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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그들은 왜 저항하지 않았나?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본 '낙하산' 인사의 해악

[취재파일] 그들은 왜 저항하지 않았나?
"아주 간단한 자료를 요청해도 정해진 기간을 넘기기가 일쑤였으며 담당하는 사업부서와의 통화도 너무 어려웠습니다. 자료를 제출하는 모습만보면 마치 청와대 제2비서실 같습니다."

지난해 국정감사 기간 중에 나온 한 국회의원의 발언입니다. 법으로 정해진 국정감사와 관련해 피감기관이 제대로 협조를 안 해 국감 진행이 어렵다며 나온 특정 기관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특히, 국회 무시, 비밀주의, 보스에 대한 과도한 충성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현 정권 청와대 비서실에 비유되면서까지 말이죠.

이렇게 비판받은 곳은 '인도주의'를 실천하고, '중립'을 기관 운영의 7대 원칙 중 하나로 내세우고 있는 대한적십자사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아 온갖 정치 편향적 발언을 쏟아냈던 김성주 MCM 회장을 지난해 10월 총재로 맞은 곳입니다.

대한적십자사는 왜 이런 비판을 받은 걸까요? 조직 자체의 문제일까요, 아님 격무에 시달리는 업무 환경 때문일까요?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에피소드들을 더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취재파일

김성주 총재가 대한적십자사 업무를 시작한 지난해 10월 8일. 김 총재는 간부회의를 직접 주관합니다. 간부회의는 적십자사의 가장 핵심적인 정보를 공유하는 자리로, 적십자사는 여기서 논의된 내용은 국회의 자료 제출 요청에도 '비밀'이라며 거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적십자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이 참여합니다. 성주그룹 직원이었습니다.

한편, 성주그룹의 또 다른 직원은 적십자사 측에 인사자료, 병원운영상황, 적십자회비 모금사항, 혈액사업 내부자료 등을 요청합니다. 제때 자료 제출이 안 되었는지, 적십자사 업무 담당 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국정감사에서 문제가 지적됐습니다. 민간기업 직원이 공공기관의 내밀한 정보를 요구한 것은 점령군적 태도가 아니었냐는 비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김성주 총재는 빠른 업무 파악과 조직 투명성 제고를 위해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었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습니다.

● 그들은 왜 저항하지 않았나?

김성주 총재의 태도의 행태는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눈여겨 볼 점은 다른 곳에도 있습니다. 바로 적십자사 간부들의 태도입니다.

다시 지난해 10월 8일의 상황입니다.

적십자사 간부회의에 느닷없이 들어온 성주그룹 직원. 일반적인 조직이라면 "당신 왜 여기 들어왔느냐?", "나가라"는 등 파행이 있었을 겁니다. 적십자사 직원들에게는 직무상 비밀 엄수 의무가 있기 때문에 더 그렇습니다. 적십자사 직무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정보를 공유하는 간부회의에 외부 인사가 들어오는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했으니, 간부들의 반발로 회의가 파행됐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예상과 달랐던 것 같습니다. 회의는 잡음 없이 진행됐던 것으로 보입니다. 잡음이 있었다면, 적십자사 일반 직원에게도 알려져 노조 차원의 반발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성주그룹 직원의 자료 제출 요구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감장에서야 사실이 알려지고,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간부회의에 참석하고, 자료 제출 요구를 받은 적십자사 간부들이 크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왜, 적십자사 간부들은 '사건' 당시 침묵했던 걸까요? 자신들에게 비밀 준수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무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총재가 데려온 사람이니 괜히 나서서 찍히지 말자는 무기력함이 원인은 아니었을까요? 그들이 침묵하지 않았다면, '사건' 자체가 발생하지 않고 해프닝으로 끝났거나, 외부로부터 문제를 지적당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김성주 연합

● 낙하산 인사에 무기력해지는 조직

'전문성 결여로 조직에 대한 통제가 약해져, 도덕적 해이를 야기한다.'

