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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헌법, 법치주의, 형벌 목적 모두 어긋난 기업인 사면 - 가석방

기업 오너는 죄인도, 애국자도 아니야

[취재파일] 헌법, 법치주의, 형벌 목적 모두 어긋난 기업인 사면 - 가석방
● 법 앞에 불평등이 강요된 사회, 기업인에게 애국심이 강요된 사회

지난 2009년 12월 29일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기자실.

“법무부에서 뭔가를 발표한다는 데, 이건희 회장 특별사면이라는데”
“이 회장은 형량이 확정된 지 넉 달도 안 됐잖아.
“지금 발표한다고 문자 왔어”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한 사면이라는데...”
“말도 안 돼. 이 회장 집행유예잖아. 비행기 타는데 지장이 있나?”
“올림픽 유치를 위해서라면 정정당당한 올림픽 정신은 훼손해도 된다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한 명을 위한 사면을 하겠어, 특검까지 한 사안인데...”

이건희 연합 500

그날 이귀남 전 법무부장관은 역대 사면 중 가장 웃기고도 슬픈 이른바 ‘원 포인트 사면’을 발표했다. 주식회사 삼성을 이 씨 가문의 영속성을 위한 기업으로 만들기 위해 법을 유린했던 이 회장은 그렇게 사면됐다. 당시 법무부 검찰국장이 나와서 사면 이유를 설명하던 게 생생히 기억난다. “국익을 위한 실용적 결정입니다.”

그날 온종일 판사와 검사들의 의견을 전화로 물어봤다. “밤새 고생해서 수사해봤자 뭐 하냐, 사면하면 끝인데.”라는 원론적 대답부터, “올림픽 유치 못하면 사면 취소하는 조건부 사면인가요?”라는 자조도, “거국적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도 있다”는 법조인도 있었다. 그 중  법무부에 근무하던 검사가 말한 게 기억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마음껏 욕해라. 어떤 핑계거리가 없으니까”

사면은 대통령의 권한이기에, 법무부 역시 청와대 뜻에 따른 죄(?) 밖에 없을 테지만, 법조인의 양심이 노골적으로 훼손된 모양이다. 그리고 그날 법무부는 서초동 기자실에 치킨을 돌렸다. 갑자기 잡은 브리핑으로 기자들을 아침부터 정신없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배는 그 치킨을 보고 MSN메신저로 말을 했다. “내가 아무리 치킨을 좋아해도 저걸 먹으면 토가 나올 것 같다. 저건 법치주의와 바꾼 치킨이야. 너도 먹지마.”  

그날 그렇게 대통령의 실용적 결정 앞에 국가의 품격과 법치주의는 무너졌고, 기자실엔 치킨 냄새가 진동을 했다. 법원 기자실을 뒤흔들었던 불쾌한 치킨 냄새가 2015년 다시 재현될 조짐이다.

● 부자는 죄인도, 애국자도 아니다

최근 다시 불거진 대기업 오너 사면-가석방 논란은 지난해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치 잘 구성된 드라마처럼 이어지고 있다. 황교안 법무장관과 최경환 부총리가 처음 기업인 가석방을 언급했고, 이후 여당 대표인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사면 가석방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새해 벽두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의 발언으로 ‘기업인 봐주기’ 드라마는 ‘기(起)-승(承)-전(轉)’까지 이르게 됐다. 아직 결(結)은 나오진 않았지만, 누군가는 이미 정해져있다고 말을 한다. 기업인에 대한 사면-가석방을 주장하는 쪽의 근거는 하나로 요약된다. 바로 ‘경제 활성화’다. 추가적 근거를 제시한다면 ‘기업인이 역차별을 받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이다.

그렇다면, 경제 활성화가 사면-가석방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얼마 전까지 기업 오너의 형사 판결문에서 찾아볼 수 있는 상투적 어구를 한번 돌이켜보면, 이런 주장이 얼마나 허구에 가까운지 알 수 있다.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 기업 오너들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받았다. 기업에 다니는 일반 직장인은 회삿돈 수 천만 원만 빼돌려도 수감되지만, 기업 오너는 수 천억 원을 횡령하고, 수 조 원대 분식회계를 해도 ‘공’ 덕분에 법정 밖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2008년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은 700억 원대 횡령과 1천억 원대 배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에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최종 선고됐다. 반면, 2년 건설회사에서 일하면서 회삿돈 1억 원을 횡령한 경리 직원 A씨는 징역 8월의 실형을, 또 , 기금 2억여 원을 횡령한 동창회 직원 B씨는 징역 1년6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정 회장과 A씨, B씨 중 가장 혐의가 큰 사람은 누구일까. 범죄의 양태는 다르겠지만, 횡령 액수로만 보면 정 회장의 형량이 가장 높아야 한다. 그런데 A씨와 B씨는 횡령액이 늘어나면서 형량도 비례했지만, 정몽구 회장에겐 반비례였다. A씨와 B씨가 정 회장과 다른 건 두 가지였다. 상대적으로 너무 적게 횡령했고, 그들 이름 뒤에 ‘회장’이란 직함을 가지지 못했다는 것. 

