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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존재 '그림자'

박 대통령이 밝힌 '사이버 국론 분열' 주범 '국정원'

[취재파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존재 '그림자'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구체적으론 국정원의 조직적인 대선개입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항소심은 A4용지 274쪽 분량의 판결문을 작성했다.

판결문 한 줄 요약 :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에 지시에 따라 국정원 심리전단 조직적으로 SNS를 통해 박근혜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했다.

이 한 줄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재판부가 어떤 고민을 했고, 기록을 몇 번이나 봤는지는 274쪽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왜 공직선거법이 만들어졌는지, 왜 대북심리전이 아닌 선거운동이었는지, 선거개입 처벌의 필요성, 왜 국정원법이 개정됐는지, 국정원의 선거개입 역사, <논어>의 구절까지, 어찌 보면 공소사실 외적인 부분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판결문 274페이지를 넘기고 난 뒤엔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보였다.

재판부가 장황한 걸 넘어 섬세하리만큼 정밀하게 판결문을 쓴 이유는 뭘까. 재판의 두 축인 공소를 제기한 검찰, 피고인석에 앉은 원 전 원장 두 사람이 승복하길 원해서일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두 축 뒤에 있는 더 많은 이해 당사자, 넓게는 국민이 이번 사건의 본질을 알 길 바랬기 때문으로 보인다. 거칠게 얘기한다면 더 이상의 갈등이 싫었고, 더 거칠게 얘기하자면 '갈등에 대한 두려움'도 엿보였다. 수사 대상도 아니고, 기소 대상도 아니라 피고인석에 앉아있지 않았지만, 법정의 빛을 가리고 있는 '그림자' 때문으로 짐작된다.

소설책 한 권 분량이 넘는 판결문은 그 자체로도 방대한 양이지만, 판결문에 포함되지 않은 이 사건 전말이 포함된다면 대하소설 수준의 분량도 넘을 것이다. 국가의 축제이자, 나라의 중심을 세우는 대선이기에 그 파급력이 상당했고, 파급력 때문에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우여곡절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번 사건은 더욱 정확하게 전달될 필요가 있다. 국민의 당연한 권리이자, 이 사회를 지탱하는 출발점이 '선거'이기에 판결 내용은 물론, 사건 전말을 국민들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두 발을 디디고 있는 이 땅이 늪으로 변하지 않고 더 견고해지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은 오도되거나 왜곡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판결문 내용은 물론, 전후 사정의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 대선개입 사건이 지나간 자리…쑥대밭
그래픽_원세훈국정원

판결문에서 갈등 또는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이 엿보인 현실이 안타깝지만, 수사 과정을 지켜보면 그게 현실이었다.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이 지나간 곳을 살펴보자.

이번 수사는 출발은 지난 2012년 12월 11일, 경찰과 선관위가 국정원 여직원 집을 찾아 간 순간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이 사건을 처음 수사한 경찰은 몇 달 뒤 수사를 받는 처지가 됐다. 경찰 수뇌부가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폭로가 나왔고, 검찰은 이를 근거로 김용판 당시 서울청장을 기소했다. 폭로 당사자인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과장은 나중에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이 됐다. 혹자는 폭로의 대가로 했고, 혹자는 드러나지 않은 진실 규명을 위한 선택이라고 했는데, 분명한 건 폭로의 진실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진정성은 의심받게 됐다는 것이다. 
검찰_640

이번 수사를 책임졌던 검찰은 어땠을까. 이 사건의 최종 지휘자인 채동욱 전 검찰총장은 원세훈 전 원장에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야한다는 입장이 강경했다. 지휘 라인을 통해 보고되는 증거관계를 봤을 땐 명백한 선거 개입이었다는 이유였다. 공안 수사의 대가라고 알려진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공선법 적용을 반대했고, 청와대는 말할 것도 없다. 선거개입이 인정됐을 때 생길 정통성에 대한 부정이 그 이유라는 건 상식적 수준에서 알 수 있다.  채 전 총장 역시 선거법을 적용할 경우 생길 파장은 알고 있었지만, "증거대로 가자"는 짧은 말로 기소를 결정했다.

2013년 6월 14일 원 전 원장은 공선법이 적용돼 마침내 불구속 기소됐다. 그로부터 석 달 뒤인 9월 13일 채 전 총장은 혼외자 의혹으로 총장직을 내려놨다. 그 후 수사를 직접 담당했던 특별수사팀은 와해됐다. 특별수사팀장 윤석열 검사는 채 전 총장이 떠난 뒤 발생한 수사 외압을 폭로하며 항명을 했고, 검찰은 그에게 정직의 징계를 내려 좌천시켰다. 부팀장인 박형철 검사도 감봉의 징계를 받은 뒤 마찬가지로 좌천됐다.

특별수사팀이 꾸려져 있던 서울중앙지검의 수장이었던 조영곤 지검장은 후배 검사로부터 공개 불신을 당한 뒤 사표를 제출했다. 채 전 총장과 함께 대검찰청에서 이 사건을 지휘했던 송찬엽 대검 공안부장은 지난 주 서울동부지검장을 끝으로 검찰을 떠났다. 검찰 내 핵심 요직인 대검 공안부장은 고검장으로 승진하는 자리로 인식되지만, 송 검사장은 예외가 됐다.

증거를 찾아, 그 증거에 따라 수사만 했던 검찰은 대선개입의 증거를 발견한 뒤, 조직의 수장과 조직의 든든한 허리였던 인재들을 잃었다. 황폐화된 조직에 남은 건 '그래도 정의를 실현했다'는 자존심이 아닌 두려움과 자기검열이었다.