'임기가 제한되어 있다 보니 전시성 사업을 벌이고, 조직 구성원도 보스의 눈에 들기 위해 보여 주기식 사업에 몰두한다.'

'힘 있는 보스의 눈에 들기 위해 조직 구성원들이 충성 경쟁을 벌인다.'

'내부 승진이 힘들어진 현실은 직원들의 사기를 꺾고, 이는 사적 이익 추구를 야기하는 등 비리를 잉태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인사와 조직 전문가들이 말하는 낙하산 인사가 조직에 미치는 해악들입니다.

전문성, 적합성에 대해서는 개개인마다 이론의 여지가 있겠지만, 대한적십자사 총재 자리는 전통적으로 정치권 낙하산 인사가 내려오는 자리입니다. 이번에 온 김성주 총재도 예외는 아니죠.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에 버티는 적십자사의 행태. 인도주의를 실천하는 기관이지만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한 청렴도 조사에서 하위권에 머무르는 현실. 직원 채용과 관련한 금품 수수와 억대 횡령 사건 등의 비리. 낙하산 인사가 계속해서 조직의 수장으로 내려오고 있는 대한적십자사의 모습입니다.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봉사는 못 하겠다'

지난해 8월 10일,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진도에서 급식 지원을 하던 대한적십자사의 급식 차량이 갑자기 철수합니다. 적십자사가 밝힌 표면적인 이유는 안산봉사센터에서 급식을 전담하기로 했다는 것이지만, 새누리당 김명연 의원이 국감에서 밝힌 이유는 좀 다릅니다.

당시 범대위에서 안산자원봉사센터가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식사를 맡고, 적십자사는 자원봉사자들의 식사를 맡자는 논의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적십자사 측은 세월호 관련 '가족들을 위한 봉사는 하겠지만,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봉사는 못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합니다. 김 의원이 설득에 나섰지만, 광주지역 국토순례단 급식 지원 스케줄이 잡혀 있다며 결국 급식 차량은 철수했다는 게 김 의원의 설명입니다. 왜 적십자사는 가족을 위한 봉사만 하겠다고 버텼던 걸까요?

낙하산 인사 논란이 나오면 꼭 따라 붙는 게 전문성 논란입니다. 일부에서는 전문성 있는 낙하산 인사는 그래도 봐 줄만 한 것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정권이 낙하산 인사를 해 온 정치적 현실을 고려하면 그런 주장을 외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모든 낙하산 인사는 문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건, 낙하산 인사가 조직에 미치는 해악, 특히 직원을 순치시켜 무기력하게 만들거나, 충성 경쟁으로 내모는 '낙하산 인사' 자체가 가지는 문제점 때문입니다.

"어차피 이제 우리 식구가 된 마당에 문제 제기해서 뭐 하겠냐. 특별한 문제없이 임기를 무사히 마치기를 바랄 뿐이다."
취재파일

낙하산 인사에 대해 격렬히 반대했던 한 공공기관 노조 관계자의 말입니다. 노조 관계자가 이럴진대, 공공기관 간부들의 낙하산 인사에 대한 반응은 어떨까요? 상식에 반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침묵했던 적십자사 간부들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렇게 낙하산 인사가 조직에 미치는 악영향이 크다보니, 시중에는 '낙하산 인사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조직에 미치는 해약을 막기 위해서라도 개국공신이라는 사람들에게 그냥 국가가 돈을 주고 공공기관 자리를 못 맡게 하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라는 웃픈 이야기도 회자됩니다. 임명권자가 인사권을 외부 기관이나 사람에게 독립시키거나 제대로 행사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기 때문일 겁니다.

다만, 너무 허무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리고 무책임한 말이 될 수도 있지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대한적십자사가 방증하듯이 조직 구성원들이 너무 쉽게 순치되어 버린다면, 그래서 다루기 쉬운 조직이 조직이 된다면, 그 조직에 또 다른 낙하산 인사가 내려올 가능성은 더 높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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