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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세월호 1년, 참담했던 그날의 취재일기 ①

4월 16일 청해진해운 사무실에서 보낸 하루

[취재파일] 세월호 1년, 참담했던 그날의 취재일기 ①

* 1년 전,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낼 곳이 없어 일기를 썼습니다. 인천, 안산, 진도를 오가며 세월호 참사를 취재했던 기억이 담겨 있습니다. 부끄러운 점이 많지만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취재파일 연재를 시작합니다. 

● 2014년 4월 16일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 청해진해운

 

◆ 09:40

취재를 나가려던 중 소식을 들었다. 진도 앞바다 여객선 침몰. 사고 발생시간 자체가 얼마 지나지 않았고 돌아가는 사정이 심상치 않았다. 미리 잡아둔 인터뷰를 취소하고 침몰 여객선 선사인 청해진해운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회부 기자 전원이 투입될 만큼의 큰 사고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때까진 승객 대부분이 구조되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했다. 막연하다기보다 그간의 취재 경험을 토대로 봤을 때 대형 인명피해로 이어지진 않을 거란 판단이었다.

아무리 큰 선박이 침몰 중이라 하더라도 사고 발생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 사고가 났을 때 일단 다들 갑판 위로 나왔을 테고, 구명정을 타지 못했더라도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다면 몇 시간 정도는 버틸 수 있다. 먼 바다도 아니고 진도 앞바다라면 근처에 어민들도 많을 테니 다함께 구조작업에 나설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사망자와 실종자가 나올 수 있겠지만 ‘이미 구조 작업이 시작됐다면’ 승객 다수는 무사할 것이다. 짧은 시간동안이었지만 나름대로는 ‘당연한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었다. 피해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크지 않아야만 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배 안에 수백 명이 갇혀 있을 거라곤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청해진해운 캡쳐_5
◆ 11:10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다행히 청해진해운 사무실은 열려 있었다.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이미 많은 기자들이 도착해 취재하고 있었다. 일단 승무원들과 탑승객 명단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였다. 어떤 현장이든 초기 취재가 중요하다. 지금 놓치면 나중엔 자료들을 공개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선사 사무실은 사고 초기 모든 정보가 모여 있는 곳이다. 운항정보, 선박검사기록, 항로, 도면, 승객명단 등등 아직 정부가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자료들이 사무실에 있다. 온갖 서류를 살펴보며 정신없이 취재하다 보니 세월호 사고는 내게 일이 되기 시작했다. 감정이 끼어들 틈은 주어지지 않았다.


세월호_청해진해운
◆ 12:05

상무) 고개 숙여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번 사고 발생에 대해 탑승한 승무원과 학생들이 큰 어려움 속에 잘 이겨내도록 가족들에게도 죄송하단 말씀 죄인으로서 드립니다. 회사에선 인명피해가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기획부장) 사고시간은 금일 8시 45분경에 발생했습니다. 사고 위치는 남방 34도 동경 125도 진도 병풍도 부근입니다. 저희 선박은 4월 15일 저녁 9시에 출항했습니다. 원래 저녁 6시 반 출항 예정이었으나 짙은 안개로 지연됐습니다. 해경정과 헬기가 출동해 승객 구조에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선박 국내도입은 2012년 10월, 취항은 2013년 3월에 했습니다. 그동안 사고가 없었는데 이렇게 사고가 나서 국민들과 여객 분들께 대단히 죄송합니다.

질의응답)
- 현재까지 파악된 사망자는?
= 사망자 1명. 회사 직원 박지영 승무원. 92년생으로 선내 안내를 맡고 있다.

- 완전 침몰된 상태인가?
= 완전 침몰된 건 아니고 기울어서 침수 중으로 알고 있다.

- 다친 사람은?
= 안산 단원고 학생들은 모두 무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다친 건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청해진해운이 첫 언론브리핑을 했다. 사고발생 3시간이 지난 시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됐지만 선사는 제대로 답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탑승인원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번복하기 일쑤였다. 단원고 학생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답변은 제대로 된 근거 없이 뱉은 말이었다. 사고 원인도, 교신 내용도, 어느 하나 속 시원히 확인되는 게 없었다. 도대체 현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얼마나 많은 피해가 예상되는 건지, 확인이 되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 12:40

