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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밀린 월세 내라"는 말에…노부부 집에 방화

월세 독촉에 세입자 불 질러

[취재파일] "밀린 월세 내라"는 말에…노부부 집에 방화
반쯤 타다 남은 집 앞에서 만난 할머니의 손은 까맸습니다. 할머니는 이웃과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그나마 불에 덜 그슬린 가재도구들을 집 밖으로 꺼내 닦고, 또 닦았습니다. 그 옆에서 할아버지는 허망하게 잿더미로 변한 집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제 경기도 동두천시에서 만난 70대 부부의 모습입니다. 이들 노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90제곱미터 남짓한 1층짜리 주택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일을 하기가 힘들어지자, 방 한 칸에 월세를 놓기로 했습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 25만 원. 한 동네에 혼자 살고 있던 50대 남성을 세입자로 들였습니다. 노부부의 아들은 “주변보다 싼 시세였지만, 동네 사람이었기 때문에 월세를 싸게 줬다”고 말했습니다.

3년 넘게 노부부와 함께 살던 세입자는 90년대 동두천시 미군기지 근처 양복점에서 봉제 일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점 일거리가 줄어들면서 이후 공사장에서 일용직 근로자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사 현장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집을 자주 비웠고, 수입도 들쑥날쑥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난 해부터 월세가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자주 기한을 넘겼고, “전기세 등 공과금만이라도 먼저 내라”는 노부부의 요구도 듣지 않았습니다. 보증금에서 월세를 계산해 제하기 시작했지만, 넉 달 만에 보증금도 다 바닥이 났습니다.

지난 달 18일, 설을 앞두고 세입자는 다른 지역 공사 현장에서 일을 마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는 후배와 함께 왔는데 집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집주인인 노부부를 불러 문을 열어달라고 말했습니다. 노부부는 월세가 이미 보증금을 다 까먹고도 석 달 치가 밀렸다며, 밀린 월세를 내라고 독촉했습니다. 집 문이 잠겨 있는데다, 아는 후배 앞에서 월세 독촉을 당하자 세입자는 화가 났습니다.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화를 내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노부부도 화가 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월세는 커녕, 전기세도 안 내는 세입자가 뻔뻔했습니다. 설을 쇠어야 되는데, 노부부도 돈이 없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이라도 부치려면 돈이 필요했고, 폐지 줍는 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여윳돈이 필요해서 한가하게 월세를 놓은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셋방을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집을 나간 세입자는 후배 집에서도 자고, 친구 집에서도 잤습니다. 하지만 눈치가 보였고, 공원에서 노숙하는 날도 허다했습니다. 후배 앞에서 월세 독촉을 받은 것도 화가 났고, 노숙까지 하게 되자 노부부에 대한 앙심이 깊어졌습니다.

약 한 달이 지난 3월 15일 저녁, 세입자는 집 근처 주유소에서 기름을 샀습니다. 주유소 직원들은 당시 세입자의 행동이 의심스러웠다고 말합니다. “5천 원 어치 기름을 달라”고 하면서 경유인지 등유인지, 휘발유인지 종류를 명확하게 말하지도 않고, 얼버무리는 태도가 이상했습니다. 경유 3.8리터를 구입한 남성은 집으로 향했습니다. 1층짜리 집은 왼쪽부터 보일러실과 창고, 노부부가 사는 공간, 그리고 세입자가 사는 방으로 이어진 구조였습니다. 창고에는 부부가 주워놓은 폐지가 가득했습니다. 세입자가 보일러실과 창고 쪽에 뭔가를 뿌리고 사라진 뒤 순식간에 집은 엄청난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특히 창고에 쌓아놓은 폐지가 ‘탈 것’이 돼 불을 키웠습니다.

새벽 1시쯤 사람의 인기척을 듣고 눈을 뜬 할머니가 창밖으로 무언가 ‘번쩍’하는 걸 보고 놀라 할아버지를 깨웠습니다. ‘펑’소리가 났고, 속옷 차림의 할머니는 잠바만 챙겨 들고 밖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놀라서 119에 전화한다는 걸 114를 눌렀습니다. 그 사이 집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지나던 행인이 담배꽁초를 보일러실에 버려 보일러가 터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노부부가 사는 곳의 현관까지 기름이 뿌려져 있었다는 경찰의 말에, 누군가 원한을 살 만한 사람이 있느냐는 경찰의 질문에 누군가 떠올랐습니다. 바로 한 달 전 월세 독촉을 받고 집을 나간 세입자였습니다. 근처 CCTV와 차량 블랙박스 화면을 통해 세입자의 그날 행적이 포착됐고, 범행 장면까지 고스란히 찍힌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은 세입자 57살 신모씨를 살인미수 혐의와 방화 혐의로 구속했습니다. 경찰은 불이 시작된 지점이 보일러실인 것으로 볼 때, 신씨가 보일러 과열로 인한 화재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쪽에 불을 붙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또 노부부가 밖으로 나올 수 있는 현관까지 기름을 부은 것도 계획 범행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밝혔습니다.

노부부는 전 재산이었던 집이 불에 타 현재 갈 곳이 없습니다. 경찰은 한시적으로 임시 숙소를 제공해줬고, 지금은 딸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아 어제부터 집을 청소하고 세간을 들어냈습니다. 세입자의 방만 불에 타지 않았지만, 아직 짐을 안 빼 마음대로 들어낼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갈 곳이 없는 것보다, 더욱 괴로운 건 3년 넘게 함께 살았던 세입자의 배신입니다. 또 범행 당시의 충격은 여전히 그들에게 밤마다 악몽이 돼 돌아오고 있습니다. ‘월세 독촉한 집주인’으로 보기에는, 범죄 피해자인 노부부의 사연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 밀린 월세 독촉한다고…폐지 줍는 노부부에 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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