이렇게 기업 회장에 대한 괴상한 예우는 우리 법체계를 희극적이고, 비극적으로 만들었다. 법원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 사건을 심리한 1심은 그에게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하면서도 법정구속 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크게 저해하는 행위”라며 엄벌의 필요성을 밝혔지만, 실형 선고에 상충되는 단서를 달았다.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했다”며 법정구속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투명한 경영은 시장 질서를 교란시켜 경제에 부정적 파급 효과를 주는 게 당위적이고 상식적인 결론인데, 법원은 비상식을 택하며 희극적인 선고를 한 것이다. 2심은 어땠을까. 2심은 1심의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추가했다. 2심은 집행유예를 위해 1심의 희극을 비극으로 만들었다. 8,400억 원의 사회공헌을 첨가하면서 실형을 면하게 한 것이다. 1심과 양형을 고려하는데 있어 차이가 나는 건 8,400억 원이었다. 
현금 관련

이를 두고 한 검사는 “돈을 받고 집행유예를 팔았다”고 평했다. 표현은 거칠었지만, 다들 공감했다. 법전에서 찾을 수 없는 사회공헌이라는 걸 새롭게 만드는 ‘창조 처벌’을 하면서까지 집행유예를 내렸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화들짝 놀라 파기환송을 했지만, 형량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확정됐다. 그리고 정 회장은 두 달 뒤 사면을 받았다.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공’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쯤 되다보니, 경제발전의 공이 중세 유럽 교황의 면죄부와 다를 바 없는 말이 나왔다. 성당 건립기금을 내고 받은 면죄부가 천국의 열쇠가 됐듯, 경제발전의 공은 기업 오너만의 사법부 자유이용권이 된 셈이었다.  그렇다면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실체가 있을까. 

기업 오너에게 경제발전에 이바지 한 공이 있다는 건 부정할 필요도, 부정할 수도 없다. 일반 시민에게도 그 공이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오너가 경제 활동을 하는 사이, 일반 시민은 저임금-고노동으로 노동권을 희생했고, 국산품을 애용하면서도 허리띠는 졸라맸다. 일반 국민에게도 ‘경제 발전에 이바지 한 공’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앞서 말한 회사 경리가 동창회 간부 등 일반 시민들의 형사 판결문에선 그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국민이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공은 정량적 평가가 불가능해서가 아니다. 기업 오너 역시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정도를 산출 못한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은 애당초 계산할 수도, 계산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경제발전의 기여도가 불법 행위를 세탁할 옥시크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이 훈장으로 둔갑돼 양형 사유에 참작했던 게 코미디였을 뿐이다. 