세월호에 탑승했던 일반인 승객의 가족들이 청해진해운 사무실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결혼을 앞두고 여행을 떠난 아들과 예비며느리에게 연락이 닿지 않는다며 60대 어머니가 오열했다. 내 자식 살아 있느냐 소리치는 어머니를 붙잡고 기자들은 질문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연락한 시점은 언제였는지, 배가 침몰한다는 사실을 직접 알려왔는지, 출발 전 이상한 낌새는 없었는지, 온갖 질문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어젯밤 9시쯤 배가 출발한다고 통화한 것이 마지막이라고 말했다. 안개가 껴서 출항이 늦어지는 바람에 여행을 취소하려고 했는데 이미 차를 싣고 난 뒤라 뺄 수 없다고 해 어쩔 수 없이 배를 탔다는 내용이었다. 취재를 위해 배제해뒀던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더이상 질문을 이어갈 수 없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어머니를 차마 더 바라보기 죄송스러워 자리로 돌아갔다.


◆ 14:00

사고대책본부가 마련된 청해진해운 사무실에도 중계차가 배치됐다. 사고 소식이 전해지면서부터 지상파 방송은 모두 특보 뉴스 체제이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안산단원고등학교, 진도현장, 청해진해운 사무실까지, 차례로 현장을 연결하며 뉴스를 이어갔다.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은 리포트가 불가능하다. 현장에서 취재되는 팩트를 바탕으로 바로바로 보도 내용을 바꿔줘야 하기 때문에 중계연결이 유연하다. 이렇게 급하게 중계를 물려본 적이 있던가. 브리핑 내용과 지금까지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빠르게 기사를 쓰고 중계를 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마라톤 중계가 시작됐다.

종일 속보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 짧게는 15분에서 길게는 30분 간격으로 차례가 돌아왔다.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취재할 틈은 나지 않고 확인해야 할 것들은 많았다. 현재 구조상황은 어떤지, 선박 운항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예정된 항로가 뭐였는지, 층별 구조는 어떻게 되며 아이들은 몇 층에 머무르고 있었는지, 시간대별 사고 처리는 어떻게 했는지, 교대 선장의 경력은 어떻게 되는지, 안내 방송은 뭐라고 했는지, 취재할 내용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다른 현장에서는 파악할 수 없는, 오로지 청해진해운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정보들이었다.

중계에 묶인 동안 대신 취재를 맡아줄 후배 수습기자가 도착했다. 상황 설명을 해주기 위해 밖으로 나가보니 청해진해운 여직원들이 한쪽에 모여 울고 있었다. 단원고 학생들의 탈출을 돕다가 숨진 박지영 승무원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책임이 있는 회사라 할지라도 동료가 숨진 비통함 속에서 취재하는 건 쉽지 않다. 조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 어렵겠지만 조심스럽게 취재하라고 후배에게 일렀다. 어느 하나 쉬운 게 없다.


◆ 18:30

중계를 타고 있는데 바깥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청해진해운 직원이 기자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후배에게 물어보니 타사 기자가 서류를 몰래 보다가 걸렸다고 한다. 결국 다들 나가는 분위기였다. 방송사들은 남아서 조금 더 버티다가 하나둘 포기하고 자리를 비우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우리만 남았다. 판단이 필요했지만 8시 뉴스 중계를 앞두고 버티기 작전에 돌입했다. 빈소라면 모르겠지만 여긴 다르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을 고려해줄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밝혀낼 필요가 있는 곳이다. 청해진해운은 이 사고의 명백한 가해자이다. 뭐가 그리 당당하다고 언론을 내쫓는 건지. 시간이 지나고 사태가 심각해질수록 선사에 대한 분노는 커져만 간다.


◆ 22:00

전쟁 같은 하루가 끝났다. 모두에게 정말 긴 하루였다. 아니, 누군가에겐 아직 끝나지 않은 하루였다. 며칠이 지나도 끝나지 않을 하루... 8뉴스 중계를 마치고 사무실에서 쫓겨나면서 청해진해운 연결도 일단은 끝내기로 했다. 아래층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아침 뉴스부터 연결하기로 했다. 퇴근하려고 생각해보니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비슷한 처지인 후배를 데리고 밥을 먹으러 갔다. 일을 마치고 나니 미뤄뒀던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몰려왔다. 기자 일을 시작한 이래 가장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후배에게 적어도 한두 달은 더 갈 거란 얘기와 함께 마음을 굳게 먹으라고 말해줬다. 내 스스로에게 하는 말과도 같았다. 앞으로가 걱정이다. 내일은 구조자가 나와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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