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과 변호사들이겠죠”
“그렇다면 검찰은 어떨까요?”
“열 받겠죠. 무죄판결을 내리는 건 검찰을 부정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국가에 반항하는 거죠. 그래서야 출세할 수 없죠. 어차피 재판소(법원)도 관료조직인데, 조직에서 인정받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결국 피고인을 기쁘게 해봐야 얻는 건 아무것도 없죠"
일본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주인공 텟페이가 만원 지하철을 탔다가 성추행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된 뒤에 일어나는 이야기다. 텟페이는 실제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당시 수사기관이 한 말은 이렇다. “혐의를 인정하면 벌금으로 끝난다.” 죄가 없는 텟페이는 당연히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고, 검찰은 그를 구속했다. 텟페이를 처음 만난 변호사는 또 이렇게 말한다. “무죄라도 (죄를 인정하고) 돈을 내서 선처를 받으세요”. 무죄를 주장한 텟페이에겐 실형이 선고됐고. 그는 이렇게 되뇌인다. “나는 그래도 하지 않았어”
이 영화는 우리나라와 사법제도가 유사한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짧은 영화에서 사법제도의 모순, 불평등, 한계, 관행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공익의 대변자를 자칭하는 검찰은 죄를 인정하면 벌금이라며 회유하는데, 이는 무죄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면 허위 진술을 유도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의뢰인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변호사이지만, 변호사 역시 사법제도의 한계를 몸소 알고 있기에 죄를 인정하고 쉽게 가자는 말부터 한다. 법원의 판결은 유죄였고, 이게 법적 진실이 돼 버렸다. 실체적 진실은 왜곡됐지만, 누구하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텟페이는 억울해서 항소했지만, 영화의 결말은 씁쓸하다. 돈만 내면 끝났을 사안을 구속까지 되며 무죄를 주장한 텟페이의 선택이 과연 현명했을까? 이런 의문을 남게 하는 것 자체가 씁쓸한 것이고, 우리나라 상황에 접목되기에 불쾌하기까지 한다.
● ‘무기대등의 원칙’ 훼손시킨 검찰
최근 검찰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 변호사들에 대한 무더기 징계 청구한 걸 보면, 우리나라 검찰, 특히 공안 검찰이 무죄를 얼마나 싫어하는 지를 여실히 느끼게 해준다. 영화에서 나오는 일본 검찰보다 무죄에 대한 반응은 광기에 물든 알러지에 가깝다. 법률전문가 집단인 검찰이 이렇게 무리해서까지 민변 변호사들의 입을 막고 싶었는지 안쓰러움마저 생긴다.
검찰과 피고인, 피고인과 검찰. 법관 앞에서야 대등한 존재이지만, 실제론 차이가 있다. 이런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형사사법제도의 대원칙 중 하나가 ‘무기대등의 원칙’이다. 말 그대로 양쪽 모두 동등한 수준의 무기를 가지고 법정에서 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거다. 이 때문에 피의자에게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헌법상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변호인의 조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텟페이처럼) 무기는 대등하지 않다. 기본적으로 검찰은 국가기관으로 거대 권력이다. 혐의자에 대해 압수수색이나, 계좌추적, 감청, 주변인 소환, 신병처리 등 소위 말하는 강제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죄를 지었다는 것을 전제로, 혐의자의 기본권을 제약할 수 있는 권한을 검찰에게 부여했다.
