 신채호를 평생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박자혜. 신채호의 아내로서만이 아니라 한 사람의 당당한 독립운동가로 기억해야 할 한국 여성입니다.

기획/구성: 임찬종, 그래픽: 박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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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뉴미디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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