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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진의 SBS 전망대] 김용원 변호사 "박희태, 형제복지원 사건 잘 알고 있을 것"

* 대담 : 김용원 변호사 (87년 당시 형제복지원 수사검사)

- 87년 수사당시 박희태에 직접 보고, 지시도 받아
- 형제복지원 사건은 대규모 인권유린 사건
- 전두환 정권 지시로 수사방해, 수사축소
- 형제복지원 판결 당시 대법원은 전두환 정권의 시녀

 
 
▷ 한수진/사회자:
지난 주말, SBS TV <그것이 알고 싶다>는 형제복지원 사건, 다시 한 번 다뤘습니다. 1년 전, 불법 감금과 강제 노역, 구타 등 끔찍한 증언을 한 이후에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특례법 제정 등 후속 조치들은 잘 진행되고 있는지 돌아봤는데요, 현실은 참 답답했습니다.

가해자였던 형제복지원의 원장과 일가족들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고, 피해자들은 거리에서 진상 규명을 여전히 외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청와대까지 보고됐다고 하는데 형제복지원 원장이 가벼운 처벌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당시 수사 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 전화로 만나보겠습니다. 변호사님, 나와 계십니까?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네. 안녕하십니까.
 
▷ 한수진/사회자:
지난 토요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당시 부산지검장이었던 박희태 전 국회의장과의 전화 통화가 아닌가 싶은데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네.
 
▷ 한수진/사회자:
형제복지원 사건은 전혀 기억에 없다면서도 당시 수사검사였던 김용원 변호사 이름은 단박에 기억해내던데, 이 장면 어떻게 보셨습니까?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1987년도 1월 달에 발생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죠. 그래서 아마 그 분께서도 사건 내용을 잘 기억하고 계실 거예요.
 
▷ 한수진/사회자:
기억을 못한다고 하시던데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아마 사실하고는 좀 다른 말씀이 아니신가 싶어요.
 
▷ 한수진/사회자:
사실과는 좀 다른 말씀이신 것 같다, 이 말씀이시죠?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예.
 
▷ 한수진/사회자:
그러면 87년 수사 당시에 박희태 지검장이 직접 지시한 것도 있습니까?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예. 그 관계로 검사장을 몇 번 만나 뵈었죠.
 
▷ 한수진/사회자:
아. 직접 지시도 하신 거에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보고도 드리고 지시도 받고 그렇게 했었죠.
 
▷ 한수진/사회자:
가령 어떤 지시를 하셨어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처음에 사건 수사를 시작하면서 직접 대면해서 보고를 드렸고요. 그 당시에는 잘 알겠다고만 하셨고, 그 뒤 수사 진행 과정에서 직접 보고를 드리기도 하고, 차장검사를 통해서 보고를 드리기도 하고 그랬고요. 그리고 검사장의 지시는 주로 차장검사를 통해서 받았죠.
 
▷ 한수진/사회자:
그렇군요. 근데 박희태 전 검사장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하셨는데, 왜 그러셨을까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음..
 
▷ 한수진/사회자:
왜 기억이 안 난다고 말씀하실까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그 사건은 검찰이 전두환 정권의 지시에 따라가지고 수사를 방해하고 수사를 축소시키려고 했던 사건입니다. 그래서 검찰 지휘부로서는 그 사건에 대해서 별로 할 말이 없는 상태이겠죠.
 
▷ 한수진/사회자:
지금 ‘수사방해’, ‘수사축소’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구체적으로 당시 수사할 때 어떤 일들을 겪으신 건가요? 먼저 이 수사는 어떻게 시작됐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말씀을 좀 해주세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수사는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시작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1986년도 12월 말에 그 당시에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에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주말에 꿩 사냥을 나갔었는데 꿩은 구경도 하지 못하고, 울주군의 산속에 있는 형제복지원의 목장 조성사업에 동원된 강제노역을 하고 있던 수용자들을 직접 목격을 하게 됐던 거죠. 그래서 수사를 시작하게 됐고요. 그게 기본적으로 아주 대규모 인권유린사건입니다.
 
▷ 한수진/사회자:
그렇죠.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그러다 보니까 그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점점 더 거세지게 됐죠.
 
▷ 한수진/사회자:
수사를 해보니까 어떤 점들이 좀 드러났습니까?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수사 초기에 형제복지원을 몇 차례 갔었어요. 외곽을 둘러보기도 하고 그 다음에 압수수색을 시작하면서 형제복지원 안으로 들어갔었는데, 저의 머릿속에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몇 개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어떤 거죠?
 
'그것이 알고싶다'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그 중에 몇 가지를 말씀을 드리면, 수용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건물은 안팎으로 아주 견고한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고요. 그 다음에 또 ‘병동’이라는 건물이 있었는데, 병동에, 들어가지 말라는 곳을 들어가 봤어요. 그랬더니 수십 명의 폐결핵 환자들이 어두컴컴한 건물 속에서 마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그런, 그런 모습들로 앉아있었고요.
 
▷ 한수진/사회자: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예. 치료도 못 받고 영양 상태도 엉망이 되고, 환경 자체가 도저히 환자들이 있을 환경이 아니었죠.
그런데도 원장실에 있는 대형금고 안에는 현금하고 똑같은 정기 예탁금 증서, 그 다음에 뭐 달러, 엔화 이런 돈들이 합쳐서 수십억 원의 돈이 있었습니다. 그런 장면들이 아주 인상적이었죠.
 