이런 권한 부여는 실체적 진실을 밝혀 정의를 바로 세우고 일벌백계를 통해 유사한 범죄가 재발되지 않도록 검찰이 역할을 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변호사의 조력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일기장, 휴대폰, 사진, 컴퓨터, 은행계좌, 친구와 대화내용을 모두 빼앗긴 혐의자 입장에선 법정에 섰을 때 검찰과 대등한 위치일 수 없다. 진짜 억울한 피고인 입장이라면 속이 타들어갈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무기대등의 원칙을 사법제도가 택한 것이고, 이를 구현하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진술거부권과 묵비권 같은 자기부죄(自己負罪)거부권이다.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있다는 것으로,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역시 우리나라 헌법상 보장된 권리다. 이미 부여받은 권한을 통해 강제수사를 벌인 검찰, 즉, 수사기관에게 있어 혐의자는 유죄여야 하고, 그러다 보니 ‘죄가 없어도 있어야 하고, 죄가 아닌데도 죄로 보고’ 맹목적으로 수사할 우려가 있으니, 수사기관에서 진술을 거부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이 바로 민변에 대한 징계 청구로 삼은 게 ‘진술거부권’이다. 진술 거부 뒤에 ‘강요’라는 단어를 붙여 징계 청구 사유로 삼았는데, 변호인과 의뢰인의 유일한 무기를 훼손시킨 셈이다. 변호인과 의뢰인은 누구보다 찰떡같이 붙어있어야 그나마 검찰에 비견될까 말까한 무기를 활용할 수 있는데, 검찰의 징계청구로 둘 사이의 신뢰관계는 무너졌다. 설사 징계가 내려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변호사들의 활동을 위축시키기엔 충분했다.
● 검찰의 진실과 변호사의 진실
대한민국 공안 수사를 지휘하는 서울중앙지검 2차장은 민변의 행태에 대해 “도를 넘었다”고 했다. 피의자 의사에 반해서 진술을 거부하게 했고, 거짓 진술까지 강요했다는 말이었다. 공안 검찰의 반대편에 서있던 ‘민변에 대한 찍어 누르기’ 논란을 의식해서 인지, 변호사법에 나온 규정까지 얘기했다.
<변호사법 24조 ② 변호사는 그 직무를 수행할 때에 진실을 은폐하거나 거짓 진술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
민변 변호사가 진술 거부를 강요해 진실을 은폐시켰다는 건데, 검찰이 말하는 진실은 뭘까. 검찰의 징계 청구를 통해 확인된 건 그들에게 진실은 일방적인 것이었다. 진실은 ‘검찰의 공소장’이고, 은폐는 ‘혐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법에서 말하는 진실은 이게 아니다. 변호사법에 나온 ‘진실’은 나중에 법원에서 유죄가 선고될 경우, 무죄가 선고될 경우에 달라지는 그런 류의 것이 아니다. 만약 검찰이 기소했는데, 무죄가 선고된다면 검찰은 진실을 은폐한 것일까? 무죄 나온 검사는 민변 변호사처럼 징계에 회부돼 검사복을 벗어야 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검찰 스스로 간단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법원도, 검찰도, 변호사도, 법적 진실과 실체적 진실이 다르다는 건 인정하고 있다. 검찰 스스로 진실을 규명하는 기관이 아니라 범죄를 처벌하는 기관이라고 자칭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오류가 생길 수도 있고, 공소장에 나오는 범죄내용 역시 사건의 전모를 말하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사건, 박연차 게이트, NLL 대화록 유출 사건 등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변호사법 24조에 나온 진실이라고 하는 건 방향성이지, 검찰의 공소장이 아니라는 말이다. 법원 관계자는 “여기서 말하는 진실이 재판정에서 다뤄지는 법적 진실이라면, 변호사도, 검사도, 법관도 신이 돼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한계가 있고, 더욱이 법관 입장에서 보는 진실, 변호사 입장에서 보는 진실, 검사 입장에서 보는 진실이 모두 다르다. 재판이라는 게 결국 이렇게 상호 불신을 전제로 해서 이뤄지는 건데 이런 규정으로 징계를 청구할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
유죄를 입증하려는 검사,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 이런 확연한 입장차이가 있는데, 공안검사가 진실을 숨겼다는 이유를 들어 민변에 징계청구를 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변호사는 제2의 검사가 되고,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변호사처럼 의뢰인의 이익 대신, 진실 추구 대신, 형량 협상만 하는 변호사로 남게 된다. 그리고 제2, 제3의 텟페이는 생길 수 밖에 없게 된다.
● 변호사 ‘진술거부권 권유’를 막는 건 불법행위
검찰이 징계를 청구했던 민변 소속 장경욱 변호사가 국정원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최종 승소가 확정됐다.
지난 2006년 국정원에서 벌어진 장 변호사에 대한 강제퇴거 사건에서 비롯된 소송이다. 당시 장 변호사는 일심회 간첩사건 수사의 변호인을 맡았다. 국정원 수사관은 피의자에게 진술거부권을 고지하고, 신문을 진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간첩 사건과 상관없어 보이는 조사가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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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변호사: “카지노 이용사실은 혐의와 무관한데 왜 질문하나요”
국정원 직원: (무시)“카지노 왜 이용했죠...언제부터 가서....”
