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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사정 기능의 붕괴와 궁중 암투

[취재파일] 사정 기능의 붕괴와 궁중 암투
"거악(巨惡)이 발을 뻗고 잠들지 못하게 하라" 1980년대 일본 검찰총장을 지낸 이토 시게키의 말이다. 권력을 쥔 거악을 감시하고 척결하는 것은 검찰의 변함없는 목표이다. 물론 우리 검찰은 그동안 목표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왔다. 거악보다 소악에게 더 엄정했고, 때로는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 역할도 자청해왔다. 대검 중수부가 폐지된 것도 결국 국민의 칼이 아니라, 정권의 칼 노릇을 했던 검찰의 업보다.

그러나 검찰이 권력자들의 지나친 전횡을 견제하는 최소한의 사정기능을 수행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권이 장악했다는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검찰은 정권 초기에 실세라는 천신일 회장을 구속기소했다. 정권 말에는 대통령의 멘토라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을 구속했다. 우리 검찰이 거악이 발을 뻗고 잠들지 못하게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잠자리에서 조금 뒤척이게 할 정도는 된다.

검찰의 사정 기능은 현 정부 들어 한없이 약화되어왔다. 특수수사의 사령탑이자 가장 날카로운 칼이었던 대검 중수부는 폐지됐다. 검찰총장 휘하엔 수사기능을 가진 직할부대가 이제 없다. 정권이 불편해하는 수사를 밀어붙였던 검찰총장은 치명적 폭로의 대상이 된 뒤, 자리에서 물러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정통 수사 검사라는 평가를 받았던 많은 검사들은 산 좋고 물 좋은 지방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검찰은 이제 대형 재난의 원흉으로 지목된 기업인의 행방을 쫓거나,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지적한 사항에 긴급 대응하는 충직한 국가기관으로 거듭났다.

중수부가 폐지될 당시 나는 특수수사 기능이 약화되면 결국 힘 있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할 것이라는 글을 썼다. 휘어진 칼이든 올곧은 칼이든, 칼 맞는 사람 입장에선 칼이 없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지금 검찰의 칼을 사라졌거나, 거의 쓰기 어려울 정도로 무뎌진 상태다. 검찰의 칼이 사라지면서 그동안 칼을 맞을까봐 자제했던 세력들에게 활개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검찰의 힘은 약화되고 이를 대체할만한 사정수사 기관은 눈에 띄지 않으니 사정기관 눈치를 보던 세력들에겐 요즘처럼 호시절이 없다.

이 같은 상황은 처음 벌어진 일이 아니다. 검찰이 정권을 향해 똑바로 수사를 하지 못했던 시절, 검찰이 원칙대로 처리하지 않았거나 외면했던 사건들이 결국 대형 게이트로 비화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 시절 이용호 게이트가 대표적이고, 그 밖에도 검찰 수사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은 사건이 곪아터져 게이트나 특검으로 이어진 사례가 많았다. 제 몫을 하는 검찰은 정권의 부패와 독주를 막는 기능을 하고, 장기적으로 봐서 집권세력에게도 도움이 된다.

청와대 내부와 청와대 외부의 경쟁,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공식라인과 비선라인의 권력 투쟁. 공식라인이 비선을 감찰하고, 비선은 인사로 반격했다는식의 궁중암투 역시 사정기관이 제 역할을 했다면 벌어지기 어려운 일이다. 공식적으로 부여되지 않은 권력을 향유하는 비선 주위엔 자리와 돈을 탐하는 사기꾼들이 꼬이기 마련이고, 결국 부패와 비합법적 행위로 이어진다. 역대 어느 정권도, 역대 어느 비선도 이 법칙의 예외가 된 적이 없다.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요즘 청와대 근처에서 들려오는 소식에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묻어난다. 앞으로 어떤 결론이 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검찰의 무력함이 드러나고 특검의 도입되고 대형 게이트로 번지는 사태가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지켜보는 국민은 피곤하고, 취재해야 하는 기자는 더 피곤하고, 국가 전체는 불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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