갈등과 두려움은 전염병인 듯 법원으로 넘어갔다. 1심이 원세훈 전 원장의 공선법 혐의에 무죄를 선고하자, 법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정치엔 개입했지만, 선거엔 개입하지 않았다'는 1심 판결이 법리(法理)를 따지기 전에 상식에 어긋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확장해석의 금지, 죄형법정주의에 따른 판결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선 법리가 상식에 어긋났을 땐 '궤변'이라고 하고, 타당성을 잃은 법리 적용은 재량권 남용이라고 한다. 결국 현직 부장판사는 1심 판결을 "궤변, 지록위마"라는 공개 비판을 했다. 해당 판사는 법관 징계 최고 수위인 정직을 받았다.

● 1심 선고 후 더 짙어진 그림자

이번 사건의 핵심인 선거법 위반에 대해 1심이 무죄를 선고하자, 세상은 떠들썩했지만, 검찰 내 분위기는 조용했다. 검찰은 대형 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되면 한 밤 중이라도 브리핑을 하거나 대검에서 직접 나서 입장을 밝혔지만, 이번 사건은 예외였다. 심지어 항소를 포기한다는 말이 나왔고, 실제 그런 분위기도 감지됐다.

1심 선고 후 검찰이 보인 반응은 충격적이었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간부는 "대선개입 사건은 검찰의 총의가 모아진 사건이 아니다"리는 말로 입을 열었다. 무리한 법 적용을 해 독단으로 기소했다는 뜻이다. "검찰이라도 무죄가 명백해 보일 땐 항소를 포기해 사법비용을 낭비하지 않고, 죄가 되지 않는 건 깔끔하게 접는 게 바로 검사도(檢事道)"라고 했다. 또 다른 검찰 간부는 "박 대통령이 당선되지 않았으면 몰라도, 당선이 됐다면 국민 화합을 위해서라도 수사에 착수해선 안 됐다"는 말도 했다. 수사팀은 와해됐고, 수사를 지휘했던 채 전 총장이 검찰을 떠난 뒤 나온 뒤 검찰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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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전 왕조'를 부정하는데서 충성심은 시험대에 오른다고 했다. 부정하는 사람은 충신이 되고, 옹호하는 사람은 반역자가 됐다. 그리고 권력이 교체되면 이전 권력자의 업적을 깎아내리는데서 정체성을 확립시켜나갔다. 그렇게 대선개입 사건은 채 전 총장과 특별수사팀의 독선과 독단, 그리고 불필요한 분란으로 치부됐다.  

검사는 단독제 관청으로 독립성을 보장받지만, 검찰청법 7조와 8조에선 상급자와 법무부장관의 지휘 규정을 넣어뒀다. 준사법기관으로 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고 형사사법 정의를 실현하라는 이유로 독립성을 보장하면서도, 자의적이고 독선적 검찰권 행사는 막아야 될 필요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선 개입 사건은 정말 검찰권 남용이었을까. 도대체 검찰의 총의란 뭘까. 전국 2천여 명 검사가 모두 모여 투표를 해야 총의가 모아지는 것일까. 수사팀과 지휘라인에 있는 검사, 그리고 최고 수장인 총장이 기소를 해야 된다고 결정했으면, 그게 바로 검찰의 총의다.

어찌됐든, 검찰은 항소 시한 만기 하루 전에 공소심의위원회까지 열어 우여곡절 끝에 항소를 결정했다. 한 검찰 간부는 "진작부터 항소하는 게 원칙이었지만, 적어도 우리 조직 내부에서도 항소를 하기 싫어했다는 의견이 있었고, 위원회를 통해서 결정된 것이니 어쩔 수 없다는 걸 보여줘야 되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다. 바로 항소를 할 경우 부담이 크고, 또 다시 분란이나 갈등이 생길 우려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항소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대상이 검사에게 검찰권을 부여한 '국민'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이고 눈치 보기인데, 자존심 강한 검찰 입장에선 굴욕적이기까지 했다.

● 선거는 민주적 정당성 확보하는 중심적 실현수단

결과적으로 조직 전체가 흔들리는 대가로 어렵게 기소한 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됐으니 검찰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조직 내부에 알게 모르게 불안과 공포의 씨앗도 자리 잡게 됐다. 그래도 이 사건 기소로 검찰에게 남은 게 있다면 '수사의 정당성'. '공정성이 요체인 선거제도를 훼손한 세력을 처벌하려 한 공소장'이었다. 이는 검찰 본연의 자세로, 당연한 것이지만,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이 아닌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게 대선개입 사건이었다.

1심을 뒤집고 유죄를 선고한 항소심도 이런 점을 의식했을까, 검찰 수사의 정당성 부분을 언급했다. 검사를 주어로 삼지 않았지만, 판결문 139페이지부터 시작하는 공직선거법의 필요성, 247페이지부터 시작하는 원 전 원장에 대한 엄벌의 필요성이 바로 그것이다.

재판부는 "선거는 국민의 대의기관을 구성하는 민주적 방법이자, 대의기관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대의민주주의 중심적 실현수단'이고 대통령 역시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민주적 정당성을 부여받았기에 국가의 원수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렇게 정당성이 확보된 신분 덕분에 대통령은 다른 국가기관에 민주적 정당성을 중개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선거는 민주사회의 출발이고, 민주사회의 심장이라는 뜻이다.

이 때문에 선거의 전제 조건은 공정성으로 요약되고, 재판부는 "선거의 공정성은 절실하다"고 까지 표현했다.

