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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지옥행진'속 병자들 살린 '한국전 나이팅게일'

안의∼서울∼평양 270마일 지옥 행진…소달구지 태우고 부축하며 행군 도와

'죽음의 지옥행진'속 병자들 살린 '한국전 나이팅게일'
"더이상 걷지 못하는 병사는 그 자리에서 총살당해 길가에 그대로 버려졌습니다"

한국전에 참전한 뒤 미 육군 중사로 예편한 에드워드 핼콤(84)씨.

그는 한국전에 참전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의회가 수훈십자훈장 수여를 추진 중입니다.

핼콤 씨는 6.25 기념행사를 앞두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포로로서 겪었던 '죽음의 행진' 참상을 언론에 밝혔습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수세에 몰렸던 북한군이 미군포로 수백 명을 서울에서 평양까지 120마일을 강제 이송하던 과정은 '생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오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던 미군 병사들은 물과 음식을 거의 제공받지 못한 채 며칠을 강행군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대로 걷을 수 없는 병사들은 그대로 버려지거나 총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서울 수용소를 출발할 때 376명에 달했던 미군 포로들은 수일 만에 80명이나 줄어 평양에 도착했을 때에는 296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인명 손실을 줄어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선임 위생병이었던 핼콤 씨의 헌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부상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환자들이 행군과정을 버티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북한군 지휘관을 찾아갔습니다.

소달구지 몇대로 환자들을 별도로 태우고 갈테니 허가해달라고 '간청'했고 간신히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소달구지에 타지 못한 부상병들은 핼콤 씨를 비롯한 위생병들이 옆에서 부축하면서 행군을 도왔습니다.

핼콤 씨는 "병자들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고, 우리는 죽기 살기로 서로를 도왔다"며 "당시 걷지못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핼콤 씨는 이미 서울-평양간 행진(120마일) 못지않은 '죽음의 행진'을 경험했습니다.

경남 함양 안의군에서 서울까지 무려 150마일을 강행군했던 것입니다.

오키나와 기지내 종합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핼콤 씨가 한국전에 참전한 것은 전쟁 발발후 한달 쯤 뒤인 1950년 7월26일이었습니다.

미 육군 29 보병연대 1대대 2중대 소속 선임 위생병으로 파병된 것이었습니다.

바로 당일 저녁 남진 중이던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던 안의 군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나 논과 밭 사이에 매복 중이던 북한군들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았고, 핼콤 씨가 속한 부대는 사실상 '전멸'하다시피 했습니다.

전체 235명 가운데 10분의 1인 24명만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것이었습니다.

전쟁포로가 된 핼콤 씨에게 북한병사들이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군화였습니다.

질 좋은 새 군화를 빼앗기고 대신 받은 것은 북한병사들의 작고 낡은 군화였습니다.

핼콤 씨는 "도저히 발이 맞지가 않았다"며 "어쩔 수 없이 신발의 앞부분을 잘라내야 했고 발톱이 신발 밖으로 튀어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이후 서울을 향한 지옥 행군이 시작됐습니다.

미군 포로들은 이동과정에서 아침과 저녁 두차례에 걸쳐 단 두개의 주먹밥만을 얻어먹을 수 있었습니다.

물 한모금 조차 얻어먹기 어려웠습니다.

북한군에게 음식을 더 달라고 요구하자 "우리도 먹을게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서울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핼콤 씨는 가장 먼저 9명의 위생병과 함께 병동을 지었습니다.

행군과정에서 부상을 입거나 병약해진 동료병사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감염우려가 매우 높은 상황에서도 한차례도 병상을 떠나지 않고 환자들을 돌봤습니다.

핼콤 씨는 "아프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게 내 소명이었다"며 "그냥 제 할일을 했을 뿐이었다"고 몸을 낮췄습니다.

평양으로 강제 이송되는 과정에서 소달구지라도 태워 환자들을 데려가겠다고 나선 것은 핼콤 씨의 남다른 '박애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포로 대부분이 평양으로 향한 뒤에도 며칠 더 남아 남겨진 환자들을 마지막까지 돌보다 함께 행진에 나섰습니다.

평양 수용소에 도착한 뒤 핼콤 씨는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묻는 매장 특무대에 배속됐습니다.

북한군은 수용소에서 1마일 떨어진 기독교 마을 묘지에 매장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매장 작업을 벌이던 핼콤 씨는 북한 주민들로부터 같은해 10월20일 유엔군이 평양에 진주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수용소로 돌아온 핼콤 씨는 북한군이 평양의 미군 포로들을 만주로 이동시킬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아챘습니다.

동료 4명과 함께 탈출 모의를 한 핼콤 씨는 기차역으로 향하던 포로 대오에서 갑자기 이탈해 건물 사이의 좁은 통로로 뛰어들었습니다.

벽에 바짝 붙어 은신해있던 핼콤 씨 일행은 다행히도 밤이었기에 북한군에 적발되지 않았습니다.

핼콤 씨는 "대오가 지나가고 난 뒤 통로를 나와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다"고 긴박했던 당시 상황을 회고했습니다.

핼콤 씨 일행이 당도한 곳은 평양 교외의 버려진 민가였습니다.

그곳에서 5일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두 항아리에 가득찬 물과 밀가루, 깨 때문이었습니다.

10월20일 평양으로 올라온 한국군의 깃발은 핼콤 씨 일행에게 구원의 신호였습니다.

그러나 핼콤 씨의 마음에는 당시 동료병사들을 남겨두고 탈출했던 것이 무거운 납덩이처럼 남아있습니다.

당시 기차역으로 향했던 미군 포로 180여 명은 5일간 이동해 평북 순천터널에 도착했습니다.

북한군은 음식을 줄 것처럼 속여 포로들을 터널로 집어넣은 뒤 무차별 사격을 가했습니다.

죽은 척하고 있던 극소수만이 생존했을 뿐이었습니다.

이 같은 대량학살은 전쟁이 끝난 뒤 1954년 미국 상원의 조사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핼콤 씨는 "자유를 찾고 살아남았으며 번영을 이룩한 것을 우리 모두가 축하해야 한다"며 "한국이 자유사회와 경제번역을 이룬 것이 한국전쟁의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라고 말했습니다. 

(SBS 뉴미디어부/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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