기업 가치 상승이 국가 경제발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지만, 우리 헌법과 근대 민주국가가 채택한 ‘국민이 국가’라는 국민 주권론에서 본다면 이런 견해는 유아적 발상에 가깝다. 기업인의 이윤추구를 경제발전의 공으로 돌리기 위해선 기업의 이윤이 늘어난 만큼 국민 삶의 질도 향상돼야 하는 직접적 연결점이 있어야 한다. 또 대기업 오너일가의 활동 목적이 군인들의 국가 보위처럼 애국심이어야 한다. 하지만, 기업의 첫째 목적이 이윤추구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기업인에게 애국심을 강요해야 하고, 기업 심벌에 태극마크를 달아야 한다는 주장을 그 누구도 하고 있지 않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기업의 순이익이 늘어난 만큼, 국민 개개인 소득 수준도 정비례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고용 창출이라는 투자는 어떨까. 지난 이명박 정권 5년간 대기업의 현금보유액만 2배 이상 늘었다. 기업의 곳간이 차고 넘치는 사이, 취업 준비생은 취업 포기자가 됐고, 비정규직은 늘어났다. 이를 두고 기업 오너를 처벌하지 않았다. 처벌해서도 안 된다. 기업이 저비용을 노리고, 국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해 국내에서 실직자가 생겼을 때, 정부가 이를 강제로 막지 않았다. 반대로 국산품을 구매하지 않는 국민에게 매국노라고 욕할 수 있을까. 해외에서 만들어진 국내기업 제품과 국내에서 만들어진 해외기업 제품 중 어떤 제품을 사야 형사재판에서 국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기업의 이윤 추구도 불법이 아니고, 부자는 죄인이 아니다. 또한 부자는 애국자도 아니다. 이미 기업인들은 기업발전을 통해 자신들이 노력한 만큼, 아니 그 보다 많은 이익을 국가의 세제 지원 등 각종 정책으로 챙겼다. 이런 부의 축적이 정당한 방법으로 이뤄졌을 경우 욕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기업인들은 기업발전(혹은 경제발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이미 다 얻었고, 국가가 투자 유발을 위해 제공한 과실도 그들의 입으로 떨어졌다. 불법을 저질러 법정에서 선 기업 오너, 그들의 불법행위를 처단하기 위해 작성된 형사 판결문에서 ‘기업발전의 공’을 나라를 위해 목숨 건 ‘국가유공자의 훈장’처럼 만들어선 안 된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다시 말해 기업 오너가 이룬 이익 증대 행위는 일반 직장인과 차별을 둘 만큼의 훈장과 같은 경제발전의 공이 아니라 기업발전의 공이었을 뿐이라는 말이다.

대기업 수사로 고생을 한 검사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금 추적을 해보면 기업엔 국적이 없더라. 와인을 마시고 싶어 프랑스 포도농장을 사고, 가방을 사기 위해 이태리를 가고, 커피를 마시기 위해 뉴욕 고급주택을 구입하고, 해외에서 태어난 자녀를 국내에 있는 외국인학교에 보내는 순간, 기업 오너에겐 국적도 무의미해졌다. 이미 세계인이 돼 버린 그들을 소환하기 위해 출국금지부터 하면 항의가 빗발친다. 원화, 달러, 엔화, 유로화를 가리지 않고 벌어야 하는 세계인을 한국에 가뒀기 때문이다. 검찰 수사를 받을 때도 세계인이던 그들이 철저하게 한국인이 될 때가 있다. 한국 법정에 설 때다. 그 때서야 기업 오너는 자기 암시를 한다. 나는 한국인 애국자라고...” 판사들도 이런 말을 들었을까. 불과 2~3년 전 부턴 기업 오너 판결문에서 ‘경제발전에 이바지한 공’이라는 구절을 찾기 어려워졌다.  

● 헌법 11조가 ‘신(神)’ 앞이 아닌 ‘法’ 앞에 평등을 택한 이유

경제 활성화를 기업 오너의 사면-가석방의 근거로 삼는 건, 경제 발전에 기여한 공을 집행유예 사유로 삼은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논리가 조약하고, 자기 모순적이고, 사회적 공감대도 얻지 못한다. 국가의 근간인 헌법을 기초로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 결론이다. 

헌법 11조는 ‘법 앞에서 평등’을 말하고 있다.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헌법11조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1조만큼 잘 알려져 있다. ‘공무원은 국민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헌법 7조가 공직자의 자세를 뜻한다면, 11조는 국민이 항상 기억해야 할 권리이다. 법 앞에선 부자든 빈자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두 평등하다는 것으로, 이 말은 모든 이가 법으로 평등하게 보호 받고, 반대로 죄를 지었을 땐 똑같이 처벌을 받는다는 우리 사회의 불가침의 약속이다.  

헌법 11조는 한 마디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이자, 동등한 대우를 보장한 권리이다. 다른 기본권을 보장하는 기본권으로, 기본권 중에 기본권이다. 평등권은 헌법 이전부터 존재하던 자연권으로, 신이 부여한 권리라고 했다. 그 덕분에 아무리 국가라고 하더라도 평등권을 침해하는 법률을 도입할 수 없도록 민주주의는 택했다. 허나 천부인권이라고 하더라도 현실에서 생기는 불평등을 막을 순 없었다. 신이 부여한 권리였지만, 신 앞에서 권리가 현실의 권리로 구현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우리 헌법도 신이 아닌 법 앞에서 평등을 택했다.

