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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연극 '푸르른 날에'…예술이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는 방식

[취재파일] 연극 '푸르른 날에'…예술이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는 방식
2011년 초연 이후 5월 이맘때가 되면 잊지 않고 우리 곁을 찾아오는 연극이 있습니다. 원작 희곡은 2009년 제3회 차범석 희곡상을 수상했고, 2011년 무대에 처음 올려졌을 때에는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과 연출상 등 주요 상을 휩쓸며 이후 관객과 평단의 열렬한 사랑을 받아온 연극 '푸르른 날에'입니다.
연극 푸르른 날에

이 연극은 50대 중반이 된 오민호와 윤정혜, 두 사람이 1980년 즈음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시작됩니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터지면서 운명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시민군과 함께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 붙잡힌 민호는 먼저 간 친구들에 대한 죄책감과 끔찍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을 겪고 삶을 포기하듯 지내다 결국 불가에 귀의합니다. 당시 민호의 아이를 가졌던 정혜는 홀로 키운 딸의 혼사를 앞두고 민호와 잠시 재회하게 되는데, 과거와 현재가 엇갈리며 이 둘의 30년 세월이 무대 위에 펼쳐집니다.

5.18 이후 극 중 인물들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어서, 보는 이들의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연극 푸르른 날에

원작은 정경진 작가에 의해 쓰여졌지만, 극은 고선웅 연출가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진지하고 무거운 원작은 연출자 자신이 '명랑한 신파'로 이름 붙인, 코믹하고 과장된 스타일로 각색됐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에너지가 넘치고, 관객이 극에 몰입해 무겁게 가라앉으려 하는 순간마다 코믹한 대사와 몸짓으로 그들의 등을 곧추세웁니다.
 
하지만 그런 코믹함과 과장됨이 어떤 관객에겐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부자연스럽게 희화화하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들이 들면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겁니다. 특히 극이 인간의 생존 혹은 존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극의 초반 제가 느꼈던 불편함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연극 푸르른 날에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선웅 연출의 그 독특한 스타일에 저는 꽤 잘 설득되고 말았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더라도 좋은 극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고선웅 스타일로 만들어낸 이 작품이 그 자체로 매우 매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제의 진정성은 놓치지 않으면서도 관객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다가가겠다는 의도는 성공적으로 달성된 듯 보입니다.
 
그렇다고 고통스러운 장면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주인공 민호 역할을 맡은 이명행 배우가 물고문을 당하며 긴 숨을 참을 때는, 그의 입에서 김남주 시인의 '진혼가'가 흘러나올 때는 순간순간 관객도 같이 숨을 죽이게 됩니다. 다만 노골적인 고통의 순간은 그렇게 날카롭게, 그러나 관객들이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짧게 지나갑니다.
 
연극 푸르른 날에

정경진 작가의 원작은 그 자신이 '광주민중항쟁의 와중 꿈과 사랑을 잃어버린 이들이 구도와 다도를 통해 지켜온 순애보'라고 표현한 것처럼 진지함과 순수함을 담고 있는 희곡입니다. 고선웅 연출가는 그런 희곡의 진지함을 경쾌함으로 뒤바꾸고 순수함을 독특한 개성으로 포장해내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슬픈 주제의 연극을 이토록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도록 만들었으니, 예술이 역사의 비극을 기억하고 개인의 상처를 보듬는 또 하나의 좋은 전형이 될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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