장 변호사: “혐의와 무관한 건데 그만 물어보시죠”
국정원 직원: (무시) “카지노는.....”
장 변호사:(피의자를 향해) “향후 일체의 진술에 대해 거부하라고 조언을 드립니다”
국정원 직원: “수사 방해입니다. 양심을 가지고 실체적 진실을 다퉈야죠”
<국정원 직원-장 변호사 언쟁 시작>
국정원 직원:(장 변호사를 향해) “조사실에서 나가세요”
장 변호사: “의뢰인을 두고 못나갑니다”
(국정원 직원 2명이 장 변호사의 팔과 어깨를 잡고 수사실에서 강제로 끌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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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에 나온 당시 상황이다. 국정원은 장 변호사의 진술거부 권유를, ‘진실을 은폐시키려는 강요’로 보고 강제퇴거 조치한 것이다. 변호사의 ‘조언, 조력, 자문, 권유’가 국정원 입장에선 피의자 협박 내지, 억지였던 걸로 보였던 셈이다. 솔직히 말하면, 감히 수사기관과 대등하게 맞서려는 변호사가 눈엣가시처럼 보였을 테다.
검찰도 다를 바 없었다. 장 변호사가 제기한 소송에서도 검찰은 국정원과 같은 태도를 취했다. 피고 측인 국가(국정원)을 대리한 법무부는 ‘실체를 왜곡시키는 명백한 수사방해’라고 변론을 펼쳤다. 최근 검찰이 민변 변호사에 대해 징계청구를 한 근거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물론 검찰은 징계 청구를 할 때 장 변호사에 대해 ‘피의자의 의사에 반하게’라는 단서를 단 채 진술거부를 강요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피의자 의사에 반하게’라는 수준은 뭘까? 장 변호사가 제기한 소송의 판결문을 보면 알 수 있다.
“변호인은 피의자가 먼저 요청하지 않아도 그 의사에 반하지 않는 한, 변호인의 판단에 따라 능동적으로 수사기관의 신문 방법에 대해 상당한 범위 내에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진술거부권 행사를 조언할 수 있다<대법원 2007모26>”
재판부도 이런 대법원의 판례를 인용해 국정원의 강제퇴거 조치는 “변호사의 직업수행 자유, 신체의 자유, 인격권을 침해한 위법행위”라며 ‘불법행위’로 선언해 2백만원 배상 책임을 확정했다. 검사에 비해 법률적 지식이 현저히 떨어지는 피의자를 위해 변호사가 주체적, 능동적으로 나서 변론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이를 수사기관이 막은 건 불법이라는 뜻이다. 바꿔 말하면 ‘무기대등의 원칙’을 그나마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선 변호사의 조력을 ‘상당한 수준으로’, ‘지나칠 정도로’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피의자의 의사에 반하지 않는 한’이라는 구문에 대한 해석도 마찬가지다. ‘의사에 반하지 않는 한’이라는 해석은 자신의 피의자, 즉 의뢰인의 이익를 위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이득을 위해 내지는, 의뢰인의 자유의사를 발현하지 못하게 억지로 진술거부를 하게 해야 성립한다는 게 법원 관계자의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A변호사가 횡령 범죄의 진짜 주범인 대기업 회장을 숨기기 위해, 종범인 대기업 임원의 변호를 맡아 “당신이 진술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으면, 회장님이 다치니까 무조건 부인하고 진술 거부해.”라는 정도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또, 여기서 하나 추가될 것은 피의자인 임원은 원래 진술하고 싶었는데 후환이 두려워서, 자기 의사에 반해서, 자신의 의지를 억지로 굽힌 채 진술을 거부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골적인 진술거부권 강요를 검찰이 수사방해로 해석해 변호사에 대한 징계를 청구한 적은 없다.