▷ 한수진/사회자:
원장실에 엄청난 현금 다발들이 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예. 그렇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잔뜩 쌓여 있었다?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예.
 
▷ 한수진/사회자:
지금 피해자 증언 보면 ‘맞아서 끌려간 사람 중에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 ‘관이 10개였다. 어떤 날은 관이 3개였다.’ 이런 믿기 힘든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습니까? 이 부분도 혹시 수사가 됐나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형제복지원 내에 있었던 관을 제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없는데, 그 형제복지원이 3천 명이 수용돼있었던 시설이고, 그 다음에 그 3천 명을 관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밖에 없었던 그런 시설입니다.
그걸 관리하는 무슨 전문적인 조직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고, 수용생들 중에서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을 ‘소대장이다’, ‘중대장이다’ 이런 식으로 뽑아가지고 군대식으로 관리를 했고, 그러다 보니까 뭐 작업을 게을리 한다든지, 말을 제대로 듣지 않는다든지, 이런 사람들은 순전히 폭력을 가지고 다스렸죠.
 
▷ 한수진/사회자:
예.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그러다 보니까 맞아죽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그런 환경 속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 아니었느냐, ‘관이 10개다’, ‘3개다’ 이런 것들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근데 이 박 원장을 구속시키자마자 부산시장이 전화를 했다고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예.
 
▷ 한수진/사회자:
수사하면서 여기저기서 압력 많이 받으셨다면서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대표적인 게 이제, 구속이 토요일 날 구속을 했는데 그 다음날 부산시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가지고 석방할 것을 요구를 했습니다.

이 시설은 결국은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놓은 시설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면서 여러 가지 가혹한 조처들을 했는데, 국민들이 잘 알고 계시는 게 삼청교육대이고요. 시민들을 끌고 가가지고 군부대에 수용하고 각종 훈련을 실시하고, 정신을 개조한다고 그렇게 나섰던 거죠.
 
▷ 한수진/사회자:
그렇죠.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그 다음에 ‘거리에서 이렇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랑인이나 거지들 다 없앤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잡아가두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까 멀쩡한 사람들도 수없이 감금되었던 시설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이 형제복지원 시설은 전두환 정권이 만들어놓은 시설이고, 거기에서 이루어진 인권유린 사태가 자꾸 세상에 드러난 것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민심의 이반과 저항을 가속화시키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결국은
 
▷ 한수진/사회자:
압력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검찰 지휘부를 내세워가지고 수사를 막으려고 했고, 실제로 제가 수사를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조처들을 했었어요.
 
▷ 한수진/사회자:
그리고 판결도 석연치가 않던데요, 재판에서 형제복지원 원장이 2년 6월을 선고받지 않았습니까?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예. 그렇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이게 뭐 터무니없는 판결인 거죠?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저는 수사과정에서 몇 가지 목표가 있었죠. 첫 번째는 수용자들을 전부 석방을 시켜야 되겠다는 것이었고요. 그래서 그건 결국은 전원 석방을 시켰고, 두 번째 목표는 이 원장을 엄벌을 받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업무상 횡령 수사도 아주 열심히 하고 했었는데 그 과정에서 공소장 변경을 방해를 받기도 하고, 그러다가 결국은 구속 기소를 해서 1심에서는 말이죠, 제가 징역 15년과 벌금 6억8천을 구형을 해가지고 1심 판결 선고가 징역 10년에 벌금 6억8천이 선고가 됐었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그런데 달라졌죠?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근데 그 사건이 7번의 재판을 거쳤어요. 마지막 재판까지, 울산지방법원에서 1번 하고, 그 다음에 대구고등법원에서 3번, 대법원에서 3번 이렇게 해서 7번의 재판을 했는데, 그러면서 벌금형은 떨어져나가고 징역 2년 6개월로 줄고 말았죠.
 
▷ 한수진/사회자:
‘특수 감금’이 핵심 쟁점이기도 했는데, 대법원은 무죄 판결을 했더라고요? ‘내무부 훈령 410호’가 근거였는데, 이게 법조인으로서 인정이 되시나요?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전혀 동의를 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대구고등법원에서는 ‘유죄’라고 판결하면, 대법원에서는 파기 환송해서 ‘무죄’라고 했고요. 그것이 반복되다 결국은 대구고등법원이 어쩔 수 없이 무죄로 판결하고 대법원에 가서 확정되는, 이런 과정을 거쳤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법리상으로는 유죄가 틀림없는 것인데, 당시 대법원이 전두환 정권이 시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던 거죠.
 
▷ 한수진/사회자:
그래서 아직까지도 지금 진상규명이 제대로 안 되고 있고, 피해자 보상도 안 되고 있네요. 참 안타깝습니다.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들어야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용원 변호사/당시 수사검사
예. 고맙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사했던 검사, 김용원 변호사와 말씀 나눠봤습니다.


▶ 형제복지원의 검은 배후는 누구인가
▶ '그것이 알고싶다' 형제복지원 방송 그 후 1년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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