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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주군을 끝까지 모시겠다" 왜곡된 충성심의 말로

[취재파일] "주군을 끝까지 모시겠다" 왜곡된 충성심의 말로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이 비행기를 되돌린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이 발생한 지도 한 달이 지났습니다. 대한항공 관계자 등 많은 이들이 검찰과 국토교통부 조사를 받았고, “무엇이 문제이냐?”라며 큰소리쳤던 조 전 부사장도 결국 구속됐습니다. 그릇된 선민의식과 갑의 횡포, 그 밑에서 신음할 수밖에 없었던 ‘을’들을 보며 저도 마음이 매우 아팠습니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난 지금, 제 마음속엔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바로 조 부사장의 핵심 측근으로 알려진 객실담당 여 모 상무입니다. 곁에서 지켜본 그는 조 전 부사장을 지키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호위 무사’ 같았습니다. 여 상무는 사건 초기, 박창진 사무장 등 승무원들에게 진술을 바꾸도록 강요하거나 회유하고, 친분이 있는 국토부 공무원을 통해 조 전 부사장에게 유리한 조사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애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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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여 상무가 작성해 조 전 부사장에게 올린 보고서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박창진 사무장은 서비스 전반에 대한 업무 지식이 부족하다. 비행 준비 미비로 비행 업무에 커다란 혼선을 야기했다. 승무원들에 대한 경위서를 접수했으며, 이들에 대한 조치사항은 별도로 보고하겠다.” 여 상무는 사건의 모든 잘못을 조 전 부사장이 아닌 승무원들에게로 돌렸습니다.
 
하지만, 조 전 부사장에 대한 충성심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는 건 여 상무가 검찰조사에서 한 진술입니다. 검찰이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영장을 청구하겠단 뜻을 밝히자, 여 상무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끝까지 주군을 따르겠다.” 결국, 자신의 뜻대로(?) 조 전 부사장과 함께 구속됐습니다. 현대판 ‘사미인곡’으로 부르기에도 손색이 없어 보입니다.
 
● "머리가 있는 충성은 충성이 아니다"

여 상무를 취재하며, 전 최인호 선생의 역사소설 한 대목을 떠올렸습니다. 신궁의 활 솜씨를 가진 한 성주가 궁사 99명을 뽑아 자신의 그림자처럼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가 활을 들면 동시에 활을 들고, 시위를 당기면 똑같이 따라 활을 쏘도록 끊임없이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부하들의 충성심을 테스트하기 위해 마당에 있던 자신의 애첩을 향해서 활을 쏘았습니다. 주변에 있던 부하들도 동시에 그녀를 행해 화살을 당겼습니다. 물론, 애첩은 그 자리에서 ‘고슴도치’가 돼 죽었습니다.
 
그런데 부하 중 한 명이 머뭇거리며 활을 쏘지 않았습니다. 성주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넌 왜 활을 쏘지 않았느냐?” 부하가 답했습니다. “애첩이 죽으면 주군의 상심이 클 거 같아서 차마 화살을 당길 수 없었습니다.” 성주는 그 자리에서 부하를 죽였습니다. ‘머리를 쓰는 충성’은 충성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조 전 부사장이 그렇게 과감하게 비행기를 되돌릴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여 상무 같은 ‘생각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하는’ 충성심 강한 부하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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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곡된 충성심의 근원 : '무기력함'

취재과정에서 만난 승무원들은 여 상무를 ‘저승사자’라고 불렀습니다. 승무원들에게 여 상무는 오너 일가에게 잘 보이려고 부하 직원을 ‘피도 눈물도 없이’ 압박하고, 징계하고, 혼내는 그런 상사로 보였단 겁니다. 그는 왜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란 얘길 들었을까요? 이에 대해 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각인 이론(imprinting)’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알에서 갓 태어난 오리는 가장 먼저 본 것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인다. 알에서 나온 뒤 닭을 제일 먼저 보면, 어미 오리가 옆에 있어도 닭을 계속 쫓아다닌다. 진공청소기를 맨 처음 보면 죽을 때까지 진공청소기에 강한 애착을 보인다. 가장 먼저 마주한 대상을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한 것이다. 이런 현상을 ‘각인(Imprinting)’이라고 한다.(※ 독일 뮌스터대학의 '콘라트 로렌츠'는 이 실험으로 1973년 ‘노벨상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알에서 갓 태어난 상태는 그 생명체의 일생 중 가장 무기력한 순간이다. 그렇게 무기력할 때 눈앞에 나타난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절대적 의존의 대상이 된다. 결국, 집착의 근원은 눈앞의 대상이 아니다. 나 자신이 가지는 ‘생명체의 무기력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해직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 개인적인 명예욕 등이 여 상무로 하여금 그렇게 맹목적으로 충성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 ‘비정상적인’과 ‘비정상’의 차이

또 다른 심리학 교수의 분석도 눈여겨 볼만합니다. “어떤 사람이 몇 가지 물건 중 하나를 선택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물건을 대하는 그 사람의 반응은 선택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자신이 ‘좋은 물건’을 선택했다고 확신하며,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낮게 평가한다. 이런 현상을 경제학에선 ‘상표 충성도(Brand Royalty)’라고 한다. 그런데 자기가 선택한 상품에 대한 불안감이 클수록 이런 경향은 심해진다. 어쩌면 여 상무의 지나친 충성도도 자신이 모시는 오너에 대한 '내적 불안감'에서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여 상무는 자신이 모시는 오너 가 좋은 사람이 아니란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고, 그런 불안감을 잊기 위해 더 충성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불안감을 느끼는 모든 사람이 여 상무와 같은 선택을 하는 건 아닙니다. 실제로 사건 당사자인 박창진 사무장은 여 상무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갖은 압박과 회유에도 당당하게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소설가 구효서의 지적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비정상’과 ‘비정상적인’ 것은 엄연히 다르다. 울며 겨자 먹기, 즉 까라면 까야지 할 때도, 싫다는 감정을 소유할 수 있으면 그는 ‘비정상’이라고 할 수 없고,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비정상적인’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상식과 올바른 가치관을 지켜 최소한 ‘비정상’이 되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단 겁니다. ‘무조건적인 충성심’으로 무장한 세계관은 정상적인 균형감각을 마비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자유 의지’를 지키기 위한 노력


이가 없는 아기는 음식물을 주면 그대로 삼킵니다. 그러나 이가 있는 어른은 음식물을 잘게 씹어서 넘깁니다. 성숙한 사람은 누군가의 지시나 견해를 그대로 삼키지 않고 잘게 씹어 소화합니다. 씹지도 않고 그대로 삼키다 보면 언젠가는 복통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아기처럼 씹지도 않고 꿀꺽 삼키는 행위까지를 ‘충성’ 혹은 ‘소신’이라고 우기는 건 곤란합니다.
 
정신분석가 프리츠 펄스(Fritz Pearls)는 인간의 ‘자유 의지’가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환경 의존’으로부터 ‘자아 의존’으로의 변화, 다시 말해 사회나 타인의 가치관에 의존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게 인생의 핵심 과제라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박 사무장은 외적인 힘에 저항해 자신의 ‘자유 의지’와 ‘존엄성’을 지키려고 노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 상무는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펄스는 사람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갖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하고 쓸쓸한 일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불행한 사회 구성원들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당연히 어두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곳곳에서 더 많은 ‘박창진 사무장’이 나오길 기대합니다. 

※ 기사 작성 시 정혜신 박사의 '남자 vs 남자(개마고원)'을 일부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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