민변에 대한 징계 청구가 무리하다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특히 민변은 A변호사처럼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의뢰인인 피의자의 이익을 훼손하려고 한 게 아니고, 피의자의 자유의사를 박탈시켜가며 진술거부권을 행사시킨 것도 아니다. 정당한 변론기술을 활용한 것이고, 무엇보다 공안 검찰에 대한 불신이 커서 ‘없는 죄를 만들어 낼까봐’ 수사단계에서 진술거부를 해야 한다는 판단했을 뿐이다.
민변은 진술거부권 권유 이면엔 무엇보다 검찰, 특히 공안 검찰에 대한 불신이 높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검찰이 공익의 대변자 역할에 충실했다면, 수사단계에서도 입을 열었을 텐데 역사적으로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공안 검찰은 일방적이었다.
공안사범으로 지칭돼 피의자석에 앉게 되는 순간, 이미 검찰은 그에게 유죄를 확정했고 한 쪽 귀를 닫았다. 억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사전에 차단시킨 채 맹목적인 자기 확신에 빠져 피의자에게 죄를 물었다. 억울한 사람의 한 맺힌 목소리는 그렇게 사라졌고,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의 텟페이는 계속 만들어졌다.
최초의 사법살인이라는 지칭된 죽산 조봉암 사건, 납북어부 간첩 사건,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 인혁당 사건, 유렵 간첩단 사건, 문인 갑첩단 사건, 부림사건, 긴급조치 위반 등 수 많은 과거사 사건은 검찰이 공익의 대변자 역할을 다하지 못해 발생했고, 아직도 재심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헌법은 진술거부권이라도 보장하는 방식으로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했고, 민변은 불신을 자초한 검찰에게 내밀 수 있는 카드로 진술거부권 조언을 행사했다. 그런데 검찰은 최소한의 권한 행사를 이제 막으려고 나섰다.
검찰 입장에서 피의자석에 앉은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민변이 옆에서 진술거부권 행사를 권유한다면 괘씸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감히 피의자가 입을 닫아’라는 권능과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검찰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 괘씸하게 여길 자격이 없다는 말이다. 이는 민변에 대형 로펌을 대입시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있었던 많은 대기업, 권력자들에 대한 수사를 돌이켜 보자. 마치 짠 듯, 하나같이 대기업 압수수색 전날엔 컴퓨터가 치워져 있다. 압수수색 사실을 사전에 파악해 증거를 숨긴 것이다. 검찰은 이런 상황에 대해 “변호사가 사전에 정보를 입수해 기업에 정보를 주고, 기업은 오너의 혐의를 숨기기 위해 증거를 인멸 한다”고 판단했다.
어떤 경우엔 검찰이 청구한 계좌영장이 고스란히 기업 측에 넘어간 경우도 있다. 검찰이 뭘 들여다 보고 있고, 검찰이 어떤 점을 공략할 지 파악할 수 있는 수사의 핵심 자료가 사전에 유출된 것이다. 진술거부권 권유보다 질이 나쁜 변론권 행사인데, 이런 경우에 검찰이 ‘진실을 은폐시킨 변호사’를 적발해 징계를 청구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은 없다.
피의자에겐 ‘거짓말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증거 인멸은 자신의 죄에 대해선 성립하지 않기에 이를 조력한 변호사 역시 처벌받지 않는다”는 법리를 논외로 하더라도, 괘씸하다며 징계를 청구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는 말이다.
● 징계 청구 자격 없는 검찰…징계청구는 자가당착
다시 한 번 입장을 바꿔보자. 민변의 위치에 검찰을 대입시켜보면, 검찰의 징계청구가 얼마나 자가당착인지 알 수 있다. 고위 공직자의 수뢰 사건이나, 대기업의 횡령 배임 사건에서 변호사들은 구속을 면할 만큼만 죄를 인정하도록 한다. 법리로 무장한 궤변일지라도, 그럴 듯한 이유를 제시하는 대형 로펌 변호인과 검찰은 피를 흘리며 싸우려 하지 않는다.
‘너죽고 나죽자’는 동귀어진의 자세로 수사를 해봤자, 상처만 남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가 살 수 있는 방안이 모색된다. ‘구속을 면할 만큼 또는 오너 일가 중 한 사람만 정리되는, 또는 더 윗선으로 나아가지 않는 수준’에서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입장을 맞춰간다. 누구하나 노골적으로 제안하진 않았고, 구체적인 거래는 없었겠지만(그렇게 믿고 싶고),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서로 그렇게 맞춰 나간다. 관행으로 자리 잡혔기 때문이다.
