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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뮤지컬 '컴포트우먼'의 작은 기적…그리고 미래

뉴욕에서 세계인 만나는 日위안부 만행의 역사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저지른 만행은 비교적 낱낱이 조명되고 진상이 규명돼왔다. 명백한 전쟁범죄 역사를 외면하고 부인하며, 정부차원의 왜곡 시도까지 하는 일본과 달리, 독일은 최고 지도자가 나서서 반성과 사죄를 거듭하는데는 제대로 된 역사교육, 민족적 양심과 자발적인 반성의 정서와 함께 넘쳐나는 증거와 사료, 그리고 세계 대중에 파고 든 많은 관련 대중문화, 예술 작품들이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1990년대 지구촌의 공분을 자아내며 아카데미상을 받기도 했던 영화 '쉰들러 리스트'는 그 좋은 예이다. 흥미로운 것은 미디어와 대중문화계에서 계속되는 유대인들의 연대적 성격의 영향력이다. 미국내 주요 방송사와 신문사의 대주주 상당수는 유대인으로 알려져있고 그만큼 주요 언론과 헐리우드 영화산업, 대중예술에 대한 유대인 커뮤니티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잊을만 하면 다시 2차대전의 참상과 나치의 만행에 대한 새 영화와 드라마가 나오는 것도 이런 영향력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느낌이다.




● 3년의 기획과 준비…한국인 연극학도의 열정

지난 해 겨울, 뉴욕 시티컬리지에서 연극을 공부한다는 20대 한국인 유학생이 강제 위안부를 소재로 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만든다고 했을 때 기자는 반신반의했었다. 성탄절이 가까운 12월 깊은 밤에 시작된 첫 대본연습을 촬영하러 갔었을 때야 오랜 준비가 차곡차곡 이뤄져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불과 24살인 김현준 씨는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을 타고 난 것 같았다. 현실적 어려움인 큰 장애물들을 하나씩 하나씩 극복해나갔고 12개 나라 출신의 50명 가까운 배우들, 전체 80명이 넘는 스태프들을 이끌어나갔다. 연습 모습을 취재하러 가보면 모두가 그를 미국식 애칭인 '디모'로 부르며 좋아했고 의견을 잘 따랐다. 나이를 불문하고 선의로 통하는 뉴욕의 친구도 많았다.

평가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뉴욕 공연계에서 많은 전문가들과 극장 관계자들이 그의 열정에 마음이 움직였고, 고비 때마다 선뜻 선물처럼 도움을 주었다. 연습장소와 상대적으로 싼 극장 대관료, 행운 같지만 알고보면 노력의 선물들인 이런 변수들이 물밑에서 이 작품을 도왔다. 배우 오디션은 16대 1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연기자도 신인이었지만 이들을 뽑는 제작진도 신세대들이었다. 경험과 노련함은 부족했지만 열정과 체력, 그리고 즐겁게 일하는 분위기가 강점이었다.

● 어려운 출연결정, 역사의 의미를 알았던 8명의 일본계 배우들

물론 어려움도 많았던 것 같다. 연출가 김씨는 인터뷰 때마다 조금씩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제작비는 턱없이 부족했다. 일부 미국인 자산가들이 투자금을 냈지만 오히려 한국 기업들의 반응은 딱딱했다. 미국내 일본기업들과의 비즈니스에 대한 부담이 작용했던 모양이다. 이번 공연에서 제작진과 배우들은 보수를 받지 않고 있다. 출연료를 거론할 수 있을 정도로 작품이 성공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내 일본 커뮤니티의 감시와 익명의 협박성 메일은 보이지 않는 부담과 지속적인 불안감을 줬다. 8명의 일본계 미국인 출연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이민 2세대로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은 뚜렷하지 않았지만 역시 출연 결정이 쉽지는 않았다. 개인들은 말을 안하지만 친구에게 절교선언을 당하거나 위안부를 소재로 한 작품 출연에 대한 비난을 겪어야 했다.

극중 악랄하고 영악한 위안부 모집책 코미노역을 연기한 에드워드 이케구치 씨(48)는 "출연은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지금은 행복합니다. 분명히 냉소적 눈총이 있었어요. 하지만 내 가족들은 저를 격려해줬습니다. 많은 친구들도 역사를 알게되면서 저를 이해했습니다. 일종의 힐링의 과정이었어요. 일본계 미국인 배우로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실제 일어났던 일이고 세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기 위한 예술작품이 여기 있다고요. 저는 극장을 찾은 관객들이 역사와 그 속에서 자신들의 삶을 위해 싸웠던 여성들의 용기를 느끼고 가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다국적의 배우들은 더 나아가 미국을 찾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 뉴욕 무대에서의 초연…기립박수

3년의 준비와 우여곡절을 거쳐 뉴욕 오프브로드웨이의 유서깊은 세인트클레멘츠 극장에서 '컴포트 우먼'은
마침내 막을 올렸다. 뉴욕 공연계에선 이름을 알리지 못한 신인 제작자와 작가들, 그리고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아시안계 신인 배우들의 대거 출연은 개성있는 작품을 중시하는 맨해튼 비평가들에겐 큰 관심의 대상이 됐다.