재판부는 "과거 우리나라 선거 역사를 얼룩지게 한 관권, 금권에 의해 불법 타락 선거로부터 선거의 공정성을 지키기 위해 공선법이 제정됐다"고 밝혔다.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인용해가며 공무원의 선거개입을 금지한 이유를 설명했다.

"공무원(국정원)이 그 직을 유지한 채 선거운동을 하게 되면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특정 개인을 위해 남용할 수 있다. 직무를 통해 얻은 정보를 선거에 활용할 수 있고, 부하직원을 선거운동에 동원할 염려도 있으며, 선거에 유리한 방향으로 직무를 편파적으로 집행할 수 있다."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정확히 적용되는 것으로, 공무원의 선거개입은 선거 오염으로 이어지고, 이 때문에 처벌의 필요성이 크다는 뜻이다.
국정원 캡쳐_640

이처럼 공선법의 제정 이유, 선거개입 금지의 필요성은 검찰 수사의 정당성으로 이어졌다. 덕분에 검찰총장이 직에서 물러나고, 수사팀이 와해됐더라도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공소장'으로 수사의 정당성은 지켜낼 수 있었다. '왜 수사에 착수했냐, 수사가 분란의 시발점'이라는 말이 비겁한 말에 불과한 것도 공선법에서 찾을 수 있고, 이는 검찰 역시 과거 전례를 통해 몸소 알고 있었던 사안이기도 하다. 지난 2012년 4월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경선 사건을 보자. 정당 내부 선거였고, 문제가 불거진 후 통진당은 자체 진상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검찰은 선거제도를 부정하고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무력화시킨 사건이라며 수사에 착수했고, 차후 통진당 정당 해산의 근거로 삼기도 했다.

당시 통진당은 "검찰 수사가 정당 정치를 훼손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아무리 정당 정치라도 선거제도의 공성성과 투명성이 전제돼야 하고, 이를 위해선 수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비례대표 부정선거가 그러할 진데, 검찰 입장에선 대통령 선거는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당연히 수사에 착수해야 했고, 증거가 나왔으면 기소를 하고, 이를 두고 수사 착수 동기에 의문을 표하고 정당성 여부를 거론하는 건, 통진당과 또 다른 세력에 대한 이중 잣대이거나, 공선법 자체를 폐지시키자는 말과 다를 바 없다.

● 1심을 뒤집은 항소심…'디지털 파일' 결정적 증거 판단

이론의 여지없이 정당성이 확보된 수사였던 만큼, 이젠 항소심이 유죄를 선고하게 된 이유를 증거채택부터 트위터 내용, 선거법 적용 이유, 원 전 원장의 지시여부 등 차근차근 살펴보자. 항소심이 1심을 뒤집은 결정적 배경엔 트위터 내용에 대한 판단, 즉 선거개입의 계획성, 적극성, 목적성에 대한 기준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디지털 증거에 대한 1심과 다른 판단이 크게 작용했다. 

국정원 심리전단 5팀 직원 김 모 씨의 이메일에서 'ssecurity(이하 시큐리티)'와 '425지논(이하 지논)' 파일 두 개가 발견됐다. 검찰은 이메일 압수수색을 통해 김 씨가 자기 계정으로 보낸 이메일에서 두 파일을 확보한 것이다.  

텍스트 파일 형태인 지논 파일엔 김 씨의 활동 내역이 정리돼 있었다. 2012년 4월 25일부터 12월 5일까지 어떤 논지에 따라 활동했는지, 이 논지를 어떻게 수행해 내야 하는지, 특히 원세훈 전 원장이 간부회의에서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가 기록돼 있다. 같은 파일 형태인 '시큐리티 파일'엔 팀원들이 사용한 트위터 계정은 물론, 은밀히 트위터 활동을 한 장소도 포함돼 있다

1심은 두 파일에 대해 증거능력을 부정했다. 형사소송법 313조에 따라 '당사자가 작성을 부인한 문서는 증거로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현재 법원은 디지털 파일에 대한 증거 채택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법원은 피고인 컴퓨터로부터 확보한 파일 문서라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내가 쓴 것 맞다"라는 인정이 있어야 증거를 채택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문서 파일 뿐 아니라 녹음 파일 등 디지털 파일은 위변조가 쉬워 증거 채택은 더욱 엄격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1심은 김 씨가 처음에 해당 파일 작성을 인정했지만, 나중에 부인하면서 이런 이유 때문에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소심은 형소법 313조가 아닌 315조에 따라 증거로 채택했다. 315조는 '당연히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서류'에 대한 설명 조항이다. 이 조항엔 가족관계기록사항에 대한 증명성, 공정증서 등본, 상업장부, 항해일지 및 '기타 업무상 필요로 작성한 통상문서', '기타 특히 신뢰할 만한 정황에 의해 작성된 문서'는 당연히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서류라고 명시하고 있다.

