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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바리스타'가 '황장엽 킬러'로 둔갑한 사연은? ①

[취재파일] '바리스타'가 '황장엽 킬러'로 둔갑한 사연은? ①
한 50대 남성이 황장엽 씨 살해를 모의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습니다. 북한 정찰총국의 지령을 받은 국내 고정간첩에게 포섭돼 돈을 받고 활동을 해 왔다는 게 검찰의 공소장 내용입니다. 혐의는 국가보안법이 적용됐습니다. 이 남성은 억울함을 호소하며 검찰 수사 내내 진술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자신은 황장엽을 살해할 의도나 준비를 하지 않았다며 검찰 수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 남성은 검찰 수사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일까요? 박 씨의 변호인을 통해 확보한 자료와 전언을 토대로 박 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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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질 받던 부끄러운 인생이었지만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꿈이 생겼습니다. 남은 여생은 '바리스타'로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커피향과 뜨거운 증기가 뒤덮인 연습실이 행복했습니다. 늦은 나이지만 노력과 열정이 배반하지 않는다는 교훈도 얻었습니다. 재작년 11월 '2급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냈습니다. 이제 손주들에게도 용돈을 쥐어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국정원 직원 20여 명이 갑자기 연습실로 들이닥쳤습니다. 혐의는 황장엽 암살시도였습니다. 저는 북한의 지령을 받은 '킬러'로 지목됐습니다.

사단은 지난 2009년 어느 날 친구에게 문득 전화가 걸려오면서 시작됐습니다.

"여보세요?"
"일 하나 할래?"


돈에 쪼들리고 있던 제게 아르바이트를 제안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일?"
"아는 사람이 해결사를 소개시켜 달라는데… 하하. 내 주변에 해결사가 너 말고 또 누가 있냐?"


하지만 저는 해결사라기보다 전문 사기꾼이었습니다. 취업을 시켜주겠다는 제안은 좋은 미끼였습니다. 화술이 나쁘지 않았는지 제 주변에 국회의원들과 대학 총장들이 있다고 얘기하면 다들 쉽게 믿어줬습니다. 아니 빠져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취업을 부탁해보겠다며 활동비를 요구했습니다. 별 의심없이 9천만 원이 제 손에 쥐어졌습니다. 굳이 힘들게 살지 않아도 전 큰 돈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취업을 부탁했던 사람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어디론가 멀리 도망갔어야 했는데 때를 놓쳤습니다. 9천만 원의 활동비를 도로 갚아야 했지만 저겐 빚만 남았습니다. 결국 2010년 어느 날 사기 혐의로 고소당했습니다. 9천만 원 외에도 주변 지인들에게 이런저런 핑례로 빌린 1억 5천만 원 남짓한 빚이 저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걸려오는 빚독촉 전화가 숨이 막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당장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 일단 한 번 만나볼게."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살아왔습니다. 떳떳한 직업을 갖고 착실하게 살아온 적은 없었습니다. 말솜씨로로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돈을 빌렸습니다. 괜찮은 땅이 있다며 기획부동산을 차려 투자금도 받아봤습니다. 운전면허증을 발급 받아주겠다고 속여 사람들의 주머니를 여는 게 어렵지 않았습니다. 굳이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입에 풀칠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자주하다보니 습관이 됐고 습관이 반복되다보니 관행이 됐습니다. 남의 돈으로 살다보니 굳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끝은 감옥이었습니다. 바보같은 인생은 몇 번이나 반복됐습니다. 22년 동안 사기 횡령 혐의로 별은 6개로 불었습니다.

감옥은 끔찍했습니다. 감옥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전입순서와 별의 개수에 따라 서열이 매겨졌습니다. 강력범도 아닌 전 그저 늙은 쫄다구였습니다. 감방 안에 군기는 그래도 버틸 수 있었습니다. 구린내와 협소한 공간도 어느새 익숙해 졌습니다. 세상과의 단절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추위입니다. 겨울철 난방은 호화로운 망상입니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 교도관은 페트병에 더운물을 담아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페트병을 안고 잠을 청했습니다. 물이 식으면 잠에서 깼습니다. 잠이 오게 해달라며 기도했습니다. 누워있었지만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아침이 밝았습니다. 온 몸은 굳어 있었습니다. 다시는... 다시는 그런 감옥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난 김 모 씨...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했습니다. 대화는 길지 않았습니다. 짧고 명료했지만 뜬금 없는 얘기였습니다.
황장엽_640
"황장엽 씨 어디 사는지 집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채권추심을 해달라는... 아내의 불륜을 찾아달라는 부탁일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황장엽이라니... 황장엽...머릿속을 되뇌었습니다. 정확하게 무슨 일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TV에서 많이 봤습니다. 남한으로 망명한 북한의 고위급 인사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비행기에서 만세를 외치던 모습도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 황장엽 씨의 이름이 나올 필요는 없어보였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해결사가 필요하다는 제안을 했을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얼굴과 눈빛을 이리저리 살폈습니다. 뭔가 제정신이 아닌 듯 싶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본능적으로 느낌이 왔습니다. '호구다...' 갑자기 온 몸에서 잊고 있었던 근성이 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이런 초식은 처음이었습니다. 뜯어먹기 제격이다 싶었습니다. 감옥에서 고생했던 오랜 시간을 한 순간에 보상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교도소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이 호구라면 그럴 일도 없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미끼를 물지 간을 보고 싶었습니다. 다음에 다시 만나기로 했습니다.
황장엽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황장엽 씨의 주소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긴 북한의 고위급 인사출신이라 언뜻 국가정보원이 관리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뭔가 미끼는 필요했습니다. 호구를 속이려면 뭔가 대단해 보이는 자료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황장엽 씨를 가끔 방송에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황장엽씨의 방송 스케줄표라도 찾아서 주기로 했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았다는 걸 들키면 해결사처럼 보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인쇄한 종이에서 홈페이지 주소가 적힌 밑부분을 가위로 오렸습니다. 방송일정표에 이것저것 그럴싸한 메모를 적었습니다. 난 해결사였습니다.

김 씨를 만나 황장엽 씨의 방송 일정표를 건넸습니다. 상대에게 내가 아마추어라는 걸 들키면 안 됩니다. 목을 뒤로 젖히고 양 팔을 의자 뒤로 제쳤습니다. 유심히 일정표를 쳐다보던 김 씨가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봤습니다.

"이거 인터넷에 나오는 거잖아요?"

눈치챈 걸 보니 완전히 상태가 이상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상대를 얕봤구나.'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습니다. 그래도 티를 내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강하게 나가기로 했습니다. 난 해결사니까요. 눈을 치켜뜨며 낮은 목소리로 여유롭고 근엄하게 다시 물었습니다.

"뭘 원하시는 거요?"

김 씨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황장엽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소?"

섬뜩한 제안이었습니다. 눈빛에서 뭔지 모를 갈증을 느꼈습니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면 간첩입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김 씨가 말했습니다.

"비용은 지불하겠소. 방법이 없겠소?"
".... 다음에 다시 상의합시다."


머릿속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했습니다. 일단 서둘러 자리를 피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2편에 계속) 

▶ [취재파일] '바리스타'가 '황장엽 킬러'로 둔갑한 사연은? ③
▶ [취재파일] '바리스타'가 '황장엽 킬러'로 둔갑한 사연은? ②
▶ [취재파일] '바리스타'가 '황장엽 킬러'로 둔갑한 사연은?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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