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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정치인 커밍아웃한 박원순 시장

[취재파일] 정치인 커밍아웃한 박원순 시장
7월 1일 박원순 시장이 민선 6기 취임 1년의 소회를 밝히는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사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심정이었는데, 무슨 얘기를 할까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미리 배포된 회견문을 읽고 보니, 문득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제 가까이에 서 있던 박 시장 최측근 인사에게 물었습니다.

기자 "오늘 전반적인 회견문 내용은 누가 조언한 겁니까?"
측근 "많은 사람들이..두루두루 조언했습니다. 두루두루."
기자 "오늘 회견으로 바라는 목표가 뭔가요?"
측근 "(웃으며) 아니 그게 뭐..ㅎㅎ"
기자 "박 시장이 오늘 정치인으로 공식선언하는 것 같네요."
측근 "아이구...참.. 잘 좀 부탁합니다."

무슨 대화 내용이 이렇느냐 싶겠지만, 박 시장의 회견문을 읽고 난 뒤 제게 우선 드는 생각이 "이제 박 시장이 정치인이 됐구나"라는 점이었습니다.

박 시장의 회견문을 다시 한번 읽어봤습니다. 제목부터가 "이제는 민생입니다, 경제입니다"더군요. 메르스 사태에 대한 대처로 시작해서 이로 인해 서민들이 피해가 심각하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서울시장이 서민들의 민생 회복에 앞장서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빚을 내서라도..', '시장이 앞장서서..',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자신이 민생 챙기기에 앞장서겠다는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서울시장 임기 1년에 대한 소회라기보다는 어디(?)라도 나가기 전 출사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민생과 경제를 강조하는 표현들이 회견문의 의도를 더 읽어달라고 요구하는 듯 보였습니다.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민생 챙기기 회견문이 어째서 오늘따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걸까요? 그 이유는 바로 기자 회견을 한 절묘한 타이밍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정치권은 말 그대로 정치의 시대입니다. 청와대와 여당은 헌정 사상 처음보는 구경거리를 주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과반 여당 지도부와의 살벌한 정치게임은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보기 쉽지 않을 일임이 분명합니다. 야당 지켜보는 것도 재미나긴 마찬가지입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직 인선을 두고, 계파간 갈 데까지 가보자고 맞섰던 게 잠시 묻혔을 뿐입니다. 정치권의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특히 메르스라는 듣도보도 못한 공포를 체험하고 있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그냥 속상한 일이라고 표현한다면 제가 점잖은 걸까요? 둔감한 걸까요?
 
박원순 시장의 임기 1년 회견은 바로 이 틈바구니를 노린 게 분명해 보입니다. 정치권이 정치 게임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민생과 경제를 강조하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지금 상황에선 당연한 걸로 느껴지지 않는.. 이런 비정상의 정상화를 노린 박 시장(또는 측근들)의 정무적인 감각이 발휘된 걸로 보입니다.

바로 이 점이 박 시장의 정치인 커밍아웃을 확신하게 한 가장 큰 이유입니다. 몇 달 전 서울시장 가회동 새 공관을 방문한 자리에서 박 시장이 이런 얘기를 한 게 기억납니다. "스스로 정체성을 평가해 볼 때 민선 5기 시장 재임시절에는 시민운동가와 행정가가 섞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민선 6기에 들어와서는 이제서야 행정가와 정치인의 중간쯤 정도는 된 것 같습니다." 박 시장의 이 말을 기억하고 있는 저로서는 이제 박 시장은 또 한번 자신을 탈바꿈했다고 확신하게 됐습니다.

사실 정치인으로서 박 시장의 활동은 메르스 사태로 인한 심야 긴급기자회견부터 이미 작심하고 드러냈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메르스 사태에 대처하는 정부 대처의 지지부진과 커져가는 국민들의 불안감 속에 중앙정부와 맞서며 '내 소신대로'를 외치고, 이로 인해 득이냐, 실이냐는 면밀히 계산한 것은 이미 전형적인 정치인의 모습을 맘껏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물론 득이냐 실이냐를 면밀히 계산하는 모습을 보여준 건 박 시장이 아닌 측근들의 모습입니다). 임기 1년 기자 회견은 단지 이런 박 시장의 의중을 확실히 선언한 자리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제 박 시장은 누가 뭐래도 정치인입니다. 세상 일이 앞으로 어찌 될지야 알 수 없지만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더 큰 꿈을 꾸겠지요. 그만큼 세상이 박 시장에게 요구하는 정치적 책임감의 크기도 더 커질 것입니다. 행정가로서의 방패로 버텨왔던 수많은 책임들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겁니다. 정치 한복판에서 생사를 걸고 투쟁하는 정치인들에 비해 가만히 앉아서 누리는 아웃사이더 프리미엄(이건 그냥 제가 지어낸 말입니다)도 스스로 걷어내야겠죠. 앞으로 자신에게 던져지는 더욱 혹독한 요구에도 더욱 책임 있는 대처가 필요할 것이고, 우리 사회의 다양하고 민감한 현안에 대한 명확한 입장 정리도 필요할 것입니다. 박 시장이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앞으로 그 비중이 더 커져야 할 거라는 얘기입니다.

이미 정치인인 사람에게 이제와서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느냐는 핀잔도 많을 수 있지만, 제 눈엔 이번 만큼 정치적인 모습의 박원순 시장을 직접 본적이 없기에 몇 글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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