항소심은 이 조항에 따라 김 씨 메일에서 발견된 두 파일을 '업무상 작성한 통상문서'로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그 근거로 파일엔 업무 수행 방법이 적혀 있다는 점, 반복적으로 작성된 점, '내게 보낸 메일함'에서 파일이 발견된 점, 해당 파일을 업무시간에 보낸 점 등을 제시했다. 즉, 해당 파일은 신뢰할 만한 정황에 의해 작성된 업무상 문서라는 것이다. 결국 두 파일이 증거로 채택되면서 1심에서 인정되지 못한 계정을 포함해 모두 716개 트위터 계정, 그리고 이 계정으로 작성된 27만여 글이 증거로 인정됐다

이번 증거 판단이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확정된다면, 공안 검찰 입장에선 숙원사업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과거 공안사건, 대표적으로 일심회 사건이나, 왕재산 사건에서도 검찰은 피고인들의 컴퓨터 또는 USB에서 압수한 북한의 지령문이나 기타 문서 파일에 대해 증거 능력을 부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번번이 기각 당했다. 피고인들이 본인이 작성한 게 아니라고 하면, 결국 북한에서 작성됐다는 점을 입증해야 증거로 채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이 북한에 직접 찾아갈 수 도, 그 사람을 법정으로 부를 수도 없으니, 그동안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검찰은 공안수사 개선 차원에서 증거 능력을 폭넓게 인정받도록 형소법을 개정까지 추진했는데, 이번 판결이 확정된다면 형소법을 개정할 필요 없이 증거로 인정받는 방법이 어느 정도 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 2012년 8월 20일 이후 '박근혜 후보' 확정 이후 작성글은 '공선법 위반'

항소심은 채택된 증거에 나온 트위터 계정으로 작성한 글을 정밀 분석 했다. 분석 결과는 '선거운동'에 해당한다였다. 그리고 선거법이 적용된 시점을 2012년 8월20일 이후부터로 판단했다. 8월 20일은 박근혜 후보가 새누리당 대권 주자로 확정된 날이다. 재판부는 '박근혜'라는 이름을 명시하지 않고 "유력한 대통령 후보 예정자가 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확정돼 선거경쟁구도가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시점(판결문 158쪽)"이라고 표현했다.

재판부가 8월 20일을 공선법 적용 기산점으로 삼은 건 공무원의 선거개입을 금지한 '공선법 85조1항'의 구성요건 때문이다. 이 조항이 적용되기 위해선 '특정 후보자의 존재와 이를 인식한 행위'가 선행돼야 하는데, 8월20일 이전엔 특정 후보를 위한 당선 또는 낙선 운동을 할 여건이 조성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박근혜 후보가 대권 주자로 확정된 이후부턴 '대선국면'으로 볼 수 있어, 특정 후보자의 존재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 뜻이다.

또 8월 20일을 기점으론 글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는 양상도 나타났다. 그 이전엔 이명박 정권을 홍보하는 일반 정치 글이 전체 글의 84%~97%로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면, 새누리당에서 박근혜 후보가 대선 주자로 확정된 이후부터 대선 직전까지 선거개입 글이 50%~83%를 차지했다. 박 후보가 나선 뒤, 글의 성격이 뚜렷하게 달라졌고 선거 관련 글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는 것인데, 이는 국정원이 계획적으로 움직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시 글을 살펴보면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글만 아니라 문재인, 안철수 후보에 대한 비방글도 자주 등장한다. 즉, 국정원이 낙선과 당선 운동을 오가며 전략적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국정원 댓글 트위터

'적에게 불리한 건 나에게 유리하다'는 게 선거의 첫째 전략이라는 점에서 국정원의 트위터 활동은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한 선거정국 조성을 목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글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계획적으로 움직였는지 알 수 있다. (물론 글의 수준을 보면 이들이 과연 국내 최고 정보기관 요원일 지 의심스럽기는 하다.)

<2012년 8월 20일 : 박정희 재임시절 우리나라 경제력은 2만 배 상승. 박정희 없이 대한민국 근대화가 가능했을 거라는 논리는 스티븐잡스 없이 아이폰이 탄생했을 거라는 논리와 동일. 신이 내린 박정희, 그는 우리나라의 가장 큰 축복>

어떤 글은 대선을 언급하면서, '박근혜 띄워주기'를 한다. 선거에 영향을 주는 걸 알면서도 글을 작성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2012년 9월 12일 : 박정희 박근혜 헐뜻는(*헐뜯는) 글이 많은 걸 보니 대선이긴 대선이구만. 그런데 박근혜 헐뜻는(*헐뜯는) 찌질들이 왜 이렇게 많은겨 ㅎㅎ>

안철수 후보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2012년 9월 19일엔 안 후보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하는 글들을 다수 리트윗 했고, 문재인 후보에 대해선 지속적인 비방글도 리트윗했다.

<2012년 9월 18일 : 문재인 후보는 75년 유신 반대 시위로 구속 수감된 전과가 있네요. 국법을 어긴 전과자가 대통령 출마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2012년 9월 19일 : 정치경험도 없는 놈이 90일 놔두고 대선출마? 하여간 속이 더러운 놈들의 짓거리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다.>

<2012년 11월 2일: 문재인 주변에 있는 비정상적인 군상들: 민주통합당은 인간쓰레기 집합소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뭘까? 막말의 대가 민통당 대표 이해찬을 비롯해 정치자금법 위반을 밥 먹듯이 하는 원내대표 박지원.....>


재판부는 트위터 내용을 토대로 이런 결론을 내렸다.

"8월 20일 이후, 즉 대선국면이 본격 시작된 시점 이후에 작성된 글을 보면 특정 정당과 후보자를 일방적으로 반대 또는 비난하면서 정당 사이 경쟁 기회의 균등을 침해하는 편파적 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판부는 이처럼 특정 시점을 전후로 기민하게 움직인 점을 근거로 국정원의 사이버활동은 선거개입의 목적성과 계획성 능동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 원세훈.반대세력은 모두 '종북(從北)'…선거개입 지시

국정원 직원들이 선거에 개입하는 사이버 활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원세훈 전 원장을 처벌하기 위해선 지시 관계가 입증돼야 했다. 원 전 원장은 1, 2심에서 "설사 직원들이 선거개입에 해당하는 일탈행위를 했다고 하더라도 나의 지시는 없었고,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1심은 사이버 활동이 선거개입이 아니라고 판단했고, 원 전 원장의 지시 역시 없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심은 지시 관계까지 모두 인정했다. 항소심이 지시 관계를 인정한 건, 상명하복이 고착화된 국정원의 조직적 특성 때문만이 아니다. 원 전 원장이 부서장회의에서 한 발언에서 명확한 지시를 읽어냈기 때문이다.

