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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R-7'이 뭐길래?…월성 원전 1호기 '안전성' 논란 풀어보기

[취재파일] 'R-7'이 뭐길래?…월성 원전 1호기 '안전성' 논란 풀어보기
이런 가정을 한번 해 보겠습니다.

친구가 2022년까지 사용할 차가 한 대 필요하다고 합니다. 얘기를 전했더니 중고차 업자가 78년식 차를 한 대 가져왔습니다. 원래는 2012년에 폐차할 예정이었던 찹니다. 업자는 폐차 예정일이 지나긴 했지만, 사용하면서 주요 부품도 다 갈았고 관리도 열심히 했으니 10년쯤 더 타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자동차 검사소에 보내서 이런저런 성능 시험을 한 결과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증명서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이 차가 안전하다는 말이 영 믿음이 안 간다고 합니다. 당장 검사에선 별 문제가 없었다고 하지만, 30년도 넘었고 그 사이 이런저런 고장으로 공장에도 수십 번 드나들었던 차가 앞으로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안전하게 굴러갈 거라는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친구는 또 얘기합니다. 지난 30년 사이 도로환경이 바뀌면서 자동차 안전 규정이 많이 바뀌지 않았습니까? 80년대 90년대에 새로 만들어진 안전 규정들이 이 차엔 전혀 적용되지 않았잖아요? 차라는 게 일반 물건도 아니고 타고 가다 사고가 나면 사람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물건 아닌가요? 당장 배기가스 검사 통과하고 엔진 출력 괜찮다고 해서 30년 전에 당시 규정에 맞춰 만든 낡은 차가 2022년까지 안전하게 굴러갈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겠어요?

그러자 업자가 말합니다. 껍데기는 낡았어도 성능은 멀쩡하다니까요! 그동안 부품 싹 갈고 점검하고 관리하느라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요? 30년, 30년 숫자 타령만 하느라 폐차하면 그 돈 다 날아가는 겁니다. 게다가 생각을 해 보세요. 새 차 사려면 또 돈이 얼마나 드는데요?

그 말에 친구가 되받습니다. 돈 얘기 잘 하셨습니다. 좋습니다. 이 차를 더 운전해도 다행히 큰 사고는 안 난다고 칩시다. 하지만, 30년 넘은 중고차 몰고 다니다 이런저런 잔고장에 하루가 멀다 부품 갈고 공장 드나들다 보면 오히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것 아닙니까? 경제적으로 따져도 당장 싸다고 이 차 사는 게 꼭 이득이라는 보장이 없지 않냐고요!

갑자기 웬 중고차 상황극이냐고요?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 수명연장을 둘러싼 논란을 주변에 있을 법한 쉬운 예로 바꿔 본 겁니다. 물론, 최대한 알기 쉽게 요약하려다 보니 조금 억지스러운 구석이 없지 않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주 금요일 새벽이었습니다.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수년째 논란이 계속돼 온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계속운전을 허가했습니다. 같은 안건을 두 번이나 재상정하는 진통 끝에 열린 세 번째 회의가 오전 10시에 시작해 자정을 넘겼지만 위원들의 찬반 의견차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위원회는 반대하는 위원 두 명이 거부하고 퇴장한 가운데 표결을 통해 허가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이 때문에 '날치기'라는 표현까지 등장했습니다.

찬반 의견이 극명히 갈린 안전성 논란의 핵심은 '최신안전기준'이라는 겁니다. 대표적인 게 각종 언론에서 자주 언급된 'R-7'입니다. 91년 캐나다에서 만든 '캔두형 원전의 격납건물계통에 대한 요건'을 말합니다. 월성 원전이 바로 캐나다형 가압 중수로를 쓰는 캔두형 원전입니다.

예를 들면, 사용후핵연료를 저장소로 내보낼 때 물이 가득 찬 수조를 통과하게 되는데, R-7은 이 수조와 저장소 사이에 금속으로 된 문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만일의 사고 시 저장소의 방사능 물질이 거꾸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해섭니다. 원전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주증기 배관 역시 R-7에 따르면 밸브를 설치해야 합니다. 역시 사고시 배관이 터졌을 때 방사능 물질이 새 나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기 위해섭니다.

캐나다가 R-7을 만든 건 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문입니다. 엄청난 재앙을 계기로 원전의 안전성을 더 강화할 필요가 있겠다고 해서 이전의 기준을 훨씬 강화해서 새로 만든 기준입니다. 월성 원전 가운데도 2호기부터는 모두 R-7이 적용됐습니다. R-7이 나온 게 91년인데 2, 3, 4호기는 모두 91년 이후 건설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호기는 70년대에 건설됐습니다. R-7이 나오기 전입니다. 당연히 체르노빌 사고를 계기로 강화된 이 '최신안전기준'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월성 1호기의 계속운전을 주장한 측은 R-7은 적용되지 않았지만 공식 기관에서 수년에 걸쳐 심사한 결과 현재 설비로도 안전에 문제가 없다는 결론이 났으니 더 운전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반면 수명 연장을 반대한 측은 심사 결과에 관계없이, 최신안전기준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안전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제3자 입장에서 보면 양측의 입장에 다 일리가 있습니다. 필요하니까 새로 기준을 강화한 것인데, 그 기준을 적용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안전하다고 한다면 새로운 기준 자체가 필요 없다는 얘기가 되겠죠. 하지만 한편으론, 어쨌든 심사에서 안전상의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데 무조건 언젠가는 반드시 사고가 날 거라고 단정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렇다 보니 월성 1호기를 둘러싼 양측의 입장차는 좁혀지지 않았습니다. 안전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 자체가 서로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입장차가 이렇게 여전한 가운데 '결론'이 나 버렸다는 겁니다. 그것도 표결이라는, 일견 민주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상은 철저히 '힘의 논리'에 의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힘의 논리라는 표현을 쓴 건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구성 때문입니다. 위원회는 민간 기구이긴 하지만 정부·여당 추천 위원과 야당 추천 위원으로 구성됩니다. 정부·여당 추천 위원 숫자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회의 내내 정부·여당 추천 위원들은 수명 연장을 찬성했고 야당 추천 위원들은 반대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마당에 양측의 주장 가운데 어느 한편이 옳다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반대 위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표결로 밀어붙여 가면서 굳이 당장 허가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었는지는 의문이 듭니다. '생존권'을 위협받고 있다는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한 상황이고, 당장 월성 1호기를 재가동하지 않으면 전력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어차피 2년 넘게 진행 중인 논의인데, 2년 3개월 만에 결정 내는 것과 2년 4개월, 2년 5개월 만에 결정 내는 것이 뭐가 그렇게 달랐던 걸까요?

안전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다르다는 이야기는 결국 우리 사회에서 원전을 둘러싼 논란이 눈에 보이는 숫자나 현상을 넘어 가치와 철학의 대립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구나 몇 대 몇이라는 표 대결이 아니라 시간이 얼마가 더 걸리든 더 많은 토론을 통해 의견차를 좁혀갔어야 할 문제입니다. 힘의 논리를 앞세운 표결로 원전을 둘러싼 논란은 더 격화했습니다. 이런 가운데 고리1호기, 2호기, 3호기, 4호기, 한빛 1호기, 앞으로 10년 이내에 수명이 끝나는 원전만 다섯 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년을 끌어온 월성 1호기의 수명 연장 논란에 어렵게 마침표가 찍혔지만, 이 마침표가 끝이 아니라 더 큰 논란과 갈등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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