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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엘리엇은 장기전을 염두에 뒀나?

[취재파일] 엘리엇은 장기전을 염두에 뒀나?
“엘리엇 매니지먼트는 단기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기자본일 뿐이다. ‘먹튀’할 게 분명하다” 엘리엇 측이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한 4일, 삼성그룹 관계자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관계자가 언급한 ‘단기’가 어느 정도의 기간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단기’와 ‘시세차익’, ‘투기자본’, ‘먹튀’라는 단어의 조합은 해외 자본에 대한 국민의 감정線을 겨냥한 것임은 분명했다.

1. 엘리엇은 삼성과 끝까지 붙은 적이 있다

삼성전자는 지난 1997년 신규 발행된 우선주를 10년 후 보통주로 전환할 수 있게 정관을 변경했다. 그러다 2002년 이 정관을 주주총회에서 삭제했다. 우선주를 매집한 엘리엇 어소시에이츠의 자회사 맨체스터 시큐리티즈는 이에 반발해 소송을 냈다. 법원은 “정관변경은 우선주주로 구성된 주총 결의가 있어야 효력을 발휘한다”며 엘리엇 측의 손을 들어줬다. 2심과 3심에서도 엘리엇 측이 이겼다.

하지만 실익은 없는 소송이었다. 삼성전자는 1997년 이후 우선주를 발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송에서 이겼지만 삼성전자가 ‘향후’ 발행할 우선주에 대해서만 보통주 전환 권리가 부여될 터였다. 1997년 이전에 발행된 우선주를 보유 중이던 엘리엇 측은 그래도 끝까지 삼성과 붙었다. 물론 재판 과정에서 자신들의 우선주를 보통주 가격에 매입해 달라는, 즉 비싸게 사 달라는 일종의 ‘그린 메일’ 시도가 있었다는 삼성 측의 주장이 있었다.

이번에도 엘리엇 측의 행보는 장기전을 염두에 둔 것처럼 보인다. 삼성물산 지분을 4.95%에서  7.12%로 늘렸다는 공시를 하면서 국내 홍보대행사를 통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조건의 부당성을 강조했다. 이후 삼성물산에 현물 배당을 할 수 있도록 정관을 개정하자는 제안서를 보냈다. 이어 국민연금과 삼성 계열사 등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합병 조건의 부당함을 강조하며 자신들과 공동 보조를 취하자는 요지의 서한을 보냈다. 시나리오에 따른 행동이 아닐 수 없다.

2. 엘리엇은 헤르메스의 전철은 피할 것이다

삼성물산은 2004년에도 외국 펀드의 공격을 받은 적이 있다. 주인공은 영국의 헤르메스 펀드. 헤르메스는 2004년 3월 삼성물산 주식 5%를 매입했다고 밝혔다.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 삼성생명(4.8%)보다 지분율이 높았다.

헤르메스는 주식 취득목적을 ‘투자 목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삼성물산 측에 보유 중인 삼성전자 지분 매각과 삼성물산 우선주 소각 매입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해 12월 헤르메스는 삼성물산의 지분 전량을 처분해서 시세차익을 거뒀다. 그런데 그 직전인 11월 M&A(인수합병) 가능성을 국내 언론을 통해 흘린 게 문제가 됐다. 이 행위에 대해 금융감독원이 헤르메스를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주가조작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원까지 갔지만 헤르메스의 무죄로 사법적 판단은 끝났다.

엘리엇은 삼성물산 주식 취득목적을 ‘경영 참여’라고 명시했다. 이미 삼성물산에 주주제안을 발송했고, 다른 주주들에게도 서한을 보냈다. 주주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이미 분명히 하고 있다.

엘리엇의 지분 매입 공시 이후 한껏 가격이 오른 삼성물산 주식을 엘리엇이 갑자기 매도하는 경우는 가정하기 힘들다. 헤르메스처럼 허위 공시나 주가조작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데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아르헨티나 국채 투자 등 여러 사례에서 보여 준 것처럼 엘리엇은 투자이익 확보를 위해서는 수년 간의 장기 소송도 불사한다.
국민연금 캡쳐_64
3. 국민연금은 압박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비율 1대0.35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논란이 있었다. 제일모직 주가가 상장 이후 최고 수준에 달한 시점, 삼성물산의 주가는 연중 최저점에 달한 시점이 선택됐다. 자본시장법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삼성물산 주주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합병비율”이라는 게 대체적인 증권가의 평가였다.