원 전 원장은 2009년 2월부터 2013년 3월까지 '원장님 지시 강조 말씀'을 통해 국정원이 해야 할 일을 하달했다. 그 내용을 보면 국정원이 정보기관이라는 이유로 밀행성을 빙자해 감시 대상에서 제외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원세훈 연합_640

<원세훈 주요 발언>

2009.5.15 : 국정원이 일반 국정에 대해 우리 소관이 아니다 해서 놓고 있다면 국정원이 이렇게 큰 조직으로 있을 필요가 없고, 또 사실상 무슨 지부나 부서도 여러 개 있을 필요 없이 3분의1 규모로 하면 될 겁니다

2009.12.18 : 4대강 사업, 세종시 문제 등 주요 국정과제에 대해 완벽한 논리로 무장해야...

2011.6.7 : 부산저축은행 사건도 민심이 조기에 안정될 수 있도록 관리해 해야 하고...현 정부의 잘못으로 초래된 것처럼 여론을 오도하지 않도록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2011.12.16 : 국민들이 즐기고 기쁨을 줄 수 있는 강이 될 수 있도록 유원지, 어시장 조성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개발하기 바란다.

2012.5.18 : 여수 엑스포가 관람 인원이 부족한 실정이니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바람

2012.6.15 : 4대강 및 아라뱃길은 국민들의 이용을 활성화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며...국민 눈높이에 맞는 홍보가 이뤄져야...


주요 발언을 읽어보면 국정원이 정말 정보기관일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지난해 간첩 증거조작 사건 때 휴민트(인적네트워크) 붕괴를 주장하며 검찰 수사를 막았던 국정원이 하고 있던 일이 정부 홍보였다니, 아마 휴민트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마저 든다. 물론 원 전 원장이 '정부홍보방송 국장' 역할만 수행한 건 아니다. 아래의 발언을 보면 어떤 식으로 선거에 개입하려 했는지를 알 수 있다

<원세훈 주요 발언>

2011.10.26(서울시장 보궐 선거) : 인터넷을 보면 인터넷 자체가 종북좌파 세력들이 다 잡아서 점령하다시피 보이는데...전 직원이 인터넷 자체를 청소한다 그런 자세로 그런 세력을 끌어내야 한다

2012.2.17(19대 총선 기간) : 종북좌파들은 북한과 연계해서 어떻게 해서든 다시 정권을 잡으려고 그러고...우리 국정원이 금년에 잘못 싸우면 국정원이 없어지는 거야 여러분들이 잘 알잖아.

2012.3.16 : 종북좌파들의 입지를 넓히려 하는데...아까도 이야기했듯이 확실하게 끊어줘야 해요


위 발언 증 가장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종북좌파'이다. 통진당이 종북 정당이라는 이유로 해산이 됐는데, 원 전 원장의 발언을 보면 종북 세력이 통진당 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종북 좌파가 다시 정권을 잡으려 한다'라는 말에서 보듯 이명박 정권 이전에 들어선 정부를 '종북 좌파'라고 지칭한 것이다. 통진당은 신경조차 쓰이지 않은 종북 세력이었고, 원 전 원장의 주요 타깃은 '정권을 한 번 잡아본 세력'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판결문엔 '종북'이라는 단어가 111번 등장한다. 국정원 직원들이 트위터로 전파한 내용에 들어간 단어를 모두 포함해서다. 국정원이 '종북'을 강조한 건, 심리전단이 생긴 이유가 북한과의 사이버전 때문이다. 북한이 국경이 없는 인터넷을 통해 국내 사이버 여론을 왜곡하거나 교란시킬 수 있고, 이를 막기 위해 심리전단이 만들어졌다. 창설이유이자, 존재가치가 바로 '북한과 종북'이었던 셈이다.

심리전단이 계속 활동하기 위해선 '종북'이 필요했다. 쉽게 찾을 수 없고, 구별이 힘든 북한 또는 북한 추종 세력'이 아닌, 훨씬 더 가시적인 국내 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의미자체가 모호한 종북의 개념을 또 다시 확장시켜 '종북=정권 반대세력'으로 규정지었던 것이다.

그 결과 국정원의 '종북'은 새누리당 이외의 정당을 모두 포함시키는 광범위한 단어가 됐고, 국정원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종북'으로 몰고 가는 방식으로 선거운동을 펼쳤다. 국정원 입장에선 대선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외엔 전부 '종북'이 됐으니, 이들에 대한 방해 공작은 선거운동이 아니라 '종북세력 척결'이 됐고, 이런 자기 암시와 명분 아래 비밀 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원 전 원장이 "선거개입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재판부는 얼토당토하지 않는 이런 주장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원세훈은) 북한이 대한민국의 정부정책에 반대하고 있는 이상 대한민국의 정부정책 등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세력은 곧 북한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보고 사이버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국정원의)사이버 활동을 실제로 살펴보면 북한과의 위법한 관련성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나 근거 제시 없이 정부정책에 반대하는 쪽을 비난했고,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반대 또는 지지하는 글을 전파했다.

