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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전시장에 부는 '디지털' 바람

[취재파일] 전시장에 부는 '디지털' 바람
최근 맡고 있는 업무가 바뀌면서 전시를 담당하게 됐습니다. 돌이켜 보면 학생 때는 책도 좀 읽고 가끔 전시나 공연도 보러 다니는 나름 '문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직장생활 시작한 뒤론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휴일이면 집에만 박혀있는 날이 늘다보니 점점 전시장과 멀어지더군요. 십수 년을 적조됐던 전시장에 최근 다시 드나들면서 말 그대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전시장에 부는 디지털 바람 때문입니다.

요즘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전시에 가면 예외 없이 곳곳에서 모니터를 발견하게 됩니다. 터치스크린 기능이 있는 대형 모니터를 배치해 놓고 관람객들이 전시와 관련된 자세한 정보를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는 건 기본입니다. 벽에 걸려 있는 원작을 카메라로 촬영해서 모니터를 통해 틀어주는 경우도 늘고 있습니다. 바로 옆에 '오리지널'이 걸려 있는데 굳이 작품을 따로 찍어서 모니터로 보여주다니 예전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황당하기까지 한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가 가끔 전시장에 다니던 때를 돌이켜 보면 예술과 기술 사이에 엄격한 선을 긋는 경향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모름지기 예술은 아날로그적이어야 한다는 게 예술계의 일반적인 주장이었죠. 디지털 사진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겁니다. 이제는 대부분의사진작가가 디지털카메라로 작업합니다. 하지만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사진계에선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사진'으로 인정할지 말지 자체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습니다.
취파

그런데 최근 들어 정말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예술계가 그동안 은근히 내려다 보던 기술을 앞다퉈서 적극 받아들이기 시작한 겁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최근 진행 중인 간송문화전 3부 '진경산수화'일 겁니다. 정선, 김홍도 같은 조선 후기 화가들의 진경산수화 대표작 90여 점을 보여주는 전시입니다. 이 전시는 국보급 명작들이 대거 포함된 작품들 자체가 귀한 볼거립니다. 그런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관람객들에게 특히 큰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전시장 한 쪽 벽에 대형 모니터 두 대를 나란히 배치해 놓고 왼쪽 모니터엔 원작을 오른쪽 모니터엔 원작에 등장한 장소의 현재 풍경을 카메라로 찍어서 동시에 보여주는 코넙니다. 아주 단순한 아이디어지만 원작과 관람객들 사이에 놓인 300년 이라는 시간적 거리, 풍경화라는 주제에 꼭 맞아서 원작들을 보는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디지털 기술을 적극 수용하려는 예술계의 변신은 우선 신기술들을 활용하면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이나 봐 온 작품들을 신선해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입니다. 실제로 카메라 이동이나 줌인 줌아웃 같은 기능이 가미된 영상으로 보면 같은 작품도 사뭇 다르게 느껴지곤 합니다. 특히 소형 작품이나 오랜 세월에 색이 바랜 고미술 작품의 경우, 확대하고 색 보정 작업까지 거친 영상이 원작보다 보기 쉽고 이해하기 쉽다는 관람객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예술계가 디지털에 경쟁적으로 러브콜을 보내는 더 근본적인 이유는 절박함입니다. 액자에 갇힌 채 벽에 못박혀 있는 그림만으로는 화려한 영상 문법에 익숙한 디지털 시대 관람객들의 눈을 끌 수 없다는 것이죠. 물론, 여전히 일각에는 전시장에 부는 디지털 바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바람이 반갑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스스로를 일반 관객들과 격리시키고 왕따시켰던 '오리지널'이라는 말 속에 담긴 권위의식에서 예술계가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어서 그렇습니다. 예술이 그들만의 세상에서 나와 저같은 범인들과 어울리는 건 그들을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 좋은 일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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