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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조선왕조실록, 만화도 실록도 더 정확하게, 더 읽기 쉽게

[취재파일] 조선왕조실록, 만화도 실록도 더 정확하게, 더 읽기 쉽게
● '점 찍은 정종'

"2013년 스무 권 완간이 되자마자, 개정판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이 완간 2년 만에 새옷을 입었다. 아니 '옷'만 갈아입은 게 아니라 '내용물'도 바뀌었다. 중종실록을 예로 들면, 이런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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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왼쪽)과 개정판(오른쪽)에서 달라진 점을 발견하신 분? 중종의 미간에 점이 찍혔다. '점 하나 찍고' 다른 사람이 된 '아내의 유혹' 민소희가 아니라, '점 하나 찍은' 중종이다. 선조실록을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중종의 생전 모습을 회고하는 신하들의 진술이 실렸는데, 그 내용이 '얼굴은 갸름하고 수염은 자색으로 숱이 없었으며 네모나고 약간 굽은 턱에 양 눈 사이에는 검은 사마귀가 있었다'고 돼 있었기 때문이다. 박 화백의 표현을 빌자면 "곧 죽을 것처럼" 병약하게 그렸던 중종을, 이번 개정판에서는 "체부가 왕성했다"는 실록의 표현에 따라 병약한 모습을 없앴다고 한다.
 
지난해 영화 '명량' 개봉으로 더욱 주목받았고, 또 박 화백이 세종과 함께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로 꼽는 '이순신'이 등장하는 '선조실록'도 곳곳을 손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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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에서는 달라진 점을 찾으셨는지 궁금하다. 얼핏 보면 똑같아 보이지만, 거북선의 용머리 부분을 살펴보면 '아하' 하실 게다. 원래는 용머리가 밖으로 굽어져 있는 형태였는데, 이러면 화표를 쏘기 어렵다는 독자들의 지적을 받았고, 개정판에서는 굽어지지 않고 직선으로 연결된 형태로 바뀌었다.

이렇게 '그림'이 바뀐 부분도 있고, '설명'이 바뀐 부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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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포에 뒤이은 조선 수군의 공격은 더 두껍고 튼튼한 판옥선을 이용한 충돌공격' 이라는 기존 표현이 개정판에서는 사라졌다. 조선 수군은 '충돌 공격'보다는 '화포'가 주력이었다는 지적을 수용한 결과다.

이 밖에도 '행주산성'을 돌성에서 '토성'으로 바꿔 그린 것이나, 폐비 윤 씨의 나이를 스물일곱에서 열아홉으로 수정한 것 등 220군데 정도가 바뀌었다.

● "추가 개정, 열려 있다"

세상엔 '열 교과서 못지 않은 책'들이 많다. 소설 중에선 조정래 선생의 작품이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역사책 중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수업시간에 배울 땐 헷갈리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내용이 술술 읽히고 명쾌하게 이해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으니 말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그래서 초중고 학생들도 많이 읽는다. 지난 5월까지 팔린 250만부는 성인독자들만의 힘으로 이뤄진 것 아닐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번 개정판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각 왕의 즉위~사망 시기에 해당하는 서양사가 함께 정리돼 있다는 점이다.

"시, 소설 같은 문학과 달리, 역사 스테디셀러는 새로운 사실이 계속 확인되고 발굴되기 때문에 수정해 나가는 것이 출판인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휴머니스트 김학원 대표의 설명이다.

"추가 개정판도 언제든 다시 나올 수 있다"고 박시백 선생은 말한다. 개정판이 나온다는 소식에 '표지만 좀 바꾸고 값만 올리는 것 아닌가' 우려했는데, 값은 그대로이고, 내용은 더 충실해졌다. 이런 개정판이라면 '환영'이다.

10년에 걸쳐 스무 권을 완간하고 났는데, 바로 개정판을 준비하는 건 박시백 화백에게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개정판 작업의 시작은 '연표' 정리였는데, 당초 집필을 위해 박화백이 정리했던 노트가 120권, 이 내용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추려서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노트에 손으로 흘려 쓴 내용을 되살리는 건, 일일이 다시 실록을 대조하는 복잡한 작업이었다. 작업 후반부에는 '이게 과연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까' 의문도 들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흐름'이 잡혔으면 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마쳤다고 한다.

