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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경찰 승진, '시험 성적'이냐 '근무 평가'냐

"도둑 안 잡고 시험 준비만" vs "윗사람에게만 잘 보이면 끝?"

[취재파일] 경찰 승진, '시험 성적'이냐 '근무 평가'냐
지난 22일 청와대 홈페이지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습니다. '2015년 경찰 승진 시험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시험, 사격, 상점 모두 100점 만점을 받았는데도 경찰 승진에서 탈락했다는 내용입니다. "4살, 1살 난 두 아들은 1년 동안 아빠의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엄마가 혼자 육아를 감당하면서 아빠의 승진 시험 공부에 희생당했다"고 적었습니다. "1년의 노고와 고생이 이렇게 허무하게 짓밟힐 수 있느냐"며 "왜 승진에서 탈락했는지 알 수 있도록 점수나 등수라도 공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억울하고 황당하고 화가 난다"고 했습니다. "수백 명의 희생자를 냈으니 기분이 좋으십니까"라며 강신명 경찰청장을 직접 겨냥하기까지 했습니다.

● 변별력 없는 '물시험'…'근무 평가' 비중 높아져

발단은 지난 17일 전국적으로 치러진 경정 이하 승진 시험입니다. 형법, 형사소송법, 경찰행정법 등 법 이론과 실무 지식을 평가하는 이번 시험에 총 18,689명이 응시했고, 이 가운데 무려 2,422명이 만점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만점자 중 892명(36.8%)이 승진에서 탈락했습니다. 만점자 10명 중 4명이 탈락한 셈입니다. 물론, 과거에는 만점을 받으면 승진은 '따 놓은 당상'이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시간은 다시 강신명 경찰청장이 취임한 지난해 8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강 청장의 취임 일성은 "기본으로 돌아가자"였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경찰이 승진에서 우대받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이번 평가 방식입니다. 지난해까지는 '시험 성적 60% + 근무 평가 25% + 기본 교육 15%'였는데, 올해는 '시험 성적 60% + 근무 평가 40%'로 변경됐습니다. '기본 교육'의 경우 교육 과정을 이수만 해도 점수가 주어지기 때문에 사실상 '근무 평가'의 비중이 늘어난 것입니다.

게다가 시험의 난이도도 '물수능'에 비유될 정도로 지난해에 비해 훨씬 쉬워졌습니다. 시험은 '구구단처럼' 쉽게 내고 업무 중심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이 경찰청의 방침이었습니다. 그만큼 시험의 변별력은 떨어졌고, 상대적으로 근무 평가의 비중은 더욱 높아졌습니다. '근무 평가'가 승진을 좌우했다는 말이 경찰 내부에서 나오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 '근무 평가' 점수는 비공개라는 것. 통상 경찰 승진 시험을 위해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까지 '올인'해 온 터라, 이번 시험 응시자들의 반발은 커지고 있습니다.

● "도둑 안 잡고 시험 준비만" vs "윗사람에게만 잘 보이면 끝?"

경찰청도 나름의 논리를 앞세웁니다. 일선에서 도둑은 잡지 않고 승진 시험에만 매달리는 경찰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법 이론과 실무 지식도 중요하지만, 평소 성실히 근무하는 경찰이 우대받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일리가 있습니다. 경찰 내부에서 "저 친구는 일은 안 하고 시험 준비만 한다"는 불만이 제기돼 온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경찰청 관계자는 "일 중심으로 평가해야 한다, 일 잘 하는 사람이 승진해야 한다는 것이 강신명 청장의 일관된 방침"이라며 "'시험은 쉽게, 근무 평가 비중은 높게'라는 기조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재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앞서 청와대 게시판에 글을 올린 사람은 "관할 해당 직위의 근무자가 한 사람이면 그 사람은 일을 못해도 근무 평가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고, 다른 지역의 3~4명씩 되는 사람들은 아무리 일을 잘해도 좋은 성적을 못 받는데, 이게 올바른 평가 방식이냐"고 반박했습니다. "시험 때문에 근무를 태만히 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그런 사람들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이 피를 봐야 하느냐"고 했습니다.

다른 경찰관도 "시험에서 만점을 맞아도 지휘관에게 밉보여 인사 고과를 잘못 받으면 승진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다"면서 "자칫 윗사람에게만 잘 보이려는 그릇된 조직 문화가 정착될 수 있다"고 꼬집었습니다.

이에 대해 경찰청은 "동료와 부하가 해당 경찰관에 대해 평가하는, 이른바 다면평가를 해 보면 상관이 평가한 점수와 거의 똑같다"고 밝혔습니다. 다만, 큰 기조는 유지하면서, 시험의 세부 난이도나 근무 평가의 객관성, 공정성을 높일 수 있는 방안은 검토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경찰청의 현 평가 방식이 일방적으로 잘못됐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평가 방식이든 장점이 있으면 단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경찰 내부의 동의를 거치는 과정이 부족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경찰관 수가 10만 명이 넘은 지 오래입니다. 경찰 조직만큼 승진이 사기 진작에, 조직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는 조직도 드물 것입니다. 좀 더 충분한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적어도 1년 정도 유예 기간을 두고 평가 방식을 바꿨으면 어땠을까요? '모 아니면 도'식 보다는, 점진적으로 '개'나 '걸'과 같은 방식은 불가능했을까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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