신이 부여한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선 법 앞에서 평등부터 선행돼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 때문이었다. 또 실질적 평등은 국가가 이루지 못하더라도, 법 앞에서 형식적 평등이라도 반드시 보장하라는 민주주의의 선언이기도 하다. 같은 죄를 지어도 직장인은 실형을 선고 받고, 기업 오너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수준의 풍족함을 누리는 사회는 신의 영역인 유토피아나 이상향일 수 있다. 그러나 연간 1천만원만 저축할 수 있는 직장인은 사면과 가석방 대상자가 될 수 없지만, 1조를 투자할 수 있으면 사면-가석방 대상자 될 수 있는 사회는 만들어선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펀치

SBS에서 방영하는 <펀치>라는 드라마가 사람들이 공감을 받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우리 사회가 헌법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자, 헌법 가치에 대한 시민들의 목마름이 반영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드라마 속 법무부 장관은 신하경 검사(배우 김아중)에게 "청와대의 지시"라며 "안 그래도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 회장을 수사하는 건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기업인 수사 중단을 지시한다. 신하경 검사의 대답이 걸작이다. "한 집안의 가장도 구속하는데 무엇이 문제냐".

경제 활성화가 기업 수사 중단의 이유가 된다면, 또 사면의 근거가 된다면, 법 앞에서 평등한 사회가 실현될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하고 자명한 진리를 오염시키다 보면, 더 큰 것을 잃게 된다. 우리 사회가 사면과 가석방을 기부 입학과 동일시하는 수준의 후진적 사회는 아니라고 시민들은 믿고 있고, 믿고 싶어 한다. 헌법적 가치는 돈과 바꿀 수 있는 거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시민들은 알고 있다.  

● 사면 76일 만에 다시 범죄에 착수한 기업 오너
최태원 연합

기업인 가석방-사면 논란 중심엔 최태원 SK회장이 있다. 지난해 2월 횡령 범죄로 징역 4년이 확정돼 수감생활을 하는 최 회장을 이쯤 되면 석방해줘도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 형식이 사면이면 좋고, 적어도 가석방은 시켜줘야 한다는 분위기를 특정 세력을 중심으로 조성되고 있는 걸로 보인다. 

사면-가석방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것이기에 그 필요성을 따로 구구절절 언급할 생각은 없다. 법 만능주의 사회가 인간 중심의 사회가 아니고, 인간성이 배제된 법만으론 인간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그러나 사면이든 가석방이든 원칙이 있고, 그 원칙은 형벌의 목적에서 찾을 수 있다. 형벌의 목적은 응보(應報)이다. 쉽게 말해서 사적 복수를 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국가가 법테두리에서 합법적인 복수를 해주는 것이다. 또 다른 목적은 교화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면 안 되기에, 죄를 지으면 형벌을 통해 죗값을 치르고 죄를 뉘우치게 하고, 다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방이다.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유사 범죄를 막고, 법치주의를 확립시킨다는 것이다. 이런 목적이 달성되는 시기가 개개인마다 다르기에, 사면과 가석방으로 여지를 주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태원 회장은 사면-가석방 대상자가 될 수 있을까. 최 회장의 교정생활이 어떤지 알 수 없고, 또 내심으로 뉘우치고 있는지도 확인할 방법이 없다. 사면심사위원이든 가석방 심사위원이라도 수감자의 내면을 정확히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과거 경험을 살펴보면 짐작은 할 수 있다.

지난 2011년 11월, 검찰이 SK를 압수수색하며 최 회장 수사를 공개수사로 전환했을 때다. 서울중앙지검 기자실은 연일 바쁘게 돌아갔다. 당시 최 회장 관련 취재를 하면서 그가 2011년 이전에 사면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차례 사면을 받은 기업 회장이 또 범죄를 저질렀나, 이런 의심을 하면서 사면과 새로운 범죄의 연관성을 찾아봤다. 

디데이 계산기가 명쾌한 진리를 얘기해줬다. 당시 사면의 효과는 ‘0’도 아니고 ‘-’였다는 것을.
    
최 회장은 1조 5천억 원대 분식회계 혐의 등으로 지난 2008년 5월 집행유예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그리고 그 해 8월 15일 사면됐다. 유죄 판결 확정 79일 만에 ‘죄가 없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초고속 사면을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2011년 수사 대상이 된 횡령 범죄였다. 2011년 검찰이 수사한 최 회장의 횡령 범죄는 2008년에 일어난 일이다. 사면이 이뤄진 그 해의 일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최 회장이 횡령 범죄에 착수한 시점은 2008년 10월 29일로, 다시 디데이 계산기로 산출해봤다.

사면을 받은 지 76일 만에 다시 횡령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나왔다. 요약하면 과거 범죄에 대한 유죄 확정일부터 사면일까지 79일, 사면일부터 또 다시 범죄 착수 시점까지 76일 뿐이 안 걸렸다. 