● 오리지널 '조선왕조실록'도 재번역 중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같은 2차 저작물이 나올 수 있는 건,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번역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박시백 선생이 만화 조선왕조실록 작업을 시작한 것 역시, 당시엔 유료로 판매되던 조선왕조실록 번역 CD를 40만 원에 구입하면서부터였다. 조선왕조실록 원문은 4770만 자에 이른다. 한자에 어두운 요즘 세대가 이걸 그냥 읽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1차 번역은 1968년부터 26년 동안 이뤄졌고, 이 자료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바로 가기)에서 원문과 번역문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틀린 내용이 숱하게 지적돼 왔고, 말투도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것 투성이다. 이 때문에 지난 2011년부터 한국고전번역원이 재번역 사업을 진행중이다. 한 부분만 살펴보자.

<기존 번역> "급등에 납책하며, 이 몸으로 대신하기를 빌었지만, 효과를 보게 되지 못하였고, 옥궤에서 명이 내리며 영원히 수염을 움켜쥐는 슬픔을 안게 되었다. (정조 즉위년 3월 10일)

<재번역> 종묘와 사직에 병이 나으시기를 기원하였으나1) 대신 죽겠다는 기원이 효과를 보지 못하였고, 옥궤에 기대에 유명을 내리시니2) 승하하시는 비통함을 영원히 품게 되었다.

1) 종묘와…기원하였으나 : 영조의 병세가 악화되자, 당시 왕세손이던 정조가 "종묘와 사직, 명산,대천에 기도하는 일을 속히 거행하라"고 명하였던 것을 가리킨다.<영조실록 52년 3월 3일>

2) 옥궤에..내리시니: 영조의 환후가 위급하여 왕세손과 대신 등이 입시하여 고명을 받은 것을 말한다. <국조오례의>에 "상(上)의 환후가 위급하면 사정전에 악장과 보의를 설치한다…악장 안으로 나아가 궤에 기대게 하고, 왕세자는 곁에서 보신다. 상이 재집대신과 근시를 불러 보고 고명을 발하면 왕세자와 대신 등이 함께 고명을 받는다" 하였다.


원문을 그대로 한글로 읽은 듯한 기존 번역과 달리, 재번역은 비교적 쉬운 우리말로 풀어 쓰고, 배경 설명을 위해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 정조 실록의 경우, 재번역을 위해서는 원본 뿐 아니라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같은 다른 기록물을 봐야 하고,(북한의 번역본인 '이조실록'과도 비교한다) 다른 왕조의 경우에도 하나의 표현을 풀어내기 위해 몇 십년 전의 기록을 들춰보고 다른 왕의 기록을 참조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해, 속도는 매우 느리다.

고전번역원 정영미 실록팀장은 "실록 원문 한 면에 450자 정도 되는데, 번역하는 건 하루에 한 장 정도이고, 한 장을 못하는 날도 있다"고 설명한다. 번역자 개개인의 오류를 막기 위해 3~4명이 조를 이뤄 공동으로 번역하고 자문과 평가도 거치게 된다. 용어의 통일을 위해 어휘집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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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에서 궁금하실 테다. 실록 번역은 어떤 사람들이 하게 될까? 한문학과 졸업생? 사학 전공자? 고전번역원의 '번역위원' 선발 시험을 통과해야 하고, 그 뒤로도 6년 정도의 연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시험은 1년에 한 번인데 뽑는 인원은 적게는 2~3명, 많아도 10명을 넘지 못한다. 일부러 적게 뽑는 게 아니라, 한문과 역사에 모두 능한 인력을 찾는 게 쉽지 않아서라고 한다. 이렇다보니, 현재 조선왕조실록 재번역에 투입된 인원은 16명. 작업 속도가 느릴 수 밖에 없어서, 전체의 7% 정도밖에 마치지 못했다. 고전 번역원이 '사람이 아쉽다'고 말하는 이유다.

사극 드라마도, 영화도, 조선왕조실록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부터 젊은층 사이에 큰 인기인 '조선왕조실톡'( ▶ 조선왕조실'톡' 재치 톡톡…카톡 창작 뜬다)을 만드는 작가 '무적핑크' 역시, 조선왕조실록 번역본을 보고 작업한다. 실록이 재번역을 통해 더 정확해지고 읽기 쉬워지는 건, 단순히 역사 전공자들 뿐 아니라, 드라마 시청자이자 영화 관람객이자, 책의 독자인 우리 모두에게 기다려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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