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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브레히트와 만난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

무너질 것 같은 출렁다리 위에서 아기를 안고 여주인공이 노래를 한다.

“계곡 아래는 깊고 다리는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
하지만 두 사람이 갈 길은 선택할 수 없어.
너는 내가 찾아낸 길을 같이 가야해.
내가 얻어온 빵을 먹자꾸나.
음식이 아무리 적더라도 4개 있으면 3개를 너에게 줄게.
그래 내가 엄마, 그래 나의 아들, 그래 이젠 너의 엄마.
너는 나의 아들 사랑스런 내 아들, 사랑스런 내 아들…”


객석의 관객들은 훌쩍훌쩍 눈물을 찍어낸다. 이 노래를 부르는 여주인공의 이름은 ‘그루셰’.  총독의 하녀였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나 총독은 목이 날아가고, 피난길에 오르는 총독의 부인은 비싼 옷 챙길 생각만 했지, 자기 아들은 버려 두고 떠난다. 아무도 챙겨주지 않아 홀로 남겨진 아기를, 하녀 그루셰는 안쓰러운 마음에 돌보게 된다. 그런데 그냥 ‘돌본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아기’는 총독의 유일한 혈육이라 반란군의 표적이었고, 그루셰는 아기 때문에 군인들에게 쫓기는 몸이 된다. 돈도 없고 빽도 없는 하녀 그루셰는 아기 엄마를 자처하면서,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된다. 이 노래는 1막의 마지막 부분, 군인들에게 쫓기던 그루셰가 무너져 가는 다리를 목숨 걸고 건너는 대목에서 부른다.

국립창극단의 신작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독일 극작가 브레히트의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연극의 등장인물들이 다른 연극을 보게 되는 ‘극중극’ 형태로 이뤄져 있는데, 창극으로 바꾸면서 원작의 알맹이에 해당하는 극중극만 떼어왔다. 브레히트 희곡의 사회 비판 의식과 문제의식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여기에 창극으로 바뀌면서 희로애락의 감정이 더 풍부해졌다. 재미있는 부분은 판소리의 해학과 사투리가 더해져 재미있는 부분은 배꼽빠지게 재미있어졌다. 주인공 ‘그루셰’가 진도 사투리를 쓰는데, 원작과 한 부분만 비교하면 이렇다. 그루셰에게 푹 빠진 청년 ‘시몬’이 그루셰에게 청혼하기 전에 이것저것 질문하는 대목이 있다. “아가씨는 물 속의 물고기처럼 건강한가요?”라고 묻는데, 원작 희곡에서는 “어쩌다 오른쪽 어깨 아래가 결리긴 해도, 그것 말고는 무슨 일이든 해낼 만큼 힘이 있어요, 아직 누구한테도 부담을 준 적은 없어요.” 라고 답한다. 창극에서도 ‘시몬’의 질문은 같다. 그런데 그루셰의 대답은 이렇게 바뀐다. “이따금 오른쪽 어깨가 쬐까 결리긴한디, 징하니 건강하지라~”  그리고 슬픈 부분은 눈물을 참기 어려워졌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그래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날 법했던 편안한 결말 대신, 관객을 한 번 더 깊이 생각하게 한다. (자세한 내용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여기까지만.)

원작의 명성이 원작을 바탕으로 한 공연의 성공을 보장하진 않는다. 그래서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더 소중하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정의신씨는 “서양작품과 판소리가 어떻게 융합할 수 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특히 원문에 노래로 지정돼 있는 부분이 있어서, 판소리와 잘 맞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성국 음악감독은 “작품 속 보편적 정의를 음악적으로 풀기 위해 여러 다양한 방법을 실험적으로 시도했다”고 한다. 김 감독은 “전통 가창이 중심이지만, 마치 비빔밥처럼 기타, 베이스, 드럼과 서양 현악기 편성에 국악, 타악기 편성, 그리고 중간중간 디지털적인 음악 요소를 섞었다.”고 설명했다.

객석은 빈 자리가 없었다. 지난 주 토요일부터 시작된 공연은 현재 모두 매진이다. 관객도 젊은층이 압도적으로 많다. 내가 처음 창극을 본 건, 2006년 ‘맹진사댁 경사’였는데,  당시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 객석에서 내가 제일 젊은 관객이었다. 이후 ‘장화 홍련’, ‘메디아’ 등으로 레퍼토리가 확대되고, 쟁쟁한 연출가들의 신선한 연출이 더해지면서 관객은 40대, 30대로 점점 젊어졌다. 이번 공연은 특히 20대 관객이 많다.

물론, 좋은 사람이 있으면 싫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이번 작품에 대해서도 ‘우리 소리’에 너무 소홀한 것 아니냐고 아쉬워하는 관객도 있다. 너무 ‘뮤지컬 같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김성녀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의 말이 적절한 설명이 될 듯 하다. “판소리는 몇 백년에 거쳐 정착된 것이고, 여기서 창극이 파생된 것은 100년 전이다. 그리고 국립창극단이 창극을 만든 것은 50년 정도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것이 창극이다’는 정해진 형식은 없다. 창극은 늘 변화하고 있다. 저는 창극이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재도 다양하게,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창극을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우리가 새로운 창극을 많이 계발해야 할 시기이다. 이것이 넘쳤을 때, 다시 옛날 스타일의 창극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 땐 순환 구조가 되리라 생각한다. 저는 관객의 저변확대와 창극의 무한도전을 하고 싶다.” 판소리는 원형 그대로 보존해 잘 이어가는 것이 관건이고, 파생 장르인 창극은 과거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창극은 ‘창극’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 때문인지, 많은 사람들이 ‘고루하지 않을까’, ‘그냥 뮤지컬 보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만 해도 ‘나랑 공연 같이 볼래?’ 하면, ‘좋아 좋아’하던 주변 지인들이 ‘창극’이라고 하면, 작품 설명도 듣기 전에 ‘너 혼자 가, 다음에 뮤지컬 같이 가자’고 대답하니 말이다. 그러나 누가 ‘KOREAN MUSICAL’이 뭐냐고 묻는다면 난 ‘창극’이라고 답하고 싶다.

*창극 코카서스의 백묵원은 당초 3월 28일까지, 1주일만 공연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표를 구하지 못한 관객들의 호소에, 토요일인 28일 마지막 공연이 추가됐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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