(원세훈은) 심리전 수행의 필요성이 국회의원 선거 및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더욱 요구된다는 점도 일관되게 강조했다. 가령 '북한이 총?대선을 겨냥해 종북좌파를 통해 국내 선거개입 시도가 노골화될 것이니 사전에 확실하게 대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 그 대표적 예다"

'정부의 반대세력은 모두 종북'이라는 프레임 속에 선거개입이 이뤄졌다는 점을 재판부가 인정한 것이다. 국정원의 이런 그릇된 가치관은 원 전 원장의 발언과 지시를 통해 고스란히 국정원 직원들에게 하달돼 사이버 활동으로 구체화 됐다. 앞서 밝힌 트위터는 물론, '문재인=친노종북'의 트위터 내용도 이런 지시에 따른 결과물이었다.

<트위터 내용>

2012.9.22 : 문재인이 쌍용차 가서 펑펑 울었다? 친노종북의 판단 기준으로 쌍용차 매각의 원흉은 노무현인데요.


이런 수준 미달 트위터를 달기 위해 국정원 직원들은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오전에 사무실로 출근해 구두 또는 메모, 이메일로 원 전 원장의 발언을 토대로 한 '이슈와 논지'를 숙지했고, 오후엔 밖으로 나갔다. 직원들은 카페를 돌아다니며 '파워 트위터리안'이 되기 위해 작전을 펼쳤다. 아마 자신들의 경쟁자를, 아니면 목표를 트윗 대통령 '이외수 선생'으로 삼으면서 열정을 태운 것으로 보인다.

직원들의 작전 반경은 무척 광범위했다. 예를 들어 국정원 직원 김 모 씨는 하루동안 서울 금천구 가산동, 송파구 올림픽공원 부근, 강남구 대치동, 용인시 수지구를 돌아다니며 트위터를 했다. 이렇게까지 돌아다녀야 하는 이유는 검찰이 압수한 시큐리티 파일에 상세히 나와 있다.

<시큐리티 파일 내용 中>

"카페 주인 알바생 및 단골 이용자의 관심 대상이 될 수 있으니 동일 장소 반복 이용금지. 청사 인근(양재,판교,분당 등) 카페 출입은 최소화, 트위터 회원 가입 시 신분 위장을 위해 해외 e-메일 주소 사용"


● 진화된 국정원의 선거개입 권한남용…우체통, 초원복집부터 트위터까지

지금까지 판결문 상 1.국정원 직원들이 트위터 활동에 대한 증거채택 여부, 2.트위터 활동의 선거개입 여부, 3. 원세훈 전 원장의 지시여부를 살펴봤다. 1~3번은 유죄 판단을 위한 구성요건으로, 해당 요건이 충족됐기 때문에 원 전 원장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징역 3년에 법정구속이 됐다. 재판부는 여기에 더해 국정원의 선거개입 역사를 통해 엄벌의 필요성도 친절히 설명해줬다. 앞서 밝힌 검찰 수사의 정당성과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이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 범죄시점인 2012년과 마찬가지로, 총선과 대선이 같이 치러진 1992년에도 안기부(국정원 전신) 직원들의 선거개입이 두드려졌다고 지적했다.

* 1992년 3월 21일 안기부 직원 4명은 14대 총선에 출마한 야당 후보자를 비방하는 내용의 선전문을 선거구 아파트 우편함에 투입하다 적발된 사건.

* 1992년 9월 7일엔 전 연기군 군수가 "안기부가 주도한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연기군에 설치돼 안기부 도지부 부장, 안기부 정보관,  구수, 경찰서장, 여당 후보자 동생이 참석해 매일 선거 진행 상황을 분석했고, 자금 살포 상황, 야권 인사 동향 파악, 야당의 자금 살포 폭로 등의 대책을 세웠다"고 밝힌 사건

* 그리고 1992년 12월11일 '우리가 남이가'로 더 유명한 초원복집 사건.


당시 법무부장관이었던 김기춘 비서실장이 부산 초원복집에서 안기부 부산지부장 등 기관장을 모아 김영삼 대선 후보를 지원하긴 위해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사건은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다리에 빠져 죽자"는 건배사가 오간 게 드러나면서 더 유명해졌다. (*참고로 재판부는 '김기춘 실장'의 이름은 언급하지 않았다.)

일련의 사건을 보면, 안기부가 국정원으로 바뀌어도 그들의 행동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관여, 선거관여가 금지돼 있어도 여전히 불법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법 개정이 능사가 아리라는 점도 재판부는 에둘러 지적했다. 1992년 안기부의 선거개입이 드러나 공분을 샀고, 이듬해 안기부법이 개정됐다. 2012년 국정원 선거개입이 있은 후에도 국정원법은 개정이 됐다. 법이 개정되더라도 여전히 선거개입이 있었고, 앞으로 또 선거개입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은 국정원의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재판부도 이런 불안감 때문에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례를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는 안기부법 개정에 대해 "뼈아픈 역사적 경험과 반성적 고려에서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고, 직권남용의 소지를 제거하기 위해 법이 개정됐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또 국정원이 수차례 법 개정에도 불구하고, 직무 범위가 아닌 분야까지 눈을 돌려 불법을 저지르는 지에 대해 질타했다. 국정원의 업무범위는 국정원의 존재 이유인데, 이는 국정원법에 명시돼 있다.

<국정원법 3조(직무): 국정원은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대공(對共), 대정부전복(對政府顚覆), 방첩(防諜), 대테러 및 국제범죄조직의 수집·작성 및 배포. 형법 중 내란의 죄, 외환의 죄, 군형법 중 반란 죄, 암호 부정사용 죄, 군사기밀 보호법에 규정된 죄, 국가보안법에 규정된 죄에 대한 수사>

국정원 직무엔 선거개입이나 국정 홍보는 법률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직무에 명시된 일을 하라고, 다음과 같은 각종 혜택과 같은 규정도 만들어졌다.