이런 최 회장에게 일부 세력은 가석방 요건을 충족한 이상 역차별을 해선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차별은 대상자가 있을 때만 인정받을 수 있다. 최 회장에게 있어 차별의 대상자는 누구일까. 사면 뒤 76일 만에 다시 유사 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사면이 법 앞에서 평등을 훼손하고, 형사사법제도를 유린하고, 법치주의를 오염시키고, 특권층을 보호해주는 도구로 전락했을 땐, 사면도 가석방도 범죄일 뿐이다.

● 사면과 가석방은 약자를 위한 ‘관용’이자 ‘배려’ 

사면과 가석방이 매번 논란이 되고, 사회통합이 아닌 불협화음만 야기하는데도 계속 존치되는 이유는 그래도 그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필요성에 대해 한 판사 출신 교수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사면과 가석방은 행정부에서 하기 때문에, 삼권분립을 훼손하는 측면이 강하다. 유무죄를 판단해 형을 정하는 사법부의 고유 권한을 무력화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 때문이다. 용산참사 철거민에게 법관은 실형을 선고했다. 그들이 남일당에 올라 외친 요구는 정당했지만. 그 과정은 불법이었다. 정당한 법집행을 거부하며 민주적 절차를 훼손시켰고, 남일당은 불에 탔고, 경찰관도 철거민도 숨졌다. 법원이 이들에게 실형을 선고한 건 법치주의를 위해서다. 하지만 그들을 법정에 서게 만든 데는 이 사회의 무관심과 정부의 정책 실패가 큰 몫을 차지한 건 부정할 수 없다. 결국 이렇게 피고인이지만 피해자이기도 한 사회적 약자들이 비로소 사면과 가석방에 대상이 될 수 있는 건데, 이들에 대한 사면과 가석방조차 아주 엄격하게 이뤄져야 한다.”    

지금까지의 사면을 돌이켜보면 과연 그랬을까. 역대 정부가 이건희 회장, 정몽구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 이름 뒤에 ‘회장’이 붙은 사람들을 줄줄이 사면할 때, 국민들은 관용과 배려를 느끼지 못 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느낀 게 있다면 법치주의에 대한 극단적인 냉소감, 좌절감 또는,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반감일 테다.

일부에서 말하고 있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사면-가석방은 표현을 바꿔보면 그 실체를 쉽게 알 수 있다. ‘경제 활성화’는 ‘투자’의 다른 표현이다. 결국 기업 오너가 석방되면 사회에 거액을 투자하겠다는 말이 된다. 15세기 교황이 성당 건립자금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다 종교개혁이 발생했듯이, 사면이 특정 계층의 보호구가 됐을 때 불행한 역사가 반복된다. 최고 권력자의 자의적인 사면은 법치의 틀을 무너뜨리면서 사회 통합은 커녕, 혼란만 야기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피해가 얼마나 오래됐으면 기원전부터 제(齊)나라 관중이 사면의 해악을 지적했을까.  "사면은 이익은 적고 해악은 크다. 사면을 없애면 조그만 해악은 있어도 이익이 크다. (凡赦者, 小利而大害者也. 毋赦者, 小害而大利者也.) 사면이란 것은 달리는 말의 고삐를 놔버리는 것과 같으나,사면을 폐지하면 난치병을 낫게 만드는 묘약을 얻는 것과 다름없다. " <관중의 법법(法法)>

현재 사면-가석방을 요구하는 쪽이 법과 원칙을 강조했던 보수진영이라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눈여겨 봐야할 대목이다. 촛불집회, 용산참사, 제주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등 사건에서 보여준 그들의 태도는 단 하나, 엄격한 법집행이었다. ‘평화 집회’에서 시민들이 정당한 요구를 해도, 도로 밖으로만 나가면 ‘불법 시위’라며 강력하게 처벌했다. 경찰관의 멱살만 잡아도 공권력의 부정이라며 엄단 기조를 보였다. 통합진보당 해산 땐 ‘헌법 수호“라며 박수를 쳤다. 법치주의 확립과 헌법 수호를 위해선 일말의 여지를 줘선 안 된다는 게 그들이 스스로 밝힌 보수의 철학이었다. 그렇다면 대기업 오너에 대한 사면-가석방은 법치주의 확립과 헌법 수호에 부합하는 것일까. 부합된다고 여긴다면, 그들이 말한 보수의 철학은 자본의 이익을 쫓는 수단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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