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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통령과 유승민,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의 관점에서 본 與 내홍 사태

[취재파일] 대통령과 유승민, '정의란 무엇인가'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의 재미난 사유실험을 소개합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입니다. 자신의 재산이 얼마인지, 무슨 인종인지, 성적 정체성은 어떤지, 종교가 뭔지, 정치적 신념은 어떤지 등 자신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이 사람들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입니다. 롤즈는 토론이 싱겁게 끝날 거라고 봤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자유와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 다만 덜 가진 사람에게 가능한 큰 혜택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 바로 두 가지 ‘정의의 원칙’에 합의할 거란 결론입니다.

일단 모두가 자유로워야 한다는 데 찬성하면서도, 내가 약자인지 강자인지 모르니 덜 가진 사람에게 큰 혜택을 주도록 보험을 들어놔야겠다는 생각에서겠죠.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모른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가정일 수 있습니다만, 사익에 따라, 권력에 따라 정의가 요동치는 요즘, 일단 이런 변수를 없앤 뒤 바닥부터 정의를 생각해보자는 철학적 고민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를 20세기 최고의 정치철학자로 꼽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좀 미시적으로 롤즈의 사유 실험을 적용해보죠. 자신의 사회적 지위는 물론, 지지 정당과 정치 성향을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정의에 부합하는 ‘정치적 행위’가 무엇인지 합의하기 위해 모였다고 칩시다. 어떤 결론 내리게 될까요. 정치적 행위에는 과정과 결과가 있습니다. 일단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절차를 따라야 한다는 것, 절차 정의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공익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 결과의 공공성입니다. 적어도 이 두 가지는 여당이든 야당이든, 진보든 보수든,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행위의 정의일 겁니다.

정의에 부합하는 ‘정치적 행위’, 이 관점에서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 요구를 해석해보죠. 일단 거슬러 올라가 보겠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을 두고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리고 그 국회법 개정안 합의를 이끌어 낸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해 ‘배신’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쉽게 말해, 사퇴하란 뜻이죠. 대통령이 여당의 원내대표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러 해석이 나왔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 철학과 선을 그었던 유승민 원내대표를 향해 대통령이 불쾌감을 표시한 거다, 결국 정책 노선 투쟁이다, 아니다, 대통령 세력, 이른바 ‘친박계’의 힘이 서서히 약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승민 원내대표로 상징되는 ‘비박계’의 힘을 위축시키겠다는 ‘대통령의 노림수’다, 쉽게 말해, 내년 총선을 앞두고 친박과 비박 간의 공천 싸움이다, 언론은 이런 배경을 설명하기 바쁩니다. 하지만, 이건 기술적인 분석에 불과합니다. 정의가 빠져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말한 두 가지 정의, 절차적 정의와 결과의 공공성의 관점에서 ‘유승민 사퇴 압박’이란 정치적 행위를 해석해 보죠. 여당 원내대표가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게 되면 당청 관계가 파국을 면치 못할 거란 주장이 있습니다. 틀린 말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은 곧 특정 개인의 의중이 권력 지형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정치적 환경을 전제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환경과 절차 정의의 관련성을 논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이 말한 대로 입법부와 행정부가 엄연히 분리돼 있는데, 행정부 수장의 눈 밖에 났다고 입법부 소속인 여당 원내 사령탑의 사퇴를 요구하는 정치적 행위가 과연 절차 정의에 부합하느냐는 거죠.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중이 중요합니다. 최고 권력의 의중에 따라 여당과 청와대가 파국을 맞을 수 있다는 의식 자체가 절차 정의에 부합하기 어렵습니다.

또 있습니다. 원내대표는 새누리당 국회의원들이 직접 투표로 선출됐습니다. 그럼 사퇴도, 의원들의 요구를 전제하는 게 ‘절차 정의’에 부합합니다. 설령, 유승민 원내대표가 비리 때문에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극단적 가정을 하더라도, 원내대표를 끌어 내리는 과정은 새누리당 의원들의 ‘합의’라는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 좌지우지될 게 아닙니다. 의원총회에서 부결되면, ‘대통령 탈당’이라는 위험부담이 따를 수 있다는 해석이 나와 피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는데, 대통령 탈당이 절차 정의보다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가끔 망각하곤 하지만, 대한민국은 절차 정의를 중시여기는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와 사회적 공익과의 상관관계도 따져봐야 합니다. 공익에 부합한다면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퇴해야 해야 합니다. 이건 유승민 원내대표 체제로 국민의 경제적 이익이 심하게 훼손됐거나, 민주주의에 심각한 위기가 초래됐다는 등의 현상이 전제돼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 공익의 관점에서 ‘사퇴로 이득이 된다.’라는 명제가 깨지는 거죠. 하지만,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회적 공익에 어떤 손해를 끼쳤는지는 계산이 잘 안 됩니다. 사회 공익의 차원에서도 원내대표 사퇴는 사회적 공익과는 무관한 것 같습니다.

정의의 관점에서 정치 행위를 바라본다는 발상 자체가 순진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우리 사회는 정치적 행위를 말할 때 정의와는 거리를 뒀습니다. 심지어 관용까지 베풀어줬습니다. 말 그대로 ‘정치적 행위’여서 그랬습니다. A와 B가 권력 투쟁을 벌일 때, A가 제갈량 같은 지략으로 B를 무너뜨리면, 우리는 A를 정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며 추켜세웠습니다. A가 기술적으로 뛰어날지는 모르지만, 사회 정의와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는 데 말이죠. 결국, 이런 분석의 틀은 정의를 망각시키고, 심지어 정무적 승리를 정의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데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행위를 기술이 아닌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언론이라고 다를까요. 수많은 언론은 유승민 원내대표의 거취 문제를 기술적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정치는 정의가 아니라 기술이란 걸, 기자들은 매일같이 열공하며 기사를 생산합니다. 그간 ‘잽’을 날린 유승민, 갑자기 ‘어퍼컷’을 날린 대통령, 과연 유승민은 KO패를 당할 것인가 복싱처럼 중계하고, 여론 역시 이를 스포츠처럼 소비하고 있습니다.

언론은 정치적 행위에 대해 국민들이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판단의 준거를 제시해야 하지만, 다들 대통령의 ‘속내’와 유승민의 ‘셈법’을 파헤치는 데 혈안입니다. 여기서 다시 되묻습니다. 어떤 정치적 행위라 옳은 것인가, 혹은 정의에 부합하는가. 유감스럽게도 언론은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지금 같아선, 언론이 좀 더 고지식해져도 될 것 같습니다. 뭐가 옳은 것인지 과감히 말해줘도 될 것 같습니다. 정치적 행위는 ‘속내’ 보다는 ‘정의’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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