주목되는 것은 삼성물산 지분 9.79%를 보유해 단일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행보다. 국민연금은 지난해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의결에 ‘기권’ 의사를 밝힌 뒤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해 두 회사의 합병 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가뜩이나 공적연금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높은 이 때, 국민연금이 수급자인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려는지, 특정 대기업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합병을 위해 국민 이익을 훼손하려는지 우리는 똑독히 지켜볼 것이다”라고 논평을 냈다. “국민 돈으로 재벌의 경영권 승계를 돕나?”라는 또 다른 국민의 감정線을 건드리고 있다.

시민단체인 경제개혁연대는 “현재 주주와 시장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의 시너지 효과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가지고 있다”며 “삼성물산의 최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역할 강화를 촉구한다”고 논평했다. 물론 명시적으로 합병에 반대하라는 주문은 아니다. “단순히 현재 주가와 주식매수청구권 행사 가격을 비교해 현재 주가가 높으면 합병에 찬성할 것이 아니라 합병비율이 정당한지, 합병에 따를 사업의 시너지 효과가 분명한지 삼성 측에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하라는 뜻”이라는 게 경제개혁연대 측의 설명이다.

국민연금은 다시 ‘해외 자본의 무자비한 수익 추구에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여론과 ‘재벌의 경영권 승계를 무비판적으로 용인하지 말고 지배구조 개선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론 사이에서 줄을 타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4. 원인도, 해결도 삼성의 몫

헤르메스의 공격도 마찬가지고, 엘리엇이 제기한 합병조건에 대한 불만도 시장에서 저평가된 삼성물산의 가치에 단초가 있다. 자신의 시가총액만한(어느 때는 그보다 훨씬 큰) 계열사 지분(삼성전자 주식이 대표적이다)이 거의 무수익 자산으로 존재하는데도 주주 가치를 올리려는 시도를 게을리 한 것이다. 가급적 저비용의 경영권 승계, 즉 유리한 합병비율을 위한 것이었는지, 순환출자 고리 상 어쩔 수 없는 측면이었는지 단언할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아니면 다른 이유든 그런 상태를 장기간 방치한 책임, 그래서 주주행동주의를 표방한 펀드의 개입을 초래한 책임은 오롯이 삼성의 몫이다.

지분 매입 후 엘리엇 측의 주주 제안과 서한 발송 등 일련의 움직임에 대한 삼성 측의 입장을 물었다. 답은 “양사 간 합병비율은 자본시장법 상의 규정에 따라 시장 평가(즉, 주가를)를 적용한 것으로 계획대로 합병 절차가 진행될 것이다. 이번 합병은 미래 장기적인 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며, 합병의 필요성과 효과를 국내외 IR을 통해 주주들에게 적극 설명하여 합병이 차질 없이 진행되도록 하겠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다시 내놓았다. 경영권 승계가 거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시장의 분석은 여전히 모른 척 하고 있다.

일각에서 제기된 우려가 무색할 정도로 삼성은 주주총회 표대결에서 손쉬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 하지만 엘리엇 측은 삼성의 기대와 달리 장기간 소액주주의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삼성을 귀찮게, 또는 곤혹스럽게 할 가능성도 있다. 더구나 이번 합병 문제는 경영권 승계의 핵심이라는 미묘한 이슈를 그것도 미묘한 시점에서 건드리고 있다. 주주, 시장과 소통하는 삼성의 방식이 변하지 않는한 언제든 제2의, 제3의 엘리엇에 삼성은 시달릴 수밖에 없다. 

▶ [취재파일] 엘리엇은 왜 삼성에 시비를 걸었나?
▶ 엘리엇 국민연금에 '합병조건 반대 동참 요구'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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