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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유승민이 지키지 못한 약속

[취재파일]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유승민이 지키지 못한 약속
● 우회적이지만 강렬한 항변을 담은 퇴임사

결국 마지막은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사퇴 발표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라며 직설적으로 공격을 시작한 지 13일, 만날 때마다 거취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묵묵부답으로 버텼던 시간이었습니다. 대통령에게 노여움을 푸시라며 반성문을 읽어 내려가며 90도로 인사도 해봤지만 허사였습니다. 친박계의 총궐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당 내분은 심각해졌고, 최고위원회는 욕설과 고성이 오가며, 대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리는 대형사고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어딜 가든 유 전 원내대표가 나타나면 분위기는 경직됐고, 사람들은 저 사람 얼마나 버틸까 수군거렸습니다. 그런 난장판을 보면서도 의원총회에서 임명된 자신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물러나는 게 유 원내대표는 납득이 안됐던 것 같습니다. 결국 물러나는 것도, 자신이 임명됐을 때와 마찬가지로 의원총회라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의원들이 사퇴를 원한다면 언제든 물러나겠다고 말했던 자신의 생각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국회 정론관에 선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지쳐보였습니다. 푸석한 얼굴에 퇴임사를 읽어 내려가는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하고 싶었던 얘기는 A4 한 장 반 분량의 퇴임사에 눌러 담았습니다. 퇴임사에 박근혜 대통령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자신에 대해 정치적인 파문 선고를 내린 대통령에 대해 우회적이지만 강렬한 항변을 담고 있었습니다.

유 전 원내대표가 퇴임사를 고심해서 작성하고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짐작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언어를 활용할지는 몰랐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법과 원칙, 정의라는 가치를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 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의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말은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법과 원칙, 정의가 바로 선 게 맞냐,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 맞냐는 반문으로 들립니다. 대통령이 원내대표를 직설적으로 공격한 이후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에 대해 유 전 원내대표는 민주주의의 위기라고 규정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짙은 회한 묻어나는 '지키지 못한 약속'

유 전 원내대표의 퇴임사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아쉬움을 강조한 부분입니다. 그는 당의 “변화와 혁신, 그리고 총선 승리를 약속하고 원내대표가 됐지만, 그 약속을 아직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로 가겠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고 언급했습니다. 고통 받는 국민의 편에 서서 용감한 개혁을 하겠다는 자신의 말을 이루지 못했다는 짙은 회한이 묻어나는 대목이었습니다.

● "중산층, 서민 지지 없으면 생명력 없다"…유승민의 정치철학은?

중도에서 진보진영을 아우르는 정치관을 가지고 있는 유승민 원내대표의 탄생은 새누리당 의원들의 위기감이 반영된 결과입니다. 나이 많은 영남 거주민으로 대표되는 새누리당 골수 지지층만으로는 다음 총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던 겁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경선 연설을 하면서 자신을 "총선 승리의 도구로 써 달라"고 의원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의원들은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유승민이라는 중도성향의 간판이 필요했고, 이 때문에 유 전 원내대표는 친박계가 지원한 이주영 의원을 꺾고 원내대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지난 5월 12일 취임 100일 기자 간담회에서 당을 어떻게 꾸려나가려고 했는지 비교적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새누리당이 고통 받는 중산층, 서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정당이 되지 않으면 앞으로 생명력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에서 어떤 노선과 정책 투쟁이 일어나더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겠다"고 강조했습니다. 가진 자들만 옹호하는 보수가 아니라, 약자 편에 서는 보수주의가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 철학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한 거였습니다.

이를 위해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가칭 총선정책기획단을 구성해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의 총선 공약을 선제적으로 내놓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정기국회나 내년 2월 국회에서 법안으로 제출해 통과시킬 수 있는 게 있으면 총선 전에라도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새누리당을 바꾸기 위한 작업을 적어도 정기국회부터는 본격적으로 시작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새누리당 내부에서 적지 않은 파열음을 일으켰을 것은 분명합니다. 지난 4월 유 전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대표 연설 직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생각에 대해 "아주 신선하지만, 당의 방침이 아니다"며 선을 그은바 있습니다. 결코 물러나지 않겠다고 말을 하기는 했지만, 당내 설득과정에서 자기 뜻을 얼마나 관철시킬 수 있을지도 미지숩니다. 국회법 파동이 없었다고 해도 노선 투쟁과정에서 또 다른 계파 갈등을 일으키며 큰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선거에 승리해 본 경험이 있는 정당입니다. 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당의 이름이나 색깔을 바꾸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실행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경제민주화같이 야당의 DNA를 갖고 있는 정책도 끌어오는 능력이 있습니다. 새누리당에 실망한 국민들이 많을수록, 총선 승리를 위해 새누리당은 변화를 위해 몸부림 칠 것이고,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주장하는 개혁 드라이브가 먹혀들어갈 가능성은 있었습니다.

● 현실정치에 나타나지 못한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

하지만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자신의 정치적인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날개가 꺾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번 사태의 시발점이 된 공무원연금개혁은 사실 유 전 대표 자신이 시작한 과제가 아니었습니다. 대통령의 숙원 사업이자 전임 이완구 원내대표가 국무총리가 되면서 인수인계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 전 원내대표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공무원연금개혁을 통과시켜야한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래야 박근혜 정부가 개혁의 성과를 남기게 된다고 판단했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야당이 요구한 국회법 개정안을 연계시켰습니다. 그 과정에서 청와대와 소통도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유 전 원내대표는 국회법을 연계 시키는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공무원연금개혁 개혁을 통과시키려고 판단했습니다. 자신의 정치를 하기 위해 전임자가 던져준 숙제를 빨리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겁니다.

총선정책기획단은 총선 전 새누리당의 체질을 바꿀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특공대 역할을 할 조직이었지만, 제대로 출범조차 못하고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을 배치할지, 어떤 정책을 발굴할지 계획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는 총선정책기획단을 통해 구체화될 수 있었지만, 결국 현실정치에 모습을 드러내지도 못했던 겁니다.
● 전국구 체급 갖게 된 ‘국회의원 유승민’의 행보는?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물러난 직후 새누리당은 계파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합의 추대 방식으로 차기 원내대표를 선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친박계가 안심할 수 있는 자기 색깔이 덜한 중립지대의 의원이 원내대표로 추대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됩니다. 청와대와의 관계는 이전보다 좋아지겠지만, 새누리당의 정책 성향이나 색깔은 기존 지지층이 생각하는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원내대표에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대구에 지역구를 가진 국회의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돌아왔습니다. 원내 부대표단을 거느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160명의 새누리당 의원 가운데 한명이 된 겁니다. 유 전 원내대표는 퇴임사에서 원내대표가 아니어도 더 절실한 마음으로 자신의 정치적 꿈을 이루기 위한 길로 계속 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그는 원내대표라는 직을 잃었지만, 본인이 의도했든 안했든 대구 골목대장에서 일약 전국구 체급을 가진 정치인이 된 건 분명해 보입니다. 앞으로 국회의원 유승민은 자신의 정치적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정치적인 행보를 이어갈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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