변호인이 기업회장이나 고위 공직자에게 “시효가 죽은 건 입도 뻥끗하지 말고, 이 정도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른다고 하세요”라고 하면 적당한 선의 수뢰액과 횡령 배임액이 설정된다. 법적 진실은 5000억대 횡령이고, 10억원대 수뢰인데, 공소장에 적시된 액수는 절반 또는 그 이하로 맞춰진다.
비록 기업 회장이 진술거부권을 행사하진 않았지만, 검찰이 민변 징계의 핵심으로 본 ‘진실’은 더욱 노골적으로 훼손됐다. 더욱이 철저한 수사를 통해 범죄를 밝혀야 하는 수사기관, 즉, 검찰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부정한 것에 가깝지만, 이런 이유로 검사나 변호사 모두 징계가 청구된 적은 없다.
검찰은 억울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작성한 뇌물사건 공소장만 살펴봐도 그런 말은 못할 것이다. 뇌물 사건 공소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건 ‘뇌물을 받은 사람’인데, ‘건넨 사람’은 피고인 명단에서 제외된 경우가 많다. 뇌물공여죄가 존재하는데도 말이다. 뇌물을 준 사람 입장에선 “뇌물을 건넸다”고 인정하는 순간 본인의 죄가 추가되기 때문에, “안줬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확고하다.
검찰 역시 준 사람의 입을 열어야 받은 공무원을 처벌할 수 있기에 공여자를 설득한다. 공여자의 진술이 없으면 두 사람 다 놓칠 수 있기 때문에, 죄질이 더 나쁜 공무원이라도 처벌하자는 생각에 공여자는 어느 순간 기소 대상에서 제외된다. 일종의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유죄 협상제)인데 우리나라에선 허용되고 있지 않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금품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 금품을 줬다는 허위진술을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모든 뇌물 사건에서 검찰이 기소를 면하게 해주는 대가로 허위 진술을 유도했다는 건 아니다. 검찰 스스로도 거악을 척결하기 위한 수사의 기술로 여기고 있고, 나 역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민변에 대한 징계 청구 논리대로라면 검찰은 ‘진술 거부를 권유’한 것보다 더 나쁜 ‘진술을 유도’한 것이다.
진술거부권은 헌법에 보장된 정당한 권리지만, 진술 대가로 불기소하거나 형량을 낮게 해주는 건 헌법은커녕, 법으로도 규정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검찰은 민변의 진술거부 권유를 ‘진실의 왜곡’으로 본 이상, 이런 식으로 진술을 유도한 건 ‘진실의 실종’이자 징계사안을 넘어선 ‘불법행위’로 간주하는 게 마땅하다.
● 공포감 조장 즐기는 검찰, 남 탓이 아닌 수사능력부터 키워야
이번 징계 청구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검찰도 징계 청구 자체가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했다는 데 있다. 앞서 말한 사안들에 대해 검찰도 충분히 알고 있고, 검사들 역시 법을 공부한 대한민국 대표 법률 전문가들인데 징계를 청구한 걸 보면 ‘알면서도 했다’는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그럼 왜 했을까? 공포감 조성이다. 그 이면엔 대척점에 서 있는 민변에 대한 재갈을 물리고 싶은 욕망도 엿보인다. 사이버 검열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고, 기술적으로 가능하더라도 위헌적 발상임을 알면서도, 사이버 검열을 하는 것처럼 얘기해서 야기된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시민들은 검찰에서 혹여나 연락이 올까봐 글을 쓸 때 자기검열을 하게 됐고, 내 메시지를 검찰이 볼까봐 사이버 망명을 했다. 그렇게 표현의 자유는 위축됐다.
징계 청구도 마찬가지다. 대한변호사협회에서 검찰의 징계 청구를 기각하더라도, 변호인의 변론 활동은 위축되는 결과는 야기될 것이다. 혹여나 징계가 청구될까봐 진술거부권 행사 권유에 움찔하는 변호사가 나오는 순간, 검찰 입장에선 나쁠 게 없는 셈이다. 한마디로 전근대적인 공포감 조성이다.