- 국정원법 4조 ' 특별시·광역시·도 또는 특별자치도에 지부(支部)를 둘 수 있다',
- 국정원법 6조 '국정원의 조직·소재지 및 정원은 필요한 경우 공개하지 않는다.'
- 국정원법 12조 ' 예산안의 첨부서류는 제출하지 않을 수 있고, 비밀활동비는 총액으로 다른 기관의 예산에 계상할 수 있다'
- 국정원법 17조 '소속 직원은 무기를 휴대하게 할 수 있다' 등


대한민국 어느 기관에서도 이렇게 밀행성을 보장해주면서 막강한 권한과 함께 광범위한 예산 운영을 허용한 곳이 없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은 당연히 부패하기 마련인데, 다행스러운 점은 국정원은 이번 사건으로 더 이상 이런 권한이 필요 없다고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국민이 그들에게 부여한 권한이 지나치게 컸고, 그 권한을 온전히 사용하기엔 지금의 국정원은 자격 미달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국정원이 얼마나 방만한 조직이었면 앞서 <원세훈 주요 발언>에서 봤듯이 원 전 원장은 취임한지 세 달도 지나지 않은 2009년 5월15일 스스로 그 사실을 인정했을까.

"(중략)국정원이 이렇게 큰 조직으로 있을 필요가 없고, 또 사실상 무슨 지부나 부서도 여러 개 있을 필요 없이 3분의1 규모로 하면 될 겁니다"

● 사이버 국론 분열의 주범은 '국정원'…원세훈 "젊은 층의 우군화 추진"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9월 16일 "사이버상의 국론을 분열시키고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성 발언이 도를 넘어서고 있다"고 말했다. 산케이 보도가 문제가 된 시점이었다. 대검찰청은 곧장 유관기관 회의까지 열었고, 전단팀까지 구성해가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실시간 검열, 감청 문제로 번졌고, 사이버 망명 사태까지 촉발시킨 그 발언이다.

그런데, 대선개입 사건을 보면 정작 사이버 국론 분열의 주체는 일반인이 아닌 국정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 시민으로 위장해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뜨리고, 특정 후보에 대한 인신공격을 하고, 선거개입을 했다는 사실은 앞서 봤듯이 알 수 있다.

특히 국정원은 국론 분열뿐 아니라, 국가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막으려했다는 점에서 더욱 악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의 목적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반대되는 세력과 자신들에게 동조하지 않는 정치세력을 척결하기 위했다는 점 때문이다. 아마 국정원은 이를 전쟁으로 여겼던 모앙이다.
원세훈_500

과거 북한이 국정원의 존재가치였다면, 더 이상 휴전선 넘어에 있는 세력으론 통하지 않자, 이젠 사이버 세상에서 존재가치를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조장된 사회 갈등은 도리어 국정원의 원동력이 됐고, 이로 인해 발생한 갈등과 사회적 비용을 국정원은 또 다른 지원세력으로 만들고자 했다. 원 전 원장이 부서장 회의에서 "심리전단에서 보고한 젊은 층 우군화 강화 방안을 지속적으로 추진해라"는 발언에서 국정원의 이런 오염된 가치관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항소심 재판부는 국정원의 이런 행태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전체주의 사회와 달라서 정부의 무류성(無謬性/오류가 있을 수 없다)를 믿지 않는다"고 질타했다. 쉽게 말해서 정부는 개인과 마찬가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오류를 범했을 경우엔 영향이 훨씬 크기 때문에 더욱 비판과 견제를 받아야 된다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정부의 오류를 최소화시킬 수 있는 길은 국민의 다양한 비판을 수렴하는 것이다.

국정원의 사이버 활동 내용을 보면, 그들에게 있어  '절대선'은 대통령과 정권이었고, '절대악'은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이었다. 재판부도 이런 국정원의 단순함과 맹목성을 지적했다.  "정책은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확정되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고, 모든 국민의 자유로운 참여를 통해, 개방된 민주적 정치의사 형성 절차를 통해, 다양한 세력들의 대립과 논쟁을 통해 비로소 확인된다."

하지만, 국정원은 사이버 공론장에서 익명의 국민인 것처럼 위장해 트위터와 같은 감성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정부에 비판적 견해를 반박했다. 또 반박하는 자를 '종북'으로 몰고 갔으니, 사이버 국론 분열의 주범은 국정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존재' 그림자 사라질 수 있을까

지금까진 항소심 재판부가 1심을 뒤집고 유죄 판단을 내린 근거, 엄벌의 필요성, 기타 국정원의 행태 등을 살펴봤다. 앞서 밝힌 내용은 모두 판결문에 나온 내용들이거나, 이를 쉬운 말로 바꿔 쓴 글인데, 이젠 다시 판결문 밖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처음 말했듯이 274페이지 분량의 판결문은 '원세훈 당시 국정원장에 지시에 따라 국정원 심리전단이 조직적으로 SNS를 통해 박근혜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했다'는 짧은 문장으로 귀결된다. 요약문에서 보듯 재판부가 밝힌 선거개입 지시자는 원세훈 전 원장, 선거개입의 목적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재판부는 물론 판결문에서 박근혜 후보라는 이름을 쓰기보단 주로 '특정후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검찰이 이 사건을 기소할 때 '박근혜'라는 이름 대신 '특정후보'라고 표현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선거 개입의 목적이 박근혜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니 이 사건 수혜자를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평가하는 세력도 있다. 또 다른 세력에선 "말도 안 된다"고 주장한다. 수혜자가 박 대통령이 됐을 때 '선거개입 지시자'로 겹쳐 보이는 우려 때문일 테다.  또 "트위터가 선거에 영향을 줘봤자 얼마나 줬겠느냐, 국정원이 쓴 트위터 내용을 보면 수준 이하인데 이게 무슨 선거에 영향을 줬겠냐"는 말도 한다, "선거 전에 이 사건이 터졌으니, 박근혜 후보에겐 도리어 악영향"이라는 주장도 한다..

