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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윤석남♥심장'展: 심장으로 그린 '여성'의 과거·현재·미래

[취재파일] '윤석남♥심장'展: 심장으로 그린 '여성'의 과거·현재·미래
만덕은 제주도의 기이한 여인
나이는 60인데 얼굴은 마치 마흔 살쯤
천금을 던져 쌀을 사다 굶주린 백성을 구했네
한 바다를 건너 임금님을 뵈었네
다만 한 번은 금강산 보기를 원했는데
금강산은 동북쪽 멀리 안갯속에 싸여 있네
임금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날랜 역마를 내려주시니
천 리를 번쩍하고 강원도로 옮겨 갔네
높이 올라 멀리 조망하며 눈과 마음 확 트이게 하더니
표연히 손을 흔들며 바닷가 외진 곳으로 돌아갔네
탐라는 아득한 옛날 고씨 부씨 양씨로부터 비롯되었는데
한양을 구경한 여자는 만덕이 처음이었네
우렛소리 요란하게 와서는 백조처럼 홀연히 떠나고
높은 기상을 길이 남겨 세상을 씻어 줬네
인생에 이름을 남기려면 이렇게 해야지
진나라 과부 청(淸)하고 어찌 비교할 수 있겠나


조선 정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이가환이 김만덕이라는 한 여인을 치하하기 위해 지어 바친 시입니다.

●김만덕의 '심장'

김만덕은 정조 때 제주도에 살던 평민 출신의 상인이었는데, 뛰어난 수완으로 큰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1794년 가을, 제주에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자 정부에서 구휼미를 배에 실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배가 큰 풍랑을 맞아 좌초됐습니다. 실낱같은 희망마저 잃어버린 수많은 목숨들이 눈물 속에 하늘만 쳐다봤습니다. 그러자 만덕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뭍에서 쌀을 사들였습니다. 이 쌀을 기근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만덕의 아낌없는 사랑과 희생은 도성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정조 임금이 만덕을 한양으로 불러 공을 치하했습니다. 친히 말과 가마를 내려 금강산 유람까지 시켜줬습니다.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은 '만덕전'이라는 전기를 지어 바쳤습니다. 이런 김만덕의 '심장'이 200여 년을 건너와 서울 한복판에 되살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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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최고의 명기(名妓)로 꼽혔던 이매창의 시조입니다.

● 조선 최고의 명기(名妓) 이매창

선조 6년이었던 1573년 전라도 부안현 아전의 딸로 태어난 이매창은 현의 관기였습니다. 허균이 한 글에서 '불양(不揚)'이라고 묘사한 걸 보면 매창은 생김새는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었던 듯싶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배운 거문고 솜씨가 탁월했고 특히 시문에 뛰어났습니다. 허균을 비롯해 당대 최고의 문인, 학자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교류했습니다.

황진이에게 서경덕이 있었듯이 이매창에겐 유희경이라는 평생의 정인(情人)이 있었습니다. 예전 교과서에도 실렸었던 '이화우 흩뿌릴 제'는 매창이 유희경과 이별한 뒤 그리움을 표현한 시입니다. 이 시는 '매창집'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책이 나온 건 매창이 세상을 떠나고 58년 뒤인 1668년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매창의 시 수백 수 가운데 58편을 부안현의 아전들이 모아서 목판본으로 찍어냈습니다. 매창의 시가 어느 정도 평가를 받았는지 가히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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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

● 밥이 된 심장, 푸른 종을 울리다

수백 년 전 역사 속의 여성들인 김만덕과 이매창을 오늘에 불러낸 건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여성 원로작가 윤석남의 손입니다.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줬던 김만덕의 뜨거운 심장은 붉은 밥이 됐고, 성별과 신분의 벽을 넘어 재능을 떨쳤던 이매창은 푸른 종을 흔들며 오늘을 사는 여성들에게 손을 내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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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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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

1939년생인 작가는 이른바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선구자입니다. 주부로 10년을 살다 40세에 뒤늦게 화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미술을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고, 스스로 "페미니즘이라는 말조차 몰랐다"고 말하는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그저 그림이 정말 그리고 싶어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집에 작업실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씩 친정어머니를 모델로 작업실에 초대해 드로잉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작가의 '주제'가 됐습니다.

김진숙, 김인순과 함께 '시월모임'을 결성해 작업활동을 하던 작가는 1986년, 한국 미술사에 이정표를 세운 작품을 내놓습니다. 시월모임의 두 번째 전시였던 '반에서 하나로'에 출품한 '손이 열이라도'라는 작품입니다. 신화에 나오는 괴물처럼 손이 여러개 주렁주렁 달린 여인이 두 손에 아이를 안고 또 한 손으로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다른 손엔 숟가락을 들고 앉아서 눈물을 흘리는 그림입니다.

'손이 열이라도'는 서른아홉에 혼자가 돼 행상을 하며 어렵게 자식들을 부양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작가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어머니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림 속엔 자신을 억누르며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 찬양과 함께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이 때문에 '반에서 하나로'는 한국 페미니즘 전시의 효시로 꼽힙니다.

어머니에서 출발한 모성에 대한 찬양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원숙해 지는 작가의 작품세계 속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존재, 모든 소수자와 약자를 품어 안는 연민과 사랑으로 확장됩니다. 2008년 작품인 '1,025: 사람과 사람 없이'가 대표적입니다. 천 마리가 넘는 유기견을 거둬 기르는 이애신 할머니에 대한 보도를 보고 만든 작품입니다. 작가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수년에 걸쳐 직접 나무를 깎고 다듬고 표면에 그림을 그려 버려진 개 1,025마리를 만들었습니다.

● '여성성'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작가는 1993년, 버려진 나무와 빨래판 등을 조합해 열아홉 살 때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재현한 작품들을 내놨습니다. 어머니 시리즈입니다. 이중 한 작품을 위한 드로잉에 이런 메모가 적혀 있습니다.

1. 이 젊은 시절의 어머님의 사진은 특히 마음에 꽉 찬다.
2. 그 기품과 엄숙함에 매료된다
3. 너무나 가슴이 슬퍼진다
4. 그녀의 삶은 위대한가? 허무한가?


1992년 4월 19일이라는 날짜가 적힌 이 메모는 한가지 사실을 분명히 말해줍니다. 작가가 평생에 걸쳐 추구해 온 '여성성'이라는 주제가 단순히 모성과 여성에 대한 찬양에 그치는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위대하면서도 허무한 어머니의 삶에 대한 통찰은 곧 '여성성'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비판입니다. '여성성'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행해지는 모든 사회적 억압에 대한 비판입니다.

2000년대 이후 작가가 황진이, 허난설헌, 이매창, 김만덕 같은 과거의 여성들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점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작가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변함없이 확인되는 여성성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 현실에 강력히 문제를 제기합니다. 지난 21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원로작가 윤석남의 회고전 '윤석남♥심장'을 꼭 한 번 쯤 가 볼 만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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