민변에 대한 징계 청구가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서 증거조작으로 호되게 망신당한 뒤, 연이어 ‘북한 남파간첩 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꼼수를 동원해 복수극을 벌인 것으로 해석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검찰과 민변의 관계는 앙숙이고, 좋게 말하면 ‘정-반-합’을 이뤄가는 단계에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각자가 생각하는 법적 진실을 추구해가며, 자신의 입장에서 보호해야할 가치에 헌신해가는 방식으로 실체적 진실에 가까운 결론을 도출해나갔다. 검찰과 민변 모두 그 과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바라보는 진실이 다른 상대방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일지라도, 법정에서 적법한 방식으로 싸워가며 진실을 추구했지만, 검찰의 징계 청구로 그나마 양측 사이에 존재했던 ‘건강한 상식과 균형’은 깨졌다.
민변은 ‘건강한 균형’이라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검찰 역시 ‘건강한 상식’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동안 민변이 추구한 진실이 법적 진실이 아닐 수 있고, 실체가 다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민변은 지난날의 공안 검찰을 현재의 공안 검찰과 동일선상에 두고 지나치게 자극적인 문구로 공격했고,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이념을 위해 법기술자로서의 활동에 집착했다는 비판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민변이 설사 그랬다고 하더라도 징계 청구는 정당화될 수 없고, 검찰은 징계 청구가 아닌 수사력를 키워 법정에서 해결했어야 한다.
그동안 수많은 과거사 사건, 이른바 용공조작 사건에서 검찰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그 과정에서 민변은 거대 권력인 검찰과 비교할 때 수세의 입장이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노력했다. 검찰 덕분에 민변의 변론 기술은 성장했고, 이는 상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반면, 검찰은 정체돼 있었다. 그동안 어렵고 예민한 사건인 간첩 등 공안 사건을 쉽게 기소하는데 익숙해졌고, 증거가 조작되는데도 이를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진실 발견 능력과 수사력은 퇴보했다. 세상은 변했는데 검찰은 고인 물이었던 셈이다.
적법한 방향으로 수사력을 발전시켜 나갔어야 하는데, 검찰은 그런 기회를 놓친 것이다. 내 실력은 떨어지고, 실력을 키울 때까진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 급한 마음에 상대의 발목부터 잡아보자는 심보로 징계를 청구한 것으로 해석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법정에서 변호사와 대등한 입장이어야 할 검찰에게 변호사에 대한 징계 청구권을 준 것은 검찰이 기소권을 독점한 수사기관이라서가 아니다. 법원 관계자는 “검찰은 수사기관의 역할 뿐 아니라, 공익의 대변자로서의 역할, 준사법기관의 역할도 해야 하기 때문에 변호사에 대한 징계 청구권을 준 것인데, 이번 징계 청구는 수사기관 입장에서 한 것으로 보인다”고 에둘러 비판했다. 수사기관인 검찰이 간첩사건에서 연이어 무죄를 받자 괘씸한 마음에 징계를 청구했다는 것으로, 징계 청구의 주체가 공익의 대변자로서의 검찰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검찰은 여전히 민변에 대한 징계 청구의 정당성을 설파하지만, 그들이 말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자신의 과오부터 살폈어야 했다. 과거사 사건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불법 체포, 구금, 가혹행위 등을 통한 임의성 없는 자백’, 즉 허위진술을 받아낸 게 검사들이었다는 사실을 돌이켜 봐야한다. 허위진술을 받아낸 검사, 지금은 검사직에 물러난 검사 출신 변호사들에 대한 징계 청구부터 했다면, 그나마 노골적인 비판은 피했을 수도 있다.
이번 징계 청구로 검찰은 변론권 위축 효과 내지는 민변의 행태를 공론화 시켰다는 것에 만족할지 몰라도, 정작 사법체계의 대원칙은 훼손됐다. 검찰이 공익의 대변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엔 어렵다는 점도 재차 확인시켜줬다.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의 텟페이가 우리나라에서도 계속 생겨날 것임을 검찰이 예고해준 셈이다.
억울한 텟페이는 유죄 선고를 받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심판받기 원하는 바로 그 방법으로, 나를 심판해 주시길"