분명한 건 이 사건 수사 대상엔 박근혜 후보는 포함되지 않았고, 당연히 수사 대상이 아닌 이상, 지시를 했다는 것도 드러나지 않았다. 전 정권에서 발생한 사건이고, 이명박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 원세훈 전 원장과의 정치적 역학구도를 봤을 땐 박 대통령이 이런 범죄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건 가능성이 낮을 수도 있다. 또, 국정원의 사어버 활동이 선거 결과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몇 표가 박근혜 후보에게 갔는지 정량적 평가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향을 준 건 확실하다. 재판부의 말을 인용해본다.

"(국정원 선거개입으로)대의민주주의 정신이 훼손됐다는 근본적인 비난은 피할 수 없다. 또 이런 왜곡 및 침해 정도가 객관적으로 파악될 길이 없어, 이를 두고 정치 및 선거에 관여한 모든 정당과 정치인, 그들을 지지하는 국민들 사이에 의견 대립을 야기할 가능성이 생겼고, 이런 행위 자체가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주게 됐다"

"국가권력의 개입을 전혀 상정하지 못한 채 사이버 공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며, 자유롭게 토론하던 국민들은 이제 사이버 공론장의 순수성과 자율성을 의심할지도 모르게 됐다"


재판부의 판단대로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이버 활동 때문에, 국민들의 활발한 정치참여는 위축되고, 사이버 공간의 혼란은 증가하고, 긍정적 효과는 줄어들게 됐다. 뼈아픈 대목이다.

이런 상황을 보고 박 대통령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국정원이 했으니 화가 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잘못은 잘못 그 자체보다, 그 이후에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따라 평가가 달라진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대선개입 사건이 지나간 곳은 파열음이 났고, 쑥대밭이 됐다. 국정원 선거개입은 박 대통령 당선 이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파열음은 박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에 모두 발생했다. 사건이 지나가는 곳 마다 '그림자'가 따라갔고, 그 그림자 때문에 검찰도, 법원도, 심지어 사회에도 공포감이 조성됐다. 도대체 '그림자'는 누구일까.

소설 <해리포터>엔 두려움의 존재로 '볼트모트'라는 마법사가 나온다. 다른 마법사들은 볼트모트가 얼마나 두려웠는지 이름을 말하지 못한다. 대신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존재(He Who Must Not Be Named)' 또는 '그 사람(You Know Who)'으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검찰에서도 법원에서도 공소장과 판결문에서 박 대통령 이름 대신 '특정후보'라고 표현하려 애쓴 건 괜한 오해일까.

박근혜 대통령이 '그림자'라는 말이 아니다. 그림자는 '박근혜 대통령과 이번 정권이 추진한 정책,  핵심 인사들이 보인 행동과 태도'로 보는 게 정확하다. 만약 박 대통령이 유병언 사건이나 사이버 명예훼손 사건 때처럼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서도 강한 수사의지를 천명했다면 , 법무부가 검찰 수사에 힘을 실어줬다면, 정부가 국정원 개혁에 전력을 다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을까.

박 대통령이 취임한 그 순간은 이미 일어난 선거개입은 막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하는지가 더 중요한 시점이었다. 재판부가 판결문에서 밝혔듯 선거에 개입한 것이 드러나 안기부법이 개정됐어도 또 다시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이뤄졌고, 또 반복될 가능성도 있었다.
박근혜 연합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새로운 국정원 수장으로 이병기 원장을 임명했다. 이 원장은 지난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를 위해 이인제 의원에게 2억 5000만 원이 든 돈 상자 2개를 건넸던 인물이다. 기업들로부터 받은 불법정치자금, 현금이 담긴 상자를 트럭 째로 받았다고 해서 붙여진 '차떼기' 사건에 연루된 인물이었다.

선거의 공정성을 훼손한 사람을, 선거개입으로 얼룩진 국정원 수장으로 앉힌 것이다. 또 더 이상 자체 개혁이 불가능하고 자정작용은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인 국정원에 '셀프개혁'을 추진시킨 것도 박 대통령이다. 박 대통령의 이런 태도를 본 국민은 선거개입 사건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이를 본 검찰, 법원은 이번 사건을 어떻게 결론내리고 싶어 했을까.

아직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남아있다. 정치개입(국정원법 위반)만 유죄가 선고되든, 선거개입(선거법위반)과 정치개입 둘 다 유죄가 선고되든, 둘 다 무죄가 선고되든, 사법적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국정원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이미 공개됐고, 그 내용과 행위를 바라보는 시선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항소심 판결로 이미 정권의 정통성에 의문을 가지는 시선이 커진 이상, 판결 결과가 바뀌더라도 이런 시선 역시 쉽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선을 줄이는 건 박 대통령의 몫이다. 그러기 위해선 법원, 검찰, 사회에 짙게 깔린 그림자부터 지워야 되지 않을까.



▶ [취재파일] 원세훈 판결문에 왜 이런 말을?
▶ "인터넷 청소한다는 자세로"…원세훈 선거개입 발언은
▶ 법정구속 원세훈 '표정관리'에도 손 떨리고 허둥지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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