첫선을 보인 작품에는 일본이 부인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그대로 녹아있었다. 일본의 큰 설탕공장에 취업시켜준다는 말에 속는 소녀들, 돈을 벌어 가족들을 도울 수 있다는 소박한 꿈이 짓밟히는 과정, 일본군이 운영한 위안소의 실태, 그 아픈 역사를 모르는 미국과 세계인 관객들은 놀라고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공연이 끝나자 기립박수가 이어졌고, 제작진과 배우들은 마음의 눈물을 흘렸다.

뉴욕의 오프브로드웨이는 브로드웨이와는 달리 상업성보다는 예술성과 작품성을 갖춘 실험적 작품들이 많이 선보이는 무대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컴포트우먼'이 위안부를 소재로 다뤘다는 화제의 작품에 머무르기 보다는, 대중예술인 뮤지컬 자체로서 본고장인 뉴욕 무대에서 더 큰 성공을 이루기를 바란다. 그것이 위안부의 아픈 역사를 세계에 알리겠다는 연출진의 바람에도 더 크게 부합하기 때문이다.

뉴욕 무대의 많은 뮤지컬 작품들은 첫 선을 보인 뒤 큰 반응없이 사라져가기도 하고, 세계 공연계의 주목을 받으며 '롱런'하는 대작으로 성장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컴포트우먼'이 '오페라의 유령'이나 '미스 사이공', 혹은 '레미제라블'같은 브로드웨이의 주요 공연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담대한 희망이니 말이다.

컴포트우먼의 이번 오프브로드웨이 공연은 열흘 동안 모두 18번이 예정돼있다. 1, 2회분의 좌석은 사전 매진됐지만, 이 기간의 실적에 따라서 장기 공연과 다른 무대 진출의 활로를 열 수 있을 전망이다. 



 
● 갈 길은 아직도 멀다…꿈의 브로드웨이 무대로

지난 1일 첫 공연에서 '컴포트우먼'에 대한 감상을 마친 전문가들의 평가는 중요하다. 브로드웨이에서 공연 감독으로 오랜 경력을 가진 전문가 '베스 뉴버리' 씨의 말을 들어보자.

"컴포트우먼의 스토리가 사회적이고 충격적인 이슈를 조명하고 알린다는 것은 작품의 큰 장점입니다. 특히 주인공 여성의 시각에서 뿐 아니라 같은 시대의 (한국인) 남성들이 겪은 참상도 함께 보여주고 있어요. 전쟁에 나오고 싶지 않았지만 끌려온 징용자들의 심정도 그리고 있다는거죠." 소재와 스토리의 강점에 주목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베스 씨는 한편으론 컴포트우먼에 대한 날카로운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작품 속의 많은 음악들이 정말 좋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중간에 약간 전개가 느려지거나 건조해지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제 얘기는 작품이 더 좋아질 여지가 있다는 겁니다. 많은 변화를 줘야한다는 건데, 음악 쪽에서 극 진행의 분위기 고조와 완급 조절이 필요하고 장면과 무대 전환에서의 강렬함이 더 보완될 수 있습니다. 예리함과 적절한 음악 변화, 감정적 임팩트 등이 작품의 효과를 더 고조시킬 수 있다고 보는데 이번 첫 무대이고 이미 상당한 수준을 보여줬음을 감안하면 금세 보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아무도 예상못한 뉴욕 무대 공연을 이뤄낸 다국적 뮤지컬 '컴포트우먼'은 이미 작은 기적을 만들었다. 자신들의 전문가적 능력과 시각, 또 열정을 통해 역사상의 크나 큰 만행을 예술로 고발하고 나선 뉴욕의 젊은 예술학도들에게  한국의 기성인들은 이미 큰 빚을 지고 있다. 다국적 배우들과 제작진으로 국제 무대에 손색없는 진용을 갖춘 '컴포트우먼'의 잠재력에 뉴욕 공연계는 주목하고 있다.

다시 생각하면 한국은 세계를 주름잡는 글로벌 대기업들이 있고 또 국제 무대에서 이름을 날리는 예술인들도 상당하다. 한국의 '쉰들러리스트'를 만들어 내기 위해선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이들의 열정에 대한 뜨거운 성원과 전폭적인 지원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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