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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사방이 '삐거덕'…표류하는 문화융성

[취재파일] 사방이 '삐거덕'…표류하는 문화융성
극장이 아닌 거리에서 열린 서울연극제 폐막식. 연극인들은 문화예술위 관계자들을 업무방해혐의로 형사고소했다.
 

● '대학로'의 낯선 풍경

지난 18일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는 낯선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연극계의 가장 큰 연례행사 가운데 하나인 서울 연극제 폐막식이 극장이 아닌 야외에서 열린 것입니다. 30년 넘게 연극제가 열렸던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이 올해는 연극제 개막 하루 전 갑작스레 중대한 안전상 하자가 발견돼 수리에 들어간다며 극장을 폐쇄해 버려 서울 연극제는 서울 시내 곳곳의 극장을 급히 수배해 뿔뿔이 흩어져 공연을 겨우겨우 마무리하는 파행을 겪었습니다.

이렇다 보니 축제가 돼야 할 폐막식은 연극인들의 성토장으로 변질됐고, 아르코 예술극장 운영 책임을 맡고 있는 문체부 산하 문화예술위원회에 대한 날선 비판과 격한 구호가 터져 나왔습니다. 급기야는 지난 21일 연극계가 문화예술위원회와 산하 공연예술센터를 업무방해 혐의로 형사고소하면서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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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에서 날아온 파열음

이런 파열음은 연극계에서만 들려온 게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영화제 가운데 하나인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도 한국 영화계의 민낯을 보여주는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해마다 세계 영화인들의 관심 속에 열리던 '한국영화의 밤' 행사에 한국 최대의 영화제로 자리매김한 부산영화제 관계자들과 다른 영화인들이 대거 불참하는 사태가 빚어졌습니다.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벌어진 구조실패 논란을 다룬 다큐 '다이빙벨'에 대한 부산시와 집권 여당의 상영중단 압력 파문이 벌어진 데 이어 영화진흥위원회가 올해 20주년을 맞는 부산영화제에 대한 예산지원을 대폭 삭감하자 영화인들이 명백한 보복이라며 영진위가 주최하는 한국영화의 밤 행사를 보이콧하고 나선 것입니다.

이런 불협화음은 지난해부터 문화계 전반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습니다. 미술계에선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묘사로 논란이 됐던 홍성담 화백의 작품 '세월오월'이 광주 비엔날레 전시가 무산된 데 이어 독일 베를린 전시회를 위해 운송하려다 석연찮은 이유로 작품 운송이 취소되면서 홍성담 화백이 베를린 현지에서 그림을 다시 그려 전시하는 촌극이 벌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에 출판계에서는 이른 바 '종북' 논란 속에 강제출국까지 당했던 신은미의 저서는 명확한 기준없이 문체부가 선정했던 우수도서 지정이 취소돼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습니다. 연극과 영화, 미술과 출판까지 문화예술계 전반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터져나오자 현장의 문화계 인사들은 사태의 배경에 '뭔가 있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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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칸 영화제에서 열린 한국영화의 밤 행사. 부산영화제 관계자 등 많은 영화인이 영진위에 대한 항의표시로 행사에 불참했다.


● 정말 뭔가 있나(?)…문화계의 합리적 의심들

사실 연극계와 영화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초유의 논란은 이미 지난해부터 어느 정도 예견됐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연극계에서는 지난 해 11월 이번에 논란이 된 서울연극제를 위해 30여 년간 연극제가 열렸던 아르코 예술극장 대관을 신청했다가 문화예술위 산하 공연예술센터가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관을 거부하고 논란을 일으키는 등 이른 바 '싫은 티'를 팍팍 내왔다고 말합니다.

문화예술위원회 측은 지난해 말의 대관탈락 논란은 절차를 지키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고, 연극제를 하루 앞두고 벌어진 '극장폐쇄'도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안전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연극인들은 지난 해 벌어진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과 연대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정부정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등 각종 사회 현안에 대해 발언해 왔던 연극인들에 대한 치졸한 보복이자, 손보기 차원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고 있습니다.

영화계에서도 이미 지난해 부산영화제에 대한 외압 이후 영진위가 정치적으로 박근혜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작품에 대한 영화제 상영을 가로막고 사실상의 사전검열을 강화하는 등 영화인들의 표현자유를 심각히 침해해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들도 역시 영화인들의 비판적 사회 참여를 고깝게 여기던 보수 정부의 분풀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

문화예술위원회와 영화진흥위원회 등을 관장하고 있는 문화체육관광부는 외형적으로는 '산하단체를 지원만 할 뿐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산 배정권한을 틀어쥔 문체부가 일련의 논란에 아무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 문화계 인사는 아무도 없는 듯 합니다. 역으로 문화예술계 곳곳에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주무부처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 뒷짐만 지고 바라보는 게 더 어색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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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훈 영화진흥위원장 (왼) / 김동호 문화융성위원장 (오)

● 사석에 만난 정부 인사들…"'손본기' 맞다"

그런데 사석에서 만난 문체부의 몇몇 간부들은 이렇게 '뭔가 있지 않느냐'는 의심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털어 놨습니다. 지금은 물러난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재임 시절 문화예술계 내의 이른 바 '좌파'들에 대한 지원 끊기와 손보기를 수시로 지시하고 보고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문체부 고위관리도 김 전 실장이 전교조 문제와 역사 교과서 문제를 주요 국정과제로 거론하며 이른바 '좌파 척결'에 강력한 의지를 보여 왔다고 밝혔습니다. 김 전 실장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박근혜 정부 초기 '낙하산' 논란을 빚으며 임명된 문체부 산하 문화예술 관련 기관장들이 겉으로는 갖가지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권 차원의 '좌파 손보기' 연장선에서 문화예술계 곳곳에서 논란과 충돌,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가능케 하는 대목입니다.

어떤 정부 관계자는 아예 대놓고 '정부 예산 뭉텅이로 지원받는 문화예술계가 앞장서서 정부를 비판하는 게 말이 되느냐, 이참에 버릇을 고쳐놔야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결국 돈줄을 무기로 말 안 듣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의 목을 죄겠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국민의 혈세인 정부예산을 권력자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쌈짓돈쯤으로 여기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인식이 놀랍습니다.

● 터져나오는 불협화음…표류하는 '문화융성' 정책

정부는 문화융성을 가장 중요한 국정과제로 선정해 놓고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도 매달 열리는 '문화가 있는 날' 행사에 거의 빠짐없이 참여하면서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문화와 예술 창작의 기본은 무엇이든 필름에 담고 무엇이든 대사로 표현하고 무엇이든 화폭에 담을 수 있고, 무엇이든 몸짓으로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의 자유'입니다. 문화를 향유하는 대중들에게 채 다가가기도 전에 현장의 문화예술인들 스스로 표현할 자유를 빼앗기고 있다는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화융성'이라는 거창한 국정과제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는 게 가능할까요?

이미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이대로라면 '문화융성' 정책은 박근혜 정권이 임기를 마치기도 전에 명을 다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진단까지 내놓고 있습니다. 현장의 문화예술계에서 계속되고 있는 불협화음이 작품과 예술성을 둘러싼 건전한 논쟁이라면 얼마든지 부추겨야 하겠지만, 문외한이 봐도 문화와 예술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치사하고 조악한 논쟁으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정부 산하기관들의 행태는 스스로 '문화융성'